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네팔여행기

네팔기행(7)

Jay.B.Lee 2006. 12. 18. 19:37
 

호텔 을 나와 아침부터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호텔 옆 학교(J.P School)로 풀이 무성한 학교 별관 같은 조그마한 강당같은 도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범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관람해도 괜찮으냐고 양해를 구했다.
태권도냐고 물었더니 태권도가 아니고 극진 가라데라는 것이었다.
극진 가라데라면 *바람의 화이터 "최영의"씨가 설립한 것이 아닌가.
일찍 네팔에 진출 학교에서 아침 수련을 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수련생의 반은 여학생들 이었으니까.
네팔 여학생들은 말랐으니가 다이어트를 위해 하는 것도 아닌데 열심인 것을 보면 운동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은 남자가 역할이 대부분을 차지해보이는 네팔에서 운동이라도 여권에 일익을 담당하는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사범이 어디서 왔으며 무슨 운동을 했는지 묻는다.
한국에서 왔고 태권도를 했었다고 했더니 지금도 계속하냐고 묻는다.
나일 먹으면 선수 이외에는 빨리 그만두는 곳이 한국임을 그는 알아야 했었는데.
지금은 태권도가 통합되었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엔 청도관 ,무덕관,지도관,창무관등으로 중국무림의 지파처럼 각파로 나누어 있었지 않았던가. 
본인은  자유 대련중 넘어진 자도 밟아버리라는 무지막지한 도장 "창무관" 검은띠 출신임을 밝혀둔다.
-믿거나 말거나.

 

*<바람의 화이터(Fighter in the wind)>


 양윤호 감독,양동근이 주연한  "최영의" 일대기에 관한 영화다.
이름도 최배달로 바꾸고 단 한번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않았던 무인이었으며 극진 가라데(공수도)의 창시자다.
만화가 방학기씨가 신문 만화로도 연재한것으로 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로 한국영화는 비장미가 있어 좋다.
중국의 실존 인물 곽원갑을 다룬 일대기는 이연걸 주연 "무인 곽원갑"으로 최근 한국에 개봉되었으나 황비홍의 아류로 너무 현란한 이연걸의 동작이 실존인물이었음을 잠시 잊게한다.
실존인물 일대기를 환타지 영화로 착각하여 제작하였나보다.
 영화를 만들땐 중국적 시각보다 세계적 시각이 필요하다.
너무 판에 박힌 스토리 구성이 중국영화의 특징이라고해도 왜  40여년전의 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왕우 주연)"냄새가 많이 날까.

 

 

도장을 나오려니 수련생의 기합소리에 나처럼 흥미가 있었는지 관광객 두명이 들어섰다.
어제 막 도착했다는 그들은 영국인들로 한명은 인도계 영국인이었다.
카트만두에 머물다가 포카라에서 체류후 다시 카트만두로 왔다 했더니 선배를 금방 알아보고는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아냐고 물었다.
졸지에 그들을 끌고 아침을 먹기위해 일찍 문을 여는 레스토랑으로 안내를 했다.
마침 나도 아침 먹으러 나온 길이었으니까.
레스토랑 이름이 "Hellena"비슷한 것으로 기억된다.
어차피 맛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5층까지 걸어 올라가 파라솔 밑에 자릴 잡았다.
엘레베이터 구경하기가 힘든 곳이니 5층임에도 에레베이터가 없어 종업원은 주문을 받으면 일층까지 내려가  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의 직업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곳에서 몇년 일한뒤 산 등정에 도전한다면 쉽게 목적을 이루지 않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카트만두는 붉게 빛나는 도시다.
초록 수풀과 붉은 옛집들이 조화를 이루며 카트만두 분지에 자리잡은 옛 고도를 내려다 본다.
 빵은 여전히 차고  딱딱 했고  잼은  빵과 따로 놀고 .
오로지 봐줄만한 것은 커피 뿐이다.

 

 아침 식사후 천천히 스와얌부나트(속칭 원숭이 사원)엘 가기로 했다.
 카트만두 주변 관광은 귀국전에 하려고 여유있게 여행일정을 짜놓아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귀국일이나 전날 도착한다는 것은 교통편이 변경될 수도 있고 우기의 이쪽 사정을 고려하면 리스크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75루피에 가기로 택시기사와 흥정을 했다.
가파른 층계를 올라 상층부에 이르자 많은 여자들이 그들의 신에게 꽃을 바치는 의식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행하는 동안 사진을 찍지말아 달라는 경고문이 보였다.
원숭이 사원인데도 원숭이는 더운 햇볕을피해 도망갔는지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 각종 탈을 팔고 있는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원숭이들은 어디에 있냐고.
 그가 가르키는 지붕 다락 같은 곳에서 원숭이들이 집안 살림 다부셔대는 요란한 소리만  들릴뿐 끝내 원숭이들은 볼수가 없었다.
원숭이들의 낮잠시간에 맞추어 온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소문난 잔치던지.
원숭이대신 네팔의 탈과 인형을 보았다
네팔의 탈들을 보면 참으로 예술적입니다.
우리의 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다양합니다.
회색및 보라색이 섞인 고색 창연한 색깔하며.
우리의 탈들은 네팔것과 비교하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사원이 카투만두 분지를 관망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라 카트만두 전경을 내려다 보기위해 자릴 옮겼다.
서너명의 젊은 외국 관광객이 카트만두 시내를 내려다보며 떠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인사를 하며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안녕하세요"우리말로 인사를 하며 자기들은 모두 프랑스인으로 인천에서 1년동안 있었다고 했다.
인턴 사원으로 왔었는지 종교관계로 왔었는지 본인들이 얘기하기전에 물어 보는 것도 실례.
그저 한국을 잘아는 외국인들을 먼 이곳에서 만난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웠다.
지금은 그래도 한국이 점점 알려져  만난 사람들중에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세번째로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진것은 다행이다.
보통은 일본 중국 다음엔 자기가 아는 아시아 국가-예를 들면 태국,베트남 아무거나 지꺼려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식하다고 할 필요는 전혀없다.
단지 그들은 친밀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뿐이니까.

 


"Tamel"은 좁은 지역이어서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카투만두의 첫날 나를 태웠던 릭샤 주인은 나를 만나자 희색이 만면하여 "My Friend"  무조건 타란다.
공짜로 태워 주겠다고 .
공짜를 좋아하지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도 알았으면 했다.
타멜 지역을 이미 돌아본 나로서는 그의 호의가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탈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귀국을 앞두고 있어 귀국 선물로 무었을 살까 걸으면서 조금 관심있게 돌아 보기로 했다.
빨간 천을 두른 "사두"를 길에서 만나 사진 한장 찍을 수 있냐고 부탁을 하니 포즈까지 취해준다.
약간의 사례비를 건네는 것이 수행자들에 대한 예의리라.
네팔의 유명한 상품이란 "석청("가짜이기쉽고 진짜라고 해도 너무 비싸다), "파슈미나(여성용 숄의 일종)""만다라(불화)", "쿠쿠리"(네팔의 전통적인 칼)등이 있다.
꿀로 얘기하자면 아카시아 꿀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맛은 없으나 온갖 여러가지 야생화에서 채취한 캐나다 꿀이나 오스트랠리아 꿀이  약용으로 좋지 않을까.한국 토종꿀이 별 것인가.
 값은 조금 과장한다면 설탕값과 비슷하다.
고기가 많은 곳엔 물반 고기반이라고 하거나 로마에 가면 관광객반 소매치기반이란 말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인만큼 향후 그곳에 여행시엔  꿀을 사오면 된다.
단지 무거운 것이 흠이다.
설탕을 벌에게 먹인다거나 가짜꿀을 만들때엔  인건비가 더 들므로 가짜란 있을 수 없는 곳이니까 가짜꿀이란 말자체가 없는 곳에서 꿀을 사는 것이 좋다.

 

불화가 너무 아름다웠으나 비싼 가격때문에 그저 박물관에 간셈치고 구경만 했다.
골동품 가게에는 간혹 오래된 것도 있고 새로히 조각한 것으로 남녀의 성행위를 적라라하게 조각한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성 박물관에는 사실 저런 조각들이 진열되어야 한다.
인도 힌두교의 영향으로 이곳에서는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한 150년은 되었다는 부엉이 목각 조각이 있어 가격을 물어 보았다.
삼청동에 있는 개인 박물관 "부엉이 박물관"이 생각나서였다.
300불.
알았다고 가게문을 나서자  깍아 주겠다고 귀찮게 계속 따라온다.

 

이곳 카투만두의 상점에 가게되면 기묘한 상품 흥정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보통 문명인들이 사고 파는  물건이란 정찰제다.
후진국형의 가격은 우선 2배 정도 부르고 마음약한 구매자에겐 30프로 정도 깍아주고 독한 놈에게는 50프로 깍아 주어 적정 가격으로 파는 것이 대체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건의 사고 파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30년전 남대문 시장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허나 이곳에서는 물건값을 물어 보면 "친구여,얼마를 주겠냐"고 되묻기 일쑤다.
아니 자기네 가게가 "쇼더비"경매장도 아니고 사는 사람보고 가격을 부르라니 울화통 터질 노릇이다.
내 비록 유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인도인의 지혜를 많이 읽었으나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너희들마저 배웠단 말인가.
그래,내가 만족하고 기쁘게 값을 치를 준비가 된 가격이 주인도 만족스러운 가격이라면 정말로 합당한 가격이리라.
그러나 나는 관념상으로만 배웠지 물건을 사는데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싶지 않았다.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는 방법중 하나인 "구매력 평가설"이 그래도 합리적이라고 믿는 나였기에 그런 현자들과 가격을 논한다는 것은  여행의 말미에 피곤한 일이었다.
그냥 문을 열고 나오는 수밖에.

 

아내를 위해 "파슈미나(여성용 숄)"를 사기로 했다.
여자란 선물에 약하고 또 혼자 나와 여행한데 대한 미안함도 보상해야하지 않겠는가.
사전 정보도 있고 해서 그래도 제법 가게도 크고 품질도 좋은 곳을 골라 마음에 드는 두장을 골라 망설이다가 그중 한장을 50불에 흥정,달러를 지불했다.
품질은 순모,혼방 염색 색상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나 순모제품으로 질감이나 색상, 가격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문을 나서려는 나에게 주인은 아까 내가 골라놓고 아쉬워하며 사지않은  파슈미나를 산다면 25불에  주겠다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본다.
50불 더하기25불 나누기둘이면 한장에 37불밖에 더 되는가.
사람을 바보 만들기는 일 순간이다.
 어느 한장을 선택하기 곤란해 하는 것을 알았다면 보통은 한장에 50불 이지만 아쉬워 하시니까 꼭 두장을 사시겠다면 80불에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아니 이자식이 한장에 25불에 팔아도 만약 남는다면 나만 바보된 셈이다.
아니면 두장에 80불 달라면  한장에 40불 준다고 할까봐 두려웠을까.
그렇다고 주식처럼 "물타기"를 해서 두장을 살 나도 아니었다.
내가 만족스러운 가격을 치뤘으면 그만이겠으나  정말이지  이런 가격구조를 가지고 장사하는 그들에게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쇼핑이 즐거운 일이 아니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타멜 입구에 자리잡은 책점에서는 모두 정찰제로 그곳에서 히말라야 전경 사진을 샀다.
나를 위해서.
이제 부터 나를 좀 더 생각하기로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동안 처자식을 위해 수고한 내가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자격이 있다던지 휴가를 즐길 권리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것등이다.
모든사진과 책자가 외국 작가가 촬영하고 외국에서 인쇄해온 것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포카라에서 만났던 경희대 한의대 여학생과 다른 두 청년을 우연히 만났다.
그네들도 귀국을 위해 귀국선물을 사려고 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2불-3불짜리 숙소에 잠을 자면서도 가족,친구를 위해 선물 살돈은 남겨두었다는 것이 기특해 보였다
포카라에서 함께 시간을 같이 했고 같이 밥을 먹은적이 있던 그들이기에 재회가 얼마나 반가운지  내가 한잔 사기로하고 저녁에 내가 묵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자요,같은 아시아권 사람도 먼나라에서 만나면 이웃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서울에서 왔다는 같은 한국인끼리야.
확실히 우리말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외국에서나 느껴보는 기쁨이다.
해외에서 오랜동안 근무후  한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사람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신문을 봐도 이해 못하는 단어가 없고 T.V를 보아도 안들리는 말이 없어 얼마나 행복했던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과 기쁨이다.
외국에서 혼자 근무시 연휴3일을 놀때 한국어가 아닌 그저 사람 말소리가 그리워 알아 듣지도 못하는 불어T.V를 하루 종일 켜 놓은 적도 있었다.
요즈음도 미국과 캐나다에 전화를 할때면 전화할 당사가가 없어도 부인들이 대신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않는다.
전화 요금은 차치하더라도 그네들의 삶을 잘 이해하는 내가 어떻게 전화를 서울처럼 달랑 끊을 수가 있나.
용건만 간단히도 때를 가릴 일이다.
외로움이란 친구로 삼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는 고통이다.

 

 


오후 "카트만두","박타풀"과 함께 17세기 경쟁 도시국가중 하나였던 파탄(Patan)에 갔다.
택시 타고 가는 도중에 검문이 있었다.
"Hi,Im  a Tourist,not a Terrorist"
구식 자동 소총을 멘 그가 통과 손짓을 한다.
그네는 웃을 여유도 없는 군인이란 말인가.
네팔의 검문 방법은 독특하다.
버스를 타고 가면 외국인과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내국인들은 할머니라도 전부 내리고 한 이백여 미터를 걷게 한뒤 그동안 버스에 군인이 올라와 이상한 짐이 없는지 검사한뒤 다시 승객들을 올라타게한다.
그들은 외국인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점은 마호이스트들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에게 사고가 발생한다면 네팔은 끝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히말이 있다한들  누가 목숨걸고 오겠는가.
관광 수입이 없다면 정부 재정도 곤란할 것이고 제대로된 사업체도 없이 외국 관광객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고로 마호이스트조차 사고를 낸다면 지지를 못받을 것은 자명하다.
 


400년전의 도시요 Dark Brown의 도시가 파탄이었다.
그러나 단지 관광지로만 남아있는 죽은 도시가 아니고 현재도 살아있는 도시였다.
건물 훼손을 두려워하여 흉물스럽게 스텐레스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불을 두려워하여 이상한 곳에 소화기를 놓아두고 접근을 막는  우리나라처럼 빈 건물이 아니고 그 오래된 건물속에서 살고 ,만들며, 팔며,배우며 살아숨쉬는 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높은 탑 주변에는 일자리 없는 사람들이 오가는 사람들,관광객 구경하느라 한가롭게 앉아있고 조잡하게 수놓은 가방을 파는 계집아이들은  관광객만 보면 꼭 사주어야 한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쫓아 다녔다.
가끔 보이는 서울에 데려다 놓아도 빠지지 않을 듯한 세련된 아가씨들과 관광객만 아니라면 완전히 400년전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박물관도 옛 건물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항시 입장료를 내국인 보다 많이 낼 각오를 해야한다.
후진국이란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차별지수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도 한때는 외국인 호텔 투숙요금과 외국인 택시 요금체계가 상이한적이 있었다.
사원안으로 들어가자 여학교가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사리로 몸을 휘감은 채 수업을 하는 여선생님을 보자 더 덥게 느껴진다.
자그마한 학교 마당을 걷고 있자니 문을 열고 수업중인 교실에서 한 여학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손을 모아 "나마쓰데' 인사를 하며 장난스레 웃는다.선생님은 뒤돌아 칠판에 무얼쓰고 있는 사이에.
교실들은 작았고 학생수는 25명 정도.

 

수업이  없는 여학생들이 빈교실 앞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흰 부라우스 교복에 초록색 스커트 인 교복을 유니폼으로 입고 있었다.
흰 교복상의때문에는 그네들의 얼굴은 더 검게 보인다.
햇볕에 많이 탄 탓이리라.
많은 관광객이 파탄에 오가지만 학교까지 찾아온 내가 그들은 흥미로웠나보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2학년생들.
학생들이 잘못하였을 때 선생님이  손바닥이나 엉덩이에 체벌을 가하냐고 묻자 영어를 잘하는 여학생이 나서서 체벌은 없고 오리걸음을 시킨다며 깔깔대며 웃는다.
교정앞에 모아 놓고 니콘 F3로 그네들의 사진을 서너장 찍었다 .
그중에 똑똑해 보이는 여학생이 주소를 적어준다.
후일 잘나온 사진들을 4x6싸이즈로 6장을 인화하여 각사람에게 돌아가도록 우송했다..
귀국후 가방에서 발견한  500루피(5000원상당)도 동봉하며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친구들과 함께 사먹기 바란다는 노트도 잊지 않았다.

 

저녁 호텔에 찾아온 그네들에게 잔디밭 정원에서 우선 우아하게 커피를  대접하고 저녁식사는 했다기에 그들을 "Fire &Ice "에 데려갔다.
그 레스토랑은 이미 내가 다녀 왔던 곳으로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이태리여자가 네팔 남자와 결혼하여 낸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특히 피자가 유명했다.
피자는 THin Pizza로, 맛은 절대로 서울 피자에 뒤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는 피자와 맥주를 시켜주고 식사를 하지 않은 나는 "미네스트로니(이태리 야채숲)'을 하나더 시켰다.
양은 많으나 토마토가 덜 들어가선지 제대로 된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먹을 수 있다는 게 늘 감사하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엇들을 할 것인가.
예절바르고 영특한 경희 한의대 여학생은 돌아가면 남은 학기를 마치기 위해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은 묻지 않아도확실했다.
H 정보통신(주)에 3년간 다닌뒤 직장에 사표를 쓰고 나온 친구는 새 직장을 알아 볼 것이라고 했다.
가을학기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는 대학원으로 진학할 예정이라 했다.
모두 서울에서 떠날때는 각자 혼자 떠났으나 귀국 비행기는 다음날 모두 같은 비행기여서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새벽 택시를 세워 공항까지 가격을 물으니 떠나는 손님,카트만두에  익숙한 여행객으로 보였는지 바가지 요금도 부르지 못한다.
공항에 도착 공항세를 남기고 팁으로 30루피를 더 주었다.
탑승권을 발급받기 위해 네팔인 가족 뒤에 줄을 섰다.
모두 목에 노란 색의 실크 를 두르고 있었다.
미국에 간다는 4명의 가족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리라. 실크로 휘감은 옷에 부티가 흐른다..
노란 천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묻자 남편이 행운을 비는 것이라고하며 자기것을 벗어 내목에 걸어 준다.
나의 행운을 빈다고 했다.
따라웃는 부인의 환한 미소가 이미 행운을 가져 줄 것 같았다.

 

네팔을 떠나던 아침 공항직원은 나에게 꼭 네팔리(네팔인)같다고 했다.
얼굴이 그만큼 햇볕에 그을린 탓이다.
당신도 서울에 오면 한국인과 구별하기 힘들 것이라고하니 즐거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가진 여권이란 것으로 국적을 나누지만 우린 모두 지구별 사람들이 아니더냐.
같은 시간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지구별 가족인 셈이다
 내 생애에 네팔에 또 올 수 있을까.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안사람과 함께 여행계획을 다시 세우리라.
네팔여행이 여자에겐 불편 할 것같아 안사람은 처음부터  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기를 피해 여행시기를 잡는다면 안사람에게도 참으로 흥미있는 여행지가 되리라.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하여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진 아침,차갑고 딱딱한 빵을 먹었다.
기내식 아침식사로 평생에 이렇게 맛없는 기내식은 없을거라고  불평이 나오면서도 떠난다는 것이 아쉬운건 웬일인가.


네팔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태국 방콕이 경유지로 방콕에서 길고 긴 환승대기 시간을 공항에서 보낸뒤  아시아나 항공에 탑승했다.
티벹을 거쳐 네팔로 내려온 젊은이들은 긴장이 풀린탓으로 에어컨때문 오들오들 떨면서도 눈을 뜨지 못한다.
베낭에서 자동차 모포 대신 쓸 요량으로  산 두터운 숄을 꺼내어 두 젊은이들을  덮어 주었다.
따듯한 숄 덕분인지 인천에 도착하기까지 눈한번 안뜨고 옆에서 잘도 잔다.
 크고 깨끗한 인천공항에 도착,좌우로 길게 퍼진 입국 수속대에서 순식간에 입국수속이 끝나자 아 우리나라 좋은 나라란 말들이 절로 나왔다.
인천 공항에서 젊은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건강과 앞으로의 행운을 빌었다.
그네들을 우연히도 서울의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행운이리라.
우리의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지는 반복이있어 즐겁고 슬픈 것.
어차피 인생이란 A단조의 슬픈 선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행복했던 시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것 자체가 슬픔이던가.
아니면 또*"투쟁의 그늘" 속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던가.


 

*투쟁의 그늘(Hard Times)
70년대 영화로 찰스 브론손과 제임스 코반 주연 영화다.
떠돌이처럼 무임승차로 돌아다니다 우연히 돈을 위해 스트리트 화이터가 된 찰스.
임시 매네저가된  제임스를 위해 촬스는 영국에서 데려온 쌈꾼과 승부를 겨뤄 이겨서 받은돈으로 노름빚을 갚아준뒤 목적지 없이, 떠나는 화물기차에 몸을 싣는 일종의 로드무비 스타일 영화다.
희망없던 미 공황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녹이쓴 화물열차에 올라타곤 스치는 철길밖을 바라보는 세상풍파에 시달린 주름진 촬스 브른손의 무표정이 일품이다.
희망을 잃지도 절망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향한 증오심도 없이 담담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오래동안 기억에 남는다.

 


현재 네팔의 비자 수수료는 미화30불로, 1년 이내 재입국시는 15불입니다.
종전 입국시마다 징구하던 30불에서 많이 완화 되었다 합니다.
네팔은 여행자중에서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으며 실제로도 재방문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네팔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후일 인도를 거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네팔은 "히말"이 있는한 만년설이 뒤덮힌 산들과 정겨운 네팔리들이 우리를 오라고 부릅니다.
때때로  나로 하여금 잊지않고  기억이나게하는  신비스러운 땅-국기조차 산봉우리가 그려진 나라,그곳이 네팔입니다.

 

주)
   네팔 여행기를 마칩니다.
   벌써 다녀온지 3년이거의 되가는 시점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본 것이오니 널리 양해 바람니다
   그래도 몇달전 일처럼  기억해 낼 수 있었던것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여행지였기에 가능했습니다(2003년 8월말-9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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