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의 추억

하숙집의 추억(4)-둘째 딸

Jay.B.Lee 2008. 12. 23. 16:08

하숙집의 저녁시간은  늘 시끌버끌 했다.

회사의 야근이나 접대 혹은 데이트가 없는 날도  항상  몇명의 하숙생 함께 식사를  했고 더우기 하숙집 딸들의 친구들까지 합세한 날들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남녀가 동수를 이룰 때 가장 소란스러워진다는 것은 이미 통계에서 증명 된바 있다.

큰 딸의 친구들도 가끔 놀러 왔고 말띠인 둘째 딸의 발랄한 친구들,회사 동료 ,하숙집 아주머니의 조카 딸까지 놀러오게 되면 누구나 부엌으로 내려가 저녁상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고 힘들어 하는 하숙집 아주머니를 도왔다.

나중에는 아주머니는 당연히 심부름을 시켰고 또 그네들도 군소리 없이 따랐다.

하숙집 둘째 딸은 언니에 비해 성격이 훨씬 유했고 약간 좁은 이마에 둥근 얼굴로 어른들이 말하는 맏 며느리감이었다.

한복을 곱게 입고 부채를 든채 서 있는 한국화의 "미인도"의 이미지를 지녔다.

지금의 젊은 여성이라면 다이어트다 운동이다 체중을 줄이고자 기를 썼을 것이다.

조금 큰 키에 통통하면서도 균형잡힌 몸매는 그녀가 고전 무용을 해서 다져졌을 수도 있다.

고르게 난 그녀의 하얀이는 처음 만난 누구도 호감을  가질수 있는 용모였다.

그녀는 저녁을 먹으며 퇴근 길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통통한 예쁜 손에 욕심이 났는지 손을 만져보는 치한들을 가끔 만난다고했다.

헌데 모두다 4,5십대 놈들이란거다.

치한이라도 젊은 놈이 아닌 나이든 놈들이란 사실이 그녀를 매우 속상하게 했다.

둘째 딸의 친구들은 나보다 6살 내지 7살 이래의 생기 발랄한 처녀들로 아무래도 하숙생들은 둘째 딸의 어린 처녀들이 편했을 것이다.

어느 저녁 큰 딸의 친구들은 하숙집에서 제사를 지낸 후 남았다는 약주 됫병의 술을  맥주잔에 가득가득 따라 원셧에 마셔 안방에 모인 하숙생들의 기를 죽여놓았다.

지금이야 술꾼인 여성들이 많아도 당시에는 그렇게 내놓고 마셔대던 여자들이 드물 때다.

큰 딸의 말괄량이 친구들이 하숙집에 왜 자주 왔을가 생각하면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하숙집엔 모두 좋은  직장에  괜찮은 친구들이 모여있어 한번 짝을 만나고자 자주 드나들었어도 당시 노처녀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남자들이 없어 은연중 화풀이 술이 되었다.

총각들이란 나이를 먹어도 어린 여자를 찾지 지금처럼 연상의 여자와 만나도 자연스러운 시절이 아니었다.

그 후론 큰 딸의 친구들은 보기가 어렵게 되고 하숙집은 어린,젊은  여자들만이 오는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하숙집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여자 하숙생 -숙대생을 받지 않냐고 아주머니께 물어 본적이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여자 하숙생을 두면

첫째 밥을 꼬박 꼬박 챙겨먹는 다는 것이다.

둘째 친구들을 데려 올 것이란 것이다.-야박하게 밥을 안줄 수도 없어 밥값을 축낸다는 것이다.

셋째 여학생을 두면 방학동안에 방을 차지한 채 하숙비를 받을 수 없다는 거였다.

넷째 여자는 불평이 많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대기업에 다니는  하숙생을 두면 하숙비 꼬박꼬박  잘내고 야근이다 회식이다 출장이다 하여 식사하는 횟수도 적고 그래서 이득이라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아주 확실한 목표와 구체적 마케팅 전략 아래  생업에 뛰어든 것이었다.

무엇이 아주머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나.

아주머니를 떠나 미국으로 가버린 남편 대신에 오남매를 키워야하는 책임감이었다.

그러고보면 하숙을 3년 하는 동안 하숙집에서 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늘 배추 된장국,시원하게 맛있게 담근 김치 그리고 가끔 오른 생선이 기억의 전부다.

식비 절감의 일환이다.

일년에 몇차례 닭개장이 저녁으로 올랐는데 닭고기는 보이지 않고 뼈를 난도질해 푹 끓인 매콤한 국물 뿐이었다. 

뼈만 사다 끓인 것인지 아니면 살을 발라 모두가 잠든 밤 ,고등학교 다니던 두 아들을 깨워 부엌에서 닭다리와 가슴살을 몰래 먹였는지 모를일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점심만 하여도 회장님의 방침으로 먹는 것은 아끼지 않는 분위기였다.

특식이 나오는 금요일 점심에는  회사에서는 평소보다 밥을 더 많이 했고 서소문 일대의 직장인들은 가끔 회사 직원들에게 초대 받아 몹시 부러워 하곤 했다.

특히 한우에 기름이 붙은 소고기(그 땐 모두 한우다)가 식탁에 오르는 날엔 총무과장이 사장님께 불려가 진땀을 흘려야 할 정도였다.

나는  퇴근후 밖에서 저녁에도 고기 먹는 횟수가 많아 하숙집에서 먹는 식물성 식탁이 오히려 좋았다.

 

하숙집 둘째 딸은 나를 많이 따라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저씨~"하며 부르던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어느 날 그녀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대판 싸운 뒤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아저씨가 방 얻어주면 대신 밥해주겠다고 나를 난처하게 했던  둘째 딸.

실제 그녀는 며칠간 잠적을 해 모두를 걱정하게 했다.

내가 결혼하여 하숙집을 떠난후 일년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신랑은 나와 동갑이었다.

공군 사관 학교 출신  파일롯트로 작은 키에 착하게 생긴 신랑이었다.

둘째 딸에게 꼭 잡혀 살면 행복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전부 작은 키의 남자만 늘 걸린다는 그녀는 그 한계를 체념한 듯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작은 남자들에게 키와 비교적 덩치큰 그녀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사실을 그녀는 알았어야 했다.

93년 귀국시 들린 L.A에서 언니로부터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고 서울에 돌아와 그녀와 연락이 닿아  그녀의 단짝 친구와 점심을 함께 했다.

16년이 지나 서로가 얼마나 변했나 궁금도 했다.

그녀는 남매를 두었고 성남 비행장 사택에서 살고 있으며 남편을 출세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

우리가 효창동 시절을 얘기하는 동안에 그녀의 얼굴이나 독신으로 산다는 단짝의 얼굴에서 사십이란 나이는 어디로 가고 잠시

경사진 언덕길에 있던 하숙집의 즐거웠던 시절로 돌아 갔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그녀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미국 으로 들어가 뉴 저지에 살고 있으며 ,남편은  대령으로 예편했다는 소식을 하숙집 아주머니로 부터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