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의 추억

하숙집의 추억(3)-큰 딸

Jay.B.Lee 2008. 12. 18. 06:22

다른 기억나는 하숙생을 얘기하기 전에 하숙집 여주인의 아들,딸들을 좀더 자세히 얘기해해야겠다.

하숙집의 큰 딸은 당시 나보다 두살 정도 아래였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곱고 코가 좀 작아 요즈음 같아서는 성형외과로 금방 달려갔을 것이다.

 무역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드물게 모자쓰기를 좋아했다.

특히 검정색 모자를 쓰고 검정 옷을 입고 나가면 길에서 금방 눈에 뜨일 정도로 그녀의 흰피부에 빨간 맆스틱은 남성들의 눈을 확 끌었다.

요즈음 말로 아주 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분위기가" 카트리느 드느브"를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당시 회사에 처음 입사하여  은행에 Nego(Negotiation) 서류를 가져가면 남자들이 맡는 업무를 여자가,그것도 화려한 여자가 맆스틱 짙게 바르고 오면 은행 차장이 쫓아 나와 일을 빨리 진행시켜주곤 했다고 추억담을 얘기하곤 했다.

여성이 네고 업무를 맡지않던 시절에 희소성으로 덕을 많이 본 셈이다.

그녀는 우리 하숙생들을 조금 우습게 보는 건방진데가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자만심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지라도 나이차이도 적은데다 집안에서 늘 대하다보니 그렇게 존경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가깝게 지내다보면 이성으로 ,가깝게 느껴지지 못한 것인지.

예수님도 그렇하셨거늘 하물며 우리야.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우리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큰 딸이 매력이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떻게 그녀를 알았는지 오직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숙을 효창동으로 옮긴 사람이 둘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보다 댓살 많은 노총각에 해당하는 하숙생이 들어왔다.

바쁜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대하며 하숙의 일상을 보내는 동안, 삼주 정도지나  아주머니가  알게 된것은 그 분의 집이 시골아닌 서울의 제기동쪽인가 그렇고 짐이라곤 달랑 이불 한채밖에 없다는 것이다.

직장이 너무 멀어 하숙을 해야하는 상황도 아니면서 오로지 그녀를 마음에 둔 일편 단심으로 하숙을 하면서 그녀를 잡아보려는목적으로 하숙을 한 셈이었다.

 그 후 우리는 그분의 분투노력을 단막극보듯  옆에서  조용히 지켜 보아야 했다.

그러한 용기가 어디서 날수 있는 것인지 절대 비난받아야 할 일도 아니며 부럽기도 했다.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불 한채를 든채  자기 본가로 철수 하고 말았다.

그가 떠나며 "실패기"를 얘기해주고 간 것 같은데 어쨋든  재미난 사람이었다.

우선 용모부터가 족제비처럼 생겨 큰 딸이나 아주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거다.

 다른 하숙생에 비해 인물이 좀 많이 빠지고 직장이 비교가 되었을까?

지금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안사람과 언젠가 그런 열정을 얘기하며 웃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또 한 사람은  직장 선배로 하숙집에 놀러왔다가 몇개월 하숙을 하고간 직장 동료의 얘기를 들었는지 어느 날  하숙생이 되었다.

그 직장 선배는  회사 입사시 1등으로 입사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선배를 보는 사람들은 믿기지 않아 했다.

늘 어깨가 축늘어진 모습으로 다녔는데  테니스를 칠 땐 날라가듯 워낙 잘쳐 평상시 구부정하게 걷는 모습만 본 사람들을 놀래게 했다.

 모두 그를 보고는  "뚝배기 보다 장맛이다"라고 했다.

그는 당시 결혼할 배우자를 구하려고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무척 애를 쓰곤 했다.

 그 선배는 당시 어디서 살았는지 와이셔츠 손목 단추가 떨어지자 본인이 실로  소매 양끝을 꿰매고 팔을 쑥 넣고 다녔다.

마음에 드는 여직원에게 살짝 좀 궤메달라고 모성을 자극할 줄알았으면 진작 노총각 소리는 면했을 것이고 신촌 뒷산에서 놀던 아가씨들은 다 어디 갔냐고

직장 상사에게 놀림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푸른 바지가 찢어지자 흰실로 꿰맨 다음 푸른 잉크로 흰실에 파랗게 바른 다음  출근한 날 "살아있는 전설"이 된 선배였다.

그 선배도 한 달반여만에 퇴출이 되고  그후로 하숙집은 다시 평정을 찾았다.(그후 그 선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서울에서 찾지 못하고  부모가 소개하는 고향-대구 처자와 결혼했다)

사람보는 눈들은 모두 있어 큰 딸이 무섭게 독한 임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하숙생들의 공통의견이었다.

 내가 결혼하기 위해 하숙을 나오기 직전 신랑될 P씨가 하숙집에 인사를 왔다 .

육사 출신으로 보통 부르기를 당시 *유신 사무관이었다.

남자 앞에서 조신한 규수가 되어 공손히 절절매는 그녀를 보며 우라 모두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임자' 를 만난거야."

 

그녀가 결혼후 쿠웨이트로, 홍콩으로 영사인 남편을 따라  살고 있다는 소식을  늘 듣고 있었다.

실제 큰 딸 부부를 만나게 된것은  5년간의 캐나다 주재 생활을 끝내고 가족들과 귀국길에 L.A에 들렸을 때였다.

세상은 좁아 그녀는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L.A에 와 있었다.

서로의 가족들이 해후를 하게 된 것은 15,6년 만이다.

그 곳에는 미국으로 떠나셨던 부친이 늦으막하게 자식들이 보고 싶었는지 막내 두아들을 불러들여 이미 두아들이 살고 있었다.

나를 잘 따르던 막내아들은 대학 졸업후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으젓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3년전 효창동 하숙집을 안사람과 다시 찾았을 때는 작은 앞집을 사들여 부수고 마당을 만들어 변한 동네모습으로  집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아직도 정정한 하숙집 아주머니에게서 근황을 들으며  분당에 산다는 큰 딸의 소식도 들었다.

집에 돌아와 그녀의 번호를 누르자 여전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한참 동생들,자식얘기등 소식을 주고 받다가 "우리 이렇게 전화로 얘기 할것  아니라 한번 만나요'하던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또 시간이 흘렀다.

 

 

*유신 사무관-1972년 박정희 정권 당시 전쟁없는 군대의 적체현상도  해소 할겸 대위및 소령들을 예편시켜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을 시킨 후에 각 부처에 사무관으로 임명,배치했다.유신 사무관들의 국가에 대한 기여여부의  공과는 역사에 맡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