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네팔여행기

네팔기행(6)

Jay.B.Lee 2006. 12. 18. 19:28


꼬부꼬불한 산등성이 길를 달려 "나갈코트"에 도착하니 조그만 구멍가게와 Cafe만 눈에 띌뿐 호텔이나 롯지(Lodge)간판도  보이지도 않는다.
호객꾼도 없고 너무 한적하여  어디에 숙소를 정해야 할런지 걱정이 되었다.

우선  Cafe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손님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아직 우기의 끝이어서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여름이 되면 피서객이 북적거리다 더위가 물러가면 한적해지는 동해안 해수욕장과 같다고 할까.
여행의 최적시기인 10월이 오면 이곳도 북적대겠지.
이제 이곳 커피맛에 제법 익숙해져 먹물처럼 검디 검은 커피 색갈도 아름답게 보였다.
한번 기회가 있으면 네팔에서 재배하는 커피 종류가 무었인지 알아보리라.
"아라비카"인지 "로부스타"인지.
카페주인 부부는 젊은 사람들로 안주인은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손님도 없어 심심하던차에 너 잘만났다는 표정이었다.
얼굴을 보니  배운 사람들 같아 보였다. 
카투만두 시내에서 있다가 장사가 아니되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힘들어 보일까.
삶이란 때로 투쟁임을 깨닫기엔 그네들의 눈빛은 선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커피를 마신후 소기의 정보를 얻어야 했다.
삼거리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적당한 호텔이 있으며 가격은 어는 정도인지  감을 잡는다.
호텔 같은 곳이 나올것 같지도 않은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보니 작은 호텔 간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처음보이는 몇개 호텔들을 지나쳤다.
언덕위에 하얀집인 호텔이 레스토랑 간판과 함께 보였다.
 Hotel"Elephant Head".
호텔 "코끼리 머리"  아니면 호텔 "코끼리 대가리 (?)".
우리말로는 지어선 아니될 호텔 이름으로 영어 그자체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Elephant Head가 익숙한 이름처럼 들리는 것은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잘 보이는 Diamond Head와 순전히 운이 맞은 탓이다.
돌계단을 올라  아기자기한 작은 정원과 정원의 붉은 꽃들이  흰건물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좀 영악해 보이는 젊은 지배인이 나를 맞았다.
아니 내가 호텔 지배인을 찾았다하는 편이 옳겠다.
우선 방을 둘러 보기로 했다.
말이 호텔이지 방을 둘러보니 흰 벽으로된 장식없는  작은 방에 초라한 침대와 양변기와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샤워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봐줄거라곤 그래도 전망이 좋은 언덕에있어 창밖 풍경이 그럴싸 하다는 것이었다.
*"전망 좋은 방 "에 하루 묵기로 하고 지배인과  450루피(5000원 상당)로 방값 합의를 보았다.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1986년 아카데미 3개부문 수상작으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작품이다."
하워드 앤즈"및 "남아 있는 나날'도 감독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와 줄리안 샌즈가 주연했으며"나의 왼발" ,"아버지의 이름으로", "순수의 시대" 및"갱스터 인 뉴욕"의 주연 배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나온다.


샤워를 한 후 주위를 돌아 보기로 했다.
올라 오던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꼭 산장 비슷한 집들이 두었 눈에 띄고 아직 간판도 없는 신축 호텔이 눈에 보였다.
네팔 고유의 탑모양을 딴 붉은 집이  석양에 더 붉어 보였다
주차장 마무리를 하고 있어 호텔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사람 좋아보이는 친구가 나오더니 아직 정식 오픈은 아니 하였으나 묵고 싶다면 묵을 수 있다고 한다.
요 위 "코끼리 대갈통"에 묵고 있으며 한번 방구경을 해도 되냐고 물으니 방을 보여 주는데 한번도 쓰지 않은 새 침대 시트며  욕실이며 .
 가격은하루에 500루피(5500원 상당).
 "Elephant Head"호텔과는  시설이 우리나라 호텔과 여관 차이만큼이나 컸으나 이미 돈은 지불한 것이고
"전망좋은 방"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 가격은 정식가격이 아니고 그 젊은 친구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것이기에 그렇게 싼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했다.
성질 급한 놈은 언제나 손해보기 마련이다..
그 친구도 심심하고 나도 심심하기는 마찬가지.
그 친구는 관광차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좀 이해가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관광버스로 왔다가 히말라야 전망을 보고는 휙 가버린다고 했다.
저 언덕 길로 내려가 시골 사람들의 집도 보고 염소와 토끼도 보며 네팔의 시골 풍경은 보고 가면 얼마나 좋겠냐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이었다.
잘못하다가는 나도 그렇게 될 터이어서 여행자로서 부끄러울 뿐이었다.

 

숙소로 오는 길에 20살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그림엽서를 사달라고 조른다.
병풍처럼 생긴 엽서로 워낙 조잡해 완전 내수용이지 외국인들이 사가기엔 그래서 애당초 부터 살마음이 없었다.
그녀석은 그럼 "하시시(대마초)"를 사겠냐고  묻는다.
그녀석이 먼저 얘기했던 영어 잘 한다던 친구로 외국인들이 대마초마저 안사주면 우린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담배도 아니 피우는 내가 대마초는 어떻게 피우며 그놈 먹여 살리자고 사줄 수도 없는 법.
난 피울줄도 모르고 한국에 가져갔다간 교도소행이라고 했더니 이해가 빨리 되었는지 작전을 바꾼다.
이곳 네팔에서 무엇을 하면 돈을 벌수 있을까 좀 가르쳐 줄 수 없냐는 것이다.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처음엔 내차례요,다음에 네차례리라.
어쨌던 후일 그녀석은 사업가로 성공해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남보다 앞서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것은 그 나이에 남보다 앞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마초를 보니 처음 카투만두 게스트하우스에 묵던날 새벽 한시에 헬레레 거리며 호텔 전체가 울리도록 시끄럽게 했던 녀석들은 대마초 파티를 했었나보다.
 그래도 조용히 해줄수 없냐는 내말에 어느방에선가  "쏘리" 하며 그 후론 쥐죽은 듯 조용했던 착한 녀석들이었다.


저녁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은 곳이어서 숙소 레스토랑에 내려 갔더니 호텔 지배인이 주문을 받는다.
메뉴가 다 되는지 궁금했지만 그메뉴는  안된다는 대답은 서로 어색할 것 같아 쉽게 될 것 같은 밥과 감자 들어간 야채를 시켰다.
시장이 꼭 반찬이 아니라도 카레가 살짝들어 간것 같은 큰 접시에 담긴야채와 밥을 맜있게 먹었다.
주방장과 주방장 부인인 듯한 여자까지 나와 맛있게 먹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 심심한 차에 온 외국인 바라보는 재미에 나왔는지 식당으로 나와 관찰을 한다.
엄지 손가락을 쳐들어 "베리 굳'이라고 하니 주방장이 만족스러운지 입이 벌어진다.
한 사람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준데 대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한 사람만을 위한 서비스.
요즈음은 레스토랑 전체를 통채로 전세내어 이벤트형식으로 프로포즈하는 젊은이도 있다지만 내겐 기억나는
나만을 위한 써비스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총각시절 효창동에서 하숙하던때 효창동 외인 아파트 부근에 이발관이 있었다.
이발관 주인은 키가 훤출하고 젊은 시절 미남 소리 들었슴직한 서글서글한 사람으로 이래뵈도 자기 안사람이 이화여대 출신이라고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던 놓고 가던 부인이 나가자 자랑을 했던 이발관이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용모로 인해 사기 결혼을 한것이나 지금은 서로 행복하고 유복하게 산다던 주인이 있던 단골 이발관이었다 .
어느날 오후 이발관에 들렸더니 손님이 하나도 없어 이발을 마치자  여자 셋이서 붙어 양팔과 다리를 안마를 해주는데  나만을 위한 이발관 같아 얼마나 황홀하고 미안했던지.
옛날 왕들이 그랬을까.


90년 4월초  캐나다 에서 Finance Director 와 서울 출장시 마침 4월 5일이 휴일이고 해서 현대 자동차 울산공장 구경을 시켜줄까하여 울산 공항에 내렸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되고 먹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현대중공업앞에 위치한 다이아몬드호텔(현대계열사) 로 갔었다.
다이아몬드 호텔앞에는 약 2000명의 전투경찰이 포진하고 있었고 호텔엔 손님이 있기나 한지 조용했다.
양식당에 들어가자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다.
손님 둘을 위해 4명이 옆에 붙어 써비스를 했다.
나에겐 그 독특한 써비스가 기억나지만 같이 동행했던 그 친구는 전투경찰들 ,경찰버스,곤봉에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귀국해서도 종종 그 얘길 하곤 했었다.

 


먹을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는지  카트만드 에서 오다가 중간 "박타폴" 버스 정류장을 오가던 독일 청년이 식당으로 들어 섰다.
무얼 시켜야 할지 한심스런 눈 빛이다.
남의 일에 나서지 않는 것도 좋지만 사랑이란 베풀어야 하는 법.
이미 내가 주문하여 시킨 메뉴를 맛있으니까 권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독일 쏘시지를 기대하는 건 무리니까.
여행시엔 선험자의 말을 잘듣는 것이 좋다.
그래야 시간도 절약이 되고 돈도 적게 들고 맛있는 것을걸 먹게될 기회도 많아 지는 법이다.
그는 산아래 산장에 숙소를 정했다고 했다.

 

이름이 Kapil이라는 호텔 지배인은   다음달이면 말레이지아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얼마나 받는냐는 말에 월250불받기로 계약을 했다고.
우리 돈으로는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다.
그래도 이곳의 월급과 비교하면 그곳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좋은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곳 계약이 끝나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그들에게  우리나라 한국은 정말 "희망의 나라"일까 .
언젠가 T.V에선 귀국한지 한달 반 밖에 아니되었다는  네팔리는  한국이 너무 그립다고 했었다.
맛있는 음식이며,노래방이며,소주며 삽겹살이며.또 친구들이며.
사업을 시작할만한 돈도 꽤 많이 벌었다고 했다.
5년만에 고국,고향에 왔어도 마음이 떠있는 상태로 아직 일을 시작할 상태가 아니라 했다.
그래, 그것은 마치 꿈결에 잠시 다녀온 기분일 것이다. 
아마도 그가 느끼는 그리움이란 돈 때문 만도 아니고  무질서가 아닌 질서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Kapil에겐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


아침 일찍  반바지에 가벼운 배낭차림으로 호텔 지배인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아침안개로 인해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호텔밑 구멍가게에  있던 큰 개 두마리가 양 옆으로 마치 나를 호위하듯 따라온다.
왜 따라 오는 것일까.
집에서 기르는 우리집 개냄새가 지금까지 날리도 없고 또 숫캐가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 T.V프로에서 암자 밖까지 따라가 손님을 배웅하는 진도견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런 녀석들이 아닐까했다.
한 2키로 정도 갔을까 두마리의 개는 방향을 돌리더니 돌아가 버렸다.
아, 그때서야 나의 우둔함을 깨달아 무엇을 주고 싶었으나 배낭엔 윈드자켓과 물통뿐이었다 .
오늘 따라 크레커는 호텔에 두고 왔다.
그 녀석들이 따라 온 것은 배가 고파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을 것을 기대하고 따라 온 것이지 나를 호위해 온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주는 기미가 없자 돌아 간 것이었다.
녀석들아, 용서하거라.

 

호텔에서 빠른 걸음으로 한시간 10분 정도가니 전망대 망루가  있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흰산들이 아침 햇빛에 붉은 빛을 띄우고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망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망대에 섰다.
병풍처럼 늘어선 신비스런 영봉들이 쫙 펼쳐졌다.
180도의 파노라마다.
 에베레스트,랑탕,마나슬루가 분명 그중에 있겠지만 높은 산만 산이던가 전체가 주는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랴.
성스러운 산 ,신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얘기하는 그곳임을 아무도 부인 하지 못하리라.
한시간 동안 신비스러운 모습에 취하고 있자니 아침해로 인해 영봉들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호텔로 돌아와 조금더 문명화 된 카트만두로 가기위해 버스를 탔다.
지배인이 고급직행버스라고  강조 했다.
전날 타고온 네팔의 일반 버스에 비하면  깨끗한 중형 버스였다.
에어컨 가동은 아니되고.
한시간 반을 달려 카트만두 타멜 부근 왔을 때 릭샤를 불러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 까지 얼마냐고 물었더니.
2불. 야, 이도둑놈!
골목길이 복잡해 방향이 문제지 짐작으로3,400미터 거리일 터이다.
다시 더 쳐다보지도 않자 가버렸다.
 택시보다 비싸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 법이다.
갑자기 등뒤에서 "한국분이세요?"하고 우리말이 들렸다.
뒤돌아 보니 오토바이를 탄 네팔인으로 김치 하우스사장이라고 .
그러고 보니 김치 하우스 간판을 "타멜"에서 본 것도 같았다.
가는 호텔 모셔 드릴테니 뒤에 타라고 해서 가방은 가슴에 안고 베낭은 맨채로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 탔다.
여행하다 보면 별것을 다 타보게 된다.
88올림픽때 온 어느 외국기자가 한국을 조롱하느라 서울을"Chaos"(천지창조 이전의 `혼돈`)라고 한적이 있었다.
타멜의 골목이란 정말로 혼돈 그 자체다.
릭샤와 오토바이와 택시와 수많은 사람들로 꼬인  미로 같은 길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호텔 가까이 왔을 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뒤라 배가고파 우선 식당부터 가자고 했다.
2층에 자리한 식당은 김치 하우스라고 간판이 걸려 있었고 식당안은 완전히 한국식당 분위기-말하자면 자양동 변두리 식당이나 구로동에 있음직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태극기며,거울 위치며 탁자며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가 한국을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97,98년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면서며 우리말을 상당히 잘했다. 아주 능숙하다고 할까.
된장 찌개를 시켰는데 두부도 나오고.
두부는 현지에서 만들고 된장은 한국에서 가져오며 일년에 한번씩 한국에 갔다 온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으로 인해 상당히 성공한 듯 보엿다.
한가지 우스워 보이는 것은 종업원들이 그 앞에서 상당히 쫄아 있었다.
 아마 그가 일했던 한국에 있을 당시  상당히 심한 스트레스와 빨리 빨리에 젖어 있었다보니 그 자신도 한국화되어  종업원이 느려 터지고 한 것이 못마땅 했던 모양이었다.
빨리 빨리도 좋은 장점이 된다는 것을 배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국에 다녀온 경험이 없어 뺨다귀를  맞아본 경험이 없는 종업원들이 어떻게 신속,정확,절도 있는 써비스를 한단 말인가.

 

식사를 하고 보니 나무 상자위에 써 놓은 글이 보였다.
"귀국하실 때 혹 남은 약이 있으면 박스에 넣어 주시면 저희 네팔인들은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약에는 무슨 용도에 쓰는 약인지 꼭 써주십시요."


식사후전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 대신 "Nirvana Garden Hotel"에 묵기로 했다.
이곳 호텔들은 주위의 지저분한 모습과는 달리 콧수염을 기른 멋진 모습의 경비가 서있는 호텔 문안으로 들어 서면 딴 세상으로 변한다.
아름다운 가든이 있는 커피샾(커피 한잔에 600원).잘 훈련되고 세련된 예쁜 여직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비수기라 18불이라고 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 가격을 깍지 않고 방에 들어가 짐을 풀렀다.
호텔 방안은 서울의 일류 호텔과 다름이 없었다.
아침 새벽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가까이서 들리는 태권도 기합 소리로, 이미 창밖으로 햇빛이 환히 비추고 있었다.
카트만두 분지에 아침 햇빛이 가득 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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