해외여행기/네팔여행기

네팔기행-포카라(2)

Jay.B.Lee 2006. 12. 18. 19:12

 

 

 

 

 

 

사진"포카라 페와호수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무슨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 왔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정 잠언집,유 시화 엮음에서

 


포카라  페와 호수는 옛날 히피들을 통해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호수가 서방세계에 알려지면서 네팔여행자들이면 꼭 한번은 들렸다 가는 곳이기도하다.
카트만드에서 예약한 작으마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
젊은 호텔 주인은 싹싹했고 호수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식당이 있다고 일러준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현지 답사를 해서 빨리 머리속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우기의 끝이어서 여행자들은 많지 않아 한결 조용했다.


페와 호수는 DAM Side와 LAKE Side 구분되어 있고 레이크 사이드 쪽이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이 몰려 있다.
네팔 오기  3개월전에 인터넷으로 도움을 청하던 한국 처녀 둘은 어떻게 귀국을 했을까?
 싼 민박집(하루에 2불)에 들려 문 잠금장치가 잠기지 않는 것도 모르고 피곤에 지쳐 잠들고 말았는데 아침에 보니 누가 배낭을 뒤져 돈 1000불과 여권,비행기표를 훔쳐가 주인에게 얘기했더니 주인이 금방 뒤뜰로 데려가더니 여권과 비행기표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자기가 훔쳐가지 않고서 어떻게 즉시 알수 있는지 주인이 도둑으로 생각된다며 경찰서에 진술경위서를 내려하니 영문으로 번역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절박한 도움 요청이었다.
1000불이면 네팔인들에겐 얼마나 큰돈인가!


여행이란 우릴 여유롭게 하면서도 또한 긴장하게 만든다.
선진국이던 후진국이던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지갑과 가방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당하게 마련이고 그후 여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점에 있어서는 차라리 우리나라가 얼마나 안전하고 좋은 나라가 되었나.
이젠 자긍심을 가져도 될 때가 되었다.
 

좋은 호텔에 묵지아니하고 싼 호텔이나 민박할 경우엔 문에 넓은 테이프를 붙여두면 열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찢어지는 소리를 내어 도둑이 놀라 도망을 갈 것이다.
아니면 탁자나 물주전자등으로 문앞에 세워놓아 경보 장치를 해놓을 수도 있고.
가끔은 첩보 영화를 참고할 필요도 있다.
그 처녀들은 잠을 잘때  여권과 돈을 넣어 둘 복대를 준비 않한 것이 실수였다.
많은 실수를 통해 배우기에는 시간은 너무 소중하고 대가가 너무나 크다.

 

 호숫가 주변을 걸으며 유리한 환율을 적용해줄 환전소,레스토랑,생과일 쥬스집,맥주집,물을 사먹을 편의점을 대충파악하고 화랑에 들려 아름다운 수채화를 감상했다.
물감값 때문인지 유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은 사기가 어렵고 떠나기전 다시 들리겠다고 하고 옆가게 네팔 고유의 칼 "꾸꾸리 "상점에 들렸다.
 젊은 주인은 손님도 없는터라 심심한지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자길 얘기를 해준다 .
산에서 살다가 카트만두에서 조그만 노점상을 하다가 돈을 모아 포카라에 와서 가게를 차렷는데 장사가 시원치 않고 딸이 둘이고 자기 나이는 27살이란다.
평지가 적은 네팔이라 산에서 살았다는 얘긴 우리나라에서 시골 살았다는  얘기와 같다.
약간 좌파적 경향을 띄고 있었으나 며칠 머무는 동안 호수가를 오가며 그와 친해져  딸에게 주라고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주기도 했다.
딸들과 안식구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저녁마다 쏟아지는 폭우로 약속을 하지 못해 결국 떠나는 날까지 못만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여행하는 내가 부자로 ,사업가로 보였는지 혹시 한국에 초청해줄 수 없는지 부탁을 했다.
 이곳에서 한국 가려면 부로커에게 들어가는돈이 5000-6000불이 든다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이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다며 원하시면 자기를 양자 삼아 도와줄 수 없냐는 청까지 한다.자기의 운명을 바꿔 줄 수도 있다면서.
전지 분유가 아닌 흰우유와 쇠고기 그리고 "삐꾸차(Buick)"를 그리며 미국을 가길 원했던 우리나라 사람들 .
언제 부터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꿈의 나라가 되었나.
남의 운명을 바꿔 주기엔 난 미약하다.

 


 *<꾸꾸리>


         네팔 전통적인 칼로 길이는 40-50센티정도.
         칼끝이 반월형이나 직선이 아니고 손잡이쪽으로 25도 정도 꺾여있다. 대부분의 칼은 사람을잘 벨 
          수 있도록 원형을 이루는 데 이칼은 장글에서 나무를 찍기좋게 앞으로 꺽여있어 역학적으로 조금
         이상해 보인다.우리나라  낫이 거의 90도를 인 것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이 갈 겁니다.    
         현재 15센티 이상의 도검은 국내 반입 금지로 되어 있다.

 

저녁은 한국식당"사랑산"을 찾아 그곳에서 하기로 했다.
식당 입구에서 경비가 거수경례를 척 부친다. 이곳에도 군사 문화의 잔재가?
 곧 그 어색한 인사법을 가르친 한국인 식당 사장 내외를 만났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분에게서 많은 정보를 듣고  네팔얘기를 들었다.
아들은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두 내외가 식당.여행사,민박까지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돈이란 선진국에서 벌어 후진국에서 써야하는 법인 데 후진국에서 번다한들 큰돈이 되지 않을 터이다.
왜 이곳까지 흘러와 살게 되었는지 본인이 얘기않는 한 묻지않는게 여행객의 도리다.
L.A는 특히 한국에 있을 때 무었을 했는지 묻지 않는 것이 기본 예절이라고 일찌기 배운바가 있다.
한국에서 대 기업에서 중역까지 했던 사람도 막노동 ,컨비니언스 샾,과일가게,세탁소 운영등등 그네들의 과거란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부도내고 도망온 사람부터 남의돈을 가지고 줄행난 친후 잘살고 있는 부류들까지 과거를 내놓기엔 부끄러운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허긴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 남의 돈도 내돈으로 보이겠지만.
여하튼 L.A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선 특히 조심할 일이다.

 

얼마전 여행중 이곳에서 만난 한국 젊은이들이 호수가에서 보트에서 전부 뛰어내리기로 하고 일시에 뛰어 내렸으나 한 여학생이  올라오지않아 카트만두에서 영사가 달려오고 한국부모들에게 연락하여 식당은 임시 사고 처리본부로 변했다고 한다.
뛰어내리자고 제안 했던 학생이 얼마나 괴로와 하는지 자기가 위로해주었고 했다.
 며칠뒤 부모가 도착해 시신을 건져 올린뒤 사인은 물에 뛰어 들때 티셔츠가 말아 올라가며 기도가 막혀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네들이었지만 조금더 신중했었으면.
현지인들은 페화호수의 깊이를 잘 모른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깊다는 얘기다.
돈을 잃은 처녀들이나 ,보트를 뒤집는 장난을 쳤는지 정말로 젊음이 넘쳐 대여섯명이 물로 일시에 뛰었는지
 확인할수 없으나 도전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많은 대신 사려심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 4000원 상당의 된장찌게(카트만두 고급호텔에서 커피가 600원이었으니 그곳 수준으로는 고급음식이다) 를 먹고 있자니 사장 아저씨는 종업원을 계속 야단친다.
게으르고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서.
사실 우리나라 사람처럼 약삭빠르게 일 잘하는 민족도 드물다.너무 머리가 좋은 것도 때론 단점이지만.
반바지 밑으로 달려드는 모기들을 쫒으며 이곳에 요양차 와있다는 한국인 J사장을 만나 10년지기처럼 그의 얘기를 듣는다.
그분도 한국인이,아니 자기의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4년정도 년배인 그는 한국에서 D건설에 근무했고 호주로 20여년전 이민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나 1년여전 여동생 내외와 남동생을 태우고 호주에서 여행중 한적한 곳이어서 무심코 차선 변경시 차가 뒷차와 충돌한후 날라 골짜기에 떨어졌다 한다. .
한달후 콤마에서 깨어난 그가 아들내외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어버님이 제일 심하다고 얘길 들었다고 했다.며느리는 호주 백인 며느리라고 시아버지의 사랑이 넘친다.
캐나다에 이민온지 20년이 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마지막 소원으로 흑인 손자만은 안고싶지 않다던 교민이 갑자기 생각난다.

 시간이 가고 회복이 되면서 그네들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책감에 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 잃은 제수씨는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귀국한다고 했으며 자기는 요양차 호주를 떠나 필립핀에 머물렀다고 했다.
아마도 죄책감을 잊기위해서라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육체적 요양도 필요하지만 정신적 요양도 필요했을 것이다.
필립핀에 머무는 동안 자기를 돌보아주던 간병인 도우미가 꼬드겨서 시내 고급 여자들이 모이는 곳에서 여자를 만나 처음 잠자리를 했는데 간병인의 귀뜸으로 환자라는 걸 알고 차분하게 대해준 여자 때문인지
발기가 되고 사정이 되었을 때 가족들이 죽었다는 슬픔도 잊은채 그렇게 기뿔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말로 살아남은 자의 기쁨이요 슬픔이다.


또 자기가 부자 홀아비인 것을 알고 20대인 자기 딸을 줄터이니 자기딸을 위해 식당을 열어주고 나이많은  자기가 죽으면 식당을 딸에게 양도한다는 계약 제안도 그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했다.
식당은 얼마짜리냐고 물었더니 2만불정도 라고 .
현재 필립핀 경제를 고려한다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지금은 곧 날씨가 좋아질 네팔에 와서 처음엔 비싼 호텔에 있다가   냉장고가 있고 에어컨이 있는 민박집 특실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J사장은 필요하면 낚시대와 자전거까지 쓰라고 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분에게 많은 신세를 입었으나 포카라를 떠날때 내가 줄수 있는 게 없어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손바닥 만한 책,작은 성경 귀절 모음집을 드렸다.
아마도 지금은 호주로 돌아가 손자들과 시간을 보내던지 필립핀 씨티뱅크가 제안한대로 작은 섬을 사서 방가로 몇채 짓고 일본손님들을 받고 있을지.
절룩걸이던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었으면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열대 기후의 특성이겠으나 포카라는 밤이면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도로와 개울은 넘치고, 세상을 휩쓸듯한 비가  아침이 되면 그쳐 그많은 물들이 어디로 갔는지 호수의 수면은 어제와 같고 개울의 물들은 졸졸 흐를 뿐이었다.
마치 페와 호수 바닥 아래로 구멍이 나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침 새벽 산책길에 나섰다. 호텔뒤 주택가로 걸었다.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마스떼"하고 공손히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외국인에게서 인사를 받는 것이 웃습다던지 당황스럽다던지 내색하지 않고 경건히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옛날 예의 바르던 우리 시골 어르신네들 같다.
가난한 나라들의 특징이지만 전기값이 비싸고 T.V가없는 농촌이어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의 기상 시간은 매우 이른 듯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5시면 호텔 아랫집 여편네의 쫑알거리는 소리에 꼭 잠을 깨곤 했다.
처음엔  꼭 부부 싸움 한는 줄 알았다.
시골의 가정주부들은 아침일찍 일어나 긴 풀비로 집 현관 앞을 조용히 쓸곤 했는데 먼지를 쓰는 것이라기보다 그 모습들이 마치 무슨 종교 의식을 치루는 행위 처럼 한쪽에서 한쪽으로 조용히들 쓸고 있었다.
그네들에겐 쓱쓱 쓴다는  빗질이란 표현은 없는 것 같았다.
엄숙한 표정 때문들 이었을까?
주택가에 자리잡은 찻집에선 아침부터 찌아나 커피를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다.
자기집에서 마시지 아니하고 아침부터 밖에서 차를 사먹는 습관이 신기해 보인다.
아침부터 사랑방같이 떠들일이 있는지 집에서 불을 뗄 기구가 마당하지 않은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사진 : 포카라 고아원
        원장과 선생님. 가운데 좀 키 큰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아침에 만났던  아이다.

새벽길에 잘 생긴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온다.
너희집이 이 근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저기 Welfare House에 산다고 .
고아원(Orphanage)을 얘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한번 방문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따라 오시랜다.
그를 따라 간 곳은 일반 주택과 떨어져 논가운데 자리잡은 작은 집으로 들어 갔더니 남녀 꼬마들이 외국인인 나를 보고 소릴지르고 야단들이었다.
원장과 남자 선생님이 나와서 인사를 했다.
원생들은 20명(5-12세정도)이고 원장,남자선생님한분 ,식당 아주머니,여선생님 한분이 전부였다.


고아원은 8평 정도의 교실과 3층으로 된 나무 침대가 놓인 5평 정도의 남자방,여자방,작은 주방겸 식당,원장실(침실)이 있는 작은 건물이었으며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였다.
다행인 것은 크지않은 앞마당은 잘자란 잔디밭 때문에 멀리서보면 작은 전원 주택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네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가족애가 아직 강한편이서 부모가 없을 경우라도 집안 형제,친척들이 돌보기 때문에 돌보아야 할 고아들은 많지 않으며 고아원 식비는 1년 700불로, 외국의 후원금들로 충당된다고한다.
아이들에게 당장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했더니 같이 놀아만 줘도 감사하다고.
우선 가지고 있던 네팔 루피를 털어 원장에게 기부금으로 내놓았더니 남자 선생님이 영수증을 써준다.
그곳을 나오며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모였다.
후일 아이들이 자라 떠날때 한장씩줄수 있도록 사진을 보낸다고  약속하고 한국에 돌아와 20여장을 인화하여 네팔로 보냈다.
다행히 니콘 F3로 찍은 사진속에는 신발들도 제대로 신지 않은 아이들였지만 행복하게 웃는 모습들이 잘 나왔다.
행복은 전염되던가 짧음 시간이었지만 그네들의 맑은 표정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나조차 행복한 느낌이다.
훗날 포카라를  방문하는 분이 있다면 치솔 치약,학용품,신발,사탕,장난감을 가져 가시기 바람니다.

 

가능한한 여행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떠나려하나 간혹 오해나 편견으로 인해 정보가 정확지 못한 경우가 네팔이기도 했습니다.
힌두교가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고해서 술을 먹지 않는 줄 알았더니 시골까지 맥주 ,위스키 광고가 들어가 기겁을 했습니다.
또 소를 존중할 것으로 생각, 그나라의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로 비상 식량으로 쇠고기 육포를 가져 가려다가  두고 갔었는데, 카트만두 타멜에선 스테이크 집이 있었고 고기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네팔 사람들은 생각만큼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지배했던 영국의 영향도 있겠지만 모두들 영어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고아원 소년도 그렇고 밤에 길 잃어버렸을때 도와준 포카라 구멍가게 애기엄마도
영어를 잘했습니다.
카트만두 외곽 산들을 보러 "나갈코트'에 갔을때 "하시시"(대마초 종류)를 파는 소년에게 난 담배도 않피우고 한국에 가져가는 것도 불법이라 못사준다 했더니 관광객이 않사주면 우린 어떻게 먹고 살라고 아주 시비조로 달라들며
이거말고 돈버는 방법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던 녀석도 아주 영어를 잘했습니다.
네팔은 가난한 나라지만 숙소,식당,언어의 문제가 없는 나라인 고로 여행객들에겐 천국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참고:

포카라 고아원 주소

 

"Children  Welfare Home'

Dihikopatan PO box 364

Baidam-6,lakeside Pokhara, Nepal

 

Phone No: 00977-986021109

E-mail: sureshbb@hotmail.net

Wwb site: http://www.geocities.com/pokharac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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