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해안 부대에서 받은 친구의 편지

Jay.B.Lee 2016. 4. 9. 16:15

편지 중에 가장 명필인 친구가 있다 

훈련이 끝나고 33사단 (제 7689부대) 소사로  전보되자 마자 소사에서 하룻밤,소래산 중턱의 대대에 하루 머물고 해안부대에 도착했다. 

처음 본 협궤기차 수인선이 지나던 원곡역을 지나 쓰리 쿼타( 4분의 3톤을 싣는다 하여 부르던 군대 다용도 트럭)에 몸을 싣고 두메 산골같은 모롱이를 몇번 돌아 성공리에 도착했다.

지금은 없어지고 거대한 안산시가 들어 선 곳으로 중대본부 아래엔 윤종오씨가 살았다. 

착하신 분으로 우리대신 우편물을 많이 받아주었고 군인들이 고추들을 따먹어도 중대 본부에 불평 한마디 않던 분이다.

가끔 아내가 바가지 긁는 소리에 늘 찍소리 못하던 그분이어서 가엽게 여겼으나 내가 더 나일 먹고보니 그건 아닌것 같다

그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꾹꾹 참았으리라 믿는다.

당시 군에는" 냉동 탑차"가 없던 시절이라 한번 트럭으로 배달된 돼지고기를 먹고는 중대원의 많은 부대원이 식중독에 걸렸다.

밤새 초소 몇명씩 설사를 해대어 야간 해안 근무는 엉망이 되었고 사단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군인들이 집단으로 식중독에 걸렸다는 건 지휘관 문책감이다.

곧 부대에선 머리를 굴려 돼지 고기 대신 싱싱한 산 닭이 배달 되었느데  닭들이 어찌 작은지  반은 닭우리에서 조금 더 키워 잡아 먹자고 했다. 

중대장의 아이디어였다

닭들을 인계 받을 때  날라 도망가는 닭을 군인들이 좇아 다니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가끔 닭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고참 병장이 몰래 한마리씩 술안주로 삼아서다 

이 사실을 안 중대장이 펄펄 뛰었는데  상관인 선배를 밀고 할 순 없었다. 

서해안 바닷가에 근무하며 안 사실은 하루에 두번 정확히 물이 들어왔다 나간다는 현상이다.

부대에 배치된지 한달만에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형, 

7월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오.

너무나 오랫만에 쓰는 글이라서 무슨 인사의 말을 먼저 전햇음 좋을지 모르겠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느 소녀의 글은 내가 글을 통하여 형에게 줄 수 있었을 어느 Phrase 보다 많은 Ecstasy 를 안겨 주었을 거라고 

믿고 발뺌을 하지만-----

어쨋든  미안한 마음 부터 전하오.

서울의 대학가는 대부분 하기휴가에 들어가고 가장 조기 방학을 했던

 우리도 이제 일주일째 휴가를 즐기고 있다오.

다행히 우리 상과 대학만은 학기말 시험을 조용히 끝맺음 하고 방학을 맞아 여간 시원스럽지 않구려

바로 집엘 내려갈 예정이엇으나 조카들의 기말 시험을 도와주어야 해서 요즈음은 아직 서울에 체류중이오.

15일쯤 집에 갈 예정으로 있오

그리고 이형 ,오는 제헌절에 누나의 약혼식이 집에서 있을 예정이오.

 나도 모르는 동안 부모님들이 정혼을 하셨던 모양이오만 나로선 기쁨보다는 서러움,Miissing의 안타까움이 앞서는 구료.

이형,

지나번 형의 서한을 보고 마음은 마치 한폭의 수려한 동양화를 대하는 듯 하였오,

노스탈지어를 달래며 아름다운 자연에 몰입하는 마음의 여가를 즐기는 이형의 용자----

역시 이형은 행복하고 다감한 군인이구려.

오히려 속세를 탈한 무릉 도원을 옆에 두고 묘연히 흐르는 도화수를 지켜보는 선인의 경지인양 부럽기 마져하오 

나태하고 빈약한 육체를 이끌고 어제를 살고 오늘을 지켜가는 나의 모습은 오히려 돌아서기마져 혐오의 정을 금할길 없다오.

"은하회"의 모임은  최근에는 회원들의 제나름 대로의 분주함 때문에 오래동안 가지지를 못하였오.

SK형은 임박한 회계사 시험 준비로 .타회원들은 그들대로 선거전과 학기말 시험에 분주하고----

방학중에 제대로의 모임을 가질듯 하구료.

이형, 청주에 가면 또 글을 전하리다.

오늘은 이만 쓰려오. 안녕하시요.

서울에서 


69.7.10

이 J Y



그는 고교 문과반으로 학년 1위의 성적을 받았다 

불행히도 그는 첫해 상대 시험에 불합격했다.

그보다 못한 학교 성적을 가진 친구들도 서울대에 합격하여 그가 보낸 재수 기간은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행히 다음해 원하던 서울대에 들어갔다.

몸이 약한 그는 병역을 면제 받았으며  졸업후  대우가 좋았던 K 은행에 입행했다.

은행에서 해외유학을 보내주었는데 장손인 관계로 딸 셋만 있던 친구는 미국에서 네번째 아들을  가진후 귀국했다

 공부는 젊을 때 해야지 나이들어 공부할 게 아니라고 혀를 내두르던  친구다.

은행에서 몇년 근무후 H 대학교 부교수 자리로 옮겼다.

 얼마후 담도암에 걸려 2년여를 고생하다 타계했다.

모두 위스콘신에서의 공부 후유증이였을 거라고  말했다.

운명하기전 모든 투약을 중지한 그의 병실을 찾아 부인의 허락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병실을 다녀온 이틀후 사망했다.

향년 40세.

돈화문앞 신혼예식장 내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았던 친구다.

그가 떠난후 남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구 지혜로운 친구의 부인은 자녀들을 잘 키웠다.

예쁘고 고운 얼굴과 달리 부인은 무척 의지가 강했다.

IMF사태를 맞던 시기와 맞물려 지은 건물이 분양이 되지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

간간히 소식을 듣다가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에 한달전 장례식장인 청주에  내려갔다.

이십여년만에 보는 친구의 누님,동생들 .막내 여동생이 이제 육십이 되었다.

친구 부인에게서 자녀들의 소식을 듣는다.

장녀는 삼성에 다니는 사위와 결혼하고 인테리아 사업을 했다. 

둘째딸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으로,세째 딸은 박사로 영국대학에 교수로 있다.

 내아들과 이름이 같은 막내 아들은 H 그룹에 다니고 있다.

친구와 연애하던 학창시절 ,사이가 소원해지자 나에게 와서 하소연하던 부인이었는데 그들은 마침내 결혼했다.

드마마 같은 인생이었다. 

그가 보낸 편지를 보며 나의 고뇌의 시절 ,그들의 청춘의 시절이 바로 어제처럼 떠오른다.

이제 머잖아 7십이 되는 부인의 고운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결코 늙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

편지의 종이빛은 누렇게 바랬고 봉투는 파손되었다. 

친구가 보낸 위문 편지 의 사연들을 읽어보며 지금도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삽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사십의 얼굴로 영원히 내 가슴속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