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대한 민국 역사 박물관.

Jay.B.Lee 2019. 12. 31. 06:19

 

 

 

2019.12월 방문 했던 광화문앞.

대한민국 역사 박물곤.

영상 자료원(상암동 소재)의 의 도움을 받아  영화 역사를 전시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로서 옛날의 영화 포와 영상실에 마련된 옛 흑백 영화를 포스터를 보며 잠시 추억에 젖었다.

포스터의 한문이 멋지고 지금은 다 떠나고 없는 배우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보았다.

 유명한 배우도 있고 아 ,저분이 있었지하는 이름으로 생각나는 배우도 있다.

50년대 영화가 많아 이름이 낯선 분들도 많았다.

모두가 한국영화 발전에 족적을 남긴 분들이다

 

교차로. -당시 한국인의 정서에는 "교차로"같은 정감어린  단어가 적격이었다.

 지금은 Junction 으로 해야 좋아 할까.

나중에 하와이로 이주한 "조미령"

지금 으로 보면 미인은 아니나 연기가 좋아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엔 이쁜 배우라고 믿고 있었다.

거장 유현목 감독.

제목이 억지스럽지만 문정숙,최무룡 출연이다.

 최남현은 캐랙터가 강한 연기파 배우였다.

여자의 일생-역시 문정숙에 최무룡이다.

주중녀-약방의 감초 같이 중년 연기에 늘 빠지지 않았다.

뭐든  못마땅한 듯 살짝 미간을 찌프리던 얼굴은 그 시대 시어머니의 권위적인 모습이었다.

실락원의 별

소설 제목을 차용 해도 제목들이 운치가 있고 정겹다 .

요즘같이 원어 제목을 한글로 써 놓는 무지막지한 타이틀과 비교가 된다

전택-누군지 모르나 자주 등장한다

노경희 -어릴 때 참 예쁘다고 이름을 기억하던 배우였는 데 성장하며 예쁜 배우에 대한 선호도 변해갔다.

문정숙-언제나 정숙한 여인상을 보여주던 배우.

후일 "만추"에서  원숙한 연기로 작품을 남겼다.

정비석 원작 "여성 전선"

정비석 소설 작품으로 '자유 부인"이 있었다.

 대학 교수부인이 바람피우는 소설이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희박 하던 시절이라 특정 직업의 대상이 나쁜 역을 맡을 땐 반발이 심했다.

조미령, 박암,김동원,이민 ,이해랑,주선태.

당시 연극 배우출신들도  영화에 출연했다. 

김동원,이해랑씨 같은 한국 연극역사에 빠질수 없는 분들이 잠시 외도를 한거 같다.

이해랑씨는 한국예총회장,국회의원을 역임도 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하여 연극을 공부했다.

당시 집안의 반대들을 무릅쓰고 미술이나 연극같은 분야를 택한 분들은 선구자였다.

또 자유연애를 하고 결혼하여 모든 분야에서 앞을 달려갔다.

지금은 해마다 연극인들에게 이해랑이름으로 자손들이 재단을 만들어  상과 격려금을 주고 있다.   

 

 

이민은  키가 훤출한 지성적 미남이었고 한국 최고의 미인은 김지미다.

김칠성 -미남은 아니아나개성있는 얼굴로  악역에 자주 나온 분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때정도였나  인기 라디오 연속극이 시작되면 요즘 유명 TV연속극보듯  라디오 앞에 모여들었다.

최무룡이 직접 부른 노래" 꿈은 사라지고 " 가사는 지금도 모두 기억해 오래전까지노래방에서 아는 노래가 떨어지면 한번 부르곤 하던 노래다.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뭉개구름 피어 나듯 사랑이 일고 끝없이 퍼져나간 젊은 꿈이 아름다워~"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느린 박자에 미쳐버릴지 모른다.

그시대 여성의 복장은 얼마나 우아한지

내 생애 처음 영화를 본것은  1952년 아니면 1953년 (휴전되던해) 영동 이수초등학교에서 밤에 틀어주었던 "활동사진"이었다.

나중에 커서 생각해보니 예수의 관한 선교영화였다.

 십자가를 지고가던 사람을 채찍으로 때리던 장면.

한롤이 끝나면 되감아 주고 다시 필림을 걸던 시절.

영동 가마니로 만든 가설 극장에서 변사가 대사를 읇조리던 천연색 영화 서부극을 마지막으로 영동의 노천 극장 시대는 끝났다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2학년 초  아버지를 따라 전학온 청주.

학교에선 청주 도립 공보관에서 외화를 단체로 가곤 했다.

백설공주,사막은 살아있다,아프리카 종단이 기억에 있다.

청주 공보관은 외화 전용 상용관으로 어린 우리들 입장도 잘시켜주어(그땐단체아니면 무조건 금지다) 서부영화를 보러 가곤했다.

개봉관   "청주 극장"에서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이 모두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 가다"를 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1959)시절이다.

양훈 ,양석천이 홀쭉이와 뚱뚱이란 별명으로 인가를 끌고 있었고 만화책에선 "키다리와 장다리"가 인기였던 시절이다.

전형적인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였다.

 그땐 어렸으니까 웃었겠지만 지금은 웃지 않을 것 같다,

오 내고향의 영화 포스터. 오른쪽 사진 이 60년대 만들어진 "엘디라 마디간" 포스터와 비슷하다.

남녀의 위치가 바뀌었고 우리나라 영화가 먼저다.

김내성이 1939년 대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는 탐정 소설 '마인"

초등학교 6학년경 (1960년) 긴 단행본을 겨울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읽으며 무서워 혼이났다.

해월이란 스님이 이름이 차갑게 느껴지던 공포의 시간.

탐정 소설,추리소설은 그 이후 읽기 시작해 아르센 루팡,샬록홈즈,아카타 크리스티작품까지 이어졌다.

초설. 영화 제목으로 너무 좋다 .

"첫눈 "보다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지.

지금은 만인의 아버지상으로  최불암이 대신하나 옛 시절 대한 민국의 아버지상은 " 김승호"였다.

"마부"에서 열연했다.

김희라가 아들로 한동안 액션물에 나오더니 사라졌다.

어릴때 단체로 극장에 가서본 영화 "쌍무지개 뜨는 언덕"과 "검사와 여선생" 은  인기가 많았다.

명보극장과 국제 극장의 개관 신문 광고.

세계적인 테너 "마리오 란자"는 음악 영화에 자주 등장했다.

뒤를 이어 스테파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