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유네스코에 등재된 터키 커피(Kahve:카흐베)

Jay.B.Lee 2015. 3. 21. 02:56

 

본 내용은 이스탄불 문화원에서 발간하는 소식지 "Tulip" 2014년 17호에서 인용했다.

터키어로된 커피에 대해 번역, 게재된 것을  그대로 소개하며  번역내용이 다소 어색한부분이 있어도 이해하여야 한다. 

 

 

<커피의 역사>

커피는 하베시스탄(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어 초기에는 음식으로 활용되었다.

그후로 열매를 끓인 물을 의용으로  사용하였으며 마법의 열매로 불리우게 되었다.

커피는 15세기 초 에멘으로 알려졌고 15세기 말에는 이지역에서 흔히 사용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 메카와 카이로로 그리고 이스탄불까지 진출한 커피는 17세기 중엽에 제 2차 오스트리아 *빈 포위이후에 유럽의 주요도시로 퍼져나갔다.

커피의 발견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예멘의 높은 고원에 살고 있던 "할리디"라는 양치기가 염소들이 어느 나무의 빨간 열매를 먹자 기력이 왕성해지고 움직임이 많아지고 잠을 조금만 자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 양치기는 그 열매를 자신이 먹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아랍어로 "촉진하다 ,회복시키다"의 뜻을 지닌 "카흐 웨브"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커피는 그것이 처음 발견된 에티오피아 의 마을인 "파"에서 그 어원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예멘의 수피들이 그 시초였데 커피의 깨어있게 만들어 주는 작용이 밤을 기도와 예배로 보내는 그들의 포기할 수 없는 음료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터키인들이 커피와 만나게 된 것은 슐레이먼 대제 때다.

에멘 총독이었던 외즈데미르 파샤가 이스탄불에 커피를 처음 소개시켜 주었고 ,터키인들이 독특하게 끓이는 방식때문에 "터키커피"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터키 커피는 19세기 말까지도 원두 상태로 판매 되었기에 그것을 커피용 후라이펜에 구운뒤 ,맷돌로 빻은 뒤에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시음 방식은 1871년 메흐멧 에펜디(Mehmed Efendi)가 원두를 구워 가루로 낸뒤 판매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스탄불의 타흐미스길에 커피 내음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마흐멧 에펜디는 금세 유명인이 되었다 

커피 애호가들로부터 검은 진주라 부리던 커피는 시간이 지남에 다라 궁정으로 가 가정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양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터키 커피의 맛과 인기는 이스탄불에 발길이 닿는 상인들과 여행객들 그리고 각국 대사들에 의해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선물:터키 커피>

17세기초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유럽으로 커피를 처음 으로 수출한 이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이었으며 18세기부터 유럽에서도 많이 소비되었는데 영국은 "Coffee' 프랑스에서는 "Cafe"독일에서는  "Kaffe" 항가리에서는  "Kave"라 부리웠다.

커피가 오스트리아에 알려진 사연 또한 재미있다.

제 2차 대전 빈 포위(1683)이후 오스만군은 전장을 떠날 때 엄청난 양의 커피를 남기고 떠났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군마의 먹이로 착각했지만 오스만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던 Georg Kolschitky는 이 자루를 받기 원했고 그에게 하사되자 그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빈에 커피집을 차린다.

터키의상들이 유럽여성들의 의상을 선도하고 그들이 '*메흐테르 음악을 모방하고 있던 시기인 1669년에 오스만 제국의 대사였던 술레이만 아아가 파리의귀인들을  커피마시는 자리에 초대하였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 커피의 인기가 크게 상승하는 계기가 된다.

유모가 넘머치는 만담가였던 그의 접견실에 초대되어 커피를 마시는 것은 프랑스 귀인들 사이의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르 잔느 앙트아네트가 루부르궁의 한 방을 터키의 방으로 꾸미고서,

이방을 "A la Turca" 즉 "터키의 방식"으로 명명하였다

이방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안에 있는 궁내의 모든 여자가 유행에 따라 터키식으로 옷을 입고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음료를 마신 것이다.

 

<커피의 생산지>

17세기 말까지커피의 유일한 생산지는 예멘이었지만 그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생산지도 덩달아 늘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스리랑카에서,그 후에는 자바섬(1696),수리남(1718),마르티느크(1723),브라질(1727),자메이카(1730),

쿠바(1779),베네쥬엘라(1784),멕시코(1790),콜럼비아(18세기 말)등으로 커피의 생산은 확대대기 시작했다

현재 커피생산의 정상에는 후발 주자로 출발한 브라질이 위치하고 있으며 ,*콜럼비아와 인도네시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 외에 중요한 생산지로는 멕시코 .코티디브아르,에티오피아,우간다 그리고 과테말라가 있다.

한 때의 커피의 유일한 생산지였던 예멘은 10위권안에도 못드는 상태이다.

 

 

<터키 문화에서의 커피>

 

커피와 카페가 일상 생활에서 떼려야 뗄수 없는 자링를 차지함에 따라 ,커피는 어느 음료도 가지지못한 보편성을 가진 문화를 탄생시켰으며,초기의 문헌들에서 커피는 "터키인들이 마시는 검은 색의 ,식사와 함께 할 수 없고 맛을 깊히 음미하며 먹는 ,친구의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음료"로 일컬어졌다. 

커피는 터키 문학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 할 뿐만 아나라 ,수많은 속담과 숙어에 나타나며,시와 민요에도 등장한다.

16세기의 시인들은커피를 '학자들이한자리에 모이는 이유,청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음료,로 소개하였으며 ,역사학자들ㅇ느 카페르르 학문을 배우는 곳,또는 학문의 장으로 묘사하였다

이스탄불의 첫 카페는 슐레이만 대제때 하켐과 스라라는 두 시리아인에 의해 타흐타칼레에서 문이 열렸다.

 

그후에 이스탄불 전체로 빠르게 전파된 카페들 덕분에 모든이들이 커피를  알게 되었으며,카페는 점차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교수나 법관 같은 지식인 계층과 유명한 시인들과 학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엇다.

이 장소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시와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곳으로 크라앗하네(책읽는 집)으로 불리웠다.

오스만 제국때부터 오늘날까지 ,신랑측이 예비신부의 집으로 방문하면 예비 신부는 손님들이 커피잔을 비울때까지 쟁반을 들고 기다리는데,신랑측 대표자들은 이를 예비신부를 볼 기회로 삼았고 ,일부 지방에서 신부측에서 신랑의 커피에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 신랑의 참을성을 재어보기도 하였다

커피는 터키문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다 끝내지 못할 정도의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터키어에서는 아침 식사를 Kahvalti-"커피를 마시기 전에 먹는 식사" 라고 하는 것이 그 사례이며,"한잔의 커피에 40년의 인연이 있다"는 말이나 "쓴 커피를 마시다"(현재의 어려움이 쓴 커피에 비히면 별거 아니라는 뜻으로 화를 가라 앉히라는 의미, "마음은 커피가 아니라 대화를 원한다,커피는 핑계에 불과하다"등의 말과 속담에도 커피는 자주 등장한다.

터키 커피는 클래식 음악에서도  한자리를 차자하는 데,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그가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만든 곡이다.

터키인들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페이르 로티는 커피와 이스탄불 사랑으로 늘 카페를 찾았다.

그 자 가장 좋아 하던 카페는 이스탄불 에윱구에 있으며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17세기 말에 터키 커피 애호가들중에는 빅토르 유고,알렉산드르 듀마,몰리에르,앙드레 지드,발자크와 같은 당대의 거장들이 있었다.

 

<터키 커피를 만드는 방법>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한 물은 염소가 없고 차가운 것이어야 한다.

커피 애호가들은 ,커피를 재가 있는 숯불에서 15-20분정도 구워 내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밑바닥이 두꺼운 구리 *제즈베(CEZVE:커피 제조용 주전자)에  차가운 물을 넣고 아주 잘게 갈은 커피를 넣은 다음,한두번 섞어 준 뒤 불위에 올려 놓는데 젓지 말아야 한다,

커피와 설탕의 양은 내놓은 핀잔(Fincan:터키식 커피잔) 개수에 따라 2 티스픈의 커피와 2 티스픈의 설탕을 넣는 다.

거품이 올라오면 불에서 떼고 각 핀잔에 거품을 나누어 담고 ,다시 불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끓어 오를 때까지 커피를 끓여 핀잔에 담아 내놓는다.

터키 커피의 주요 특징중 하나는 거품이 많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섬유 같은 거품 덕분에 커피의 맛이 오래동안 입에 남게 된다.

도한 몇분동안 모양을 유지하는 거품의 성질 땝문에 커피가 식지 않고 보호된다.

터키커피를 마실 때에는 다른 것을 먹지 않는데,이는 커피 맛을 제대로 느끼지 위해 애호가들이 선택하는 또하나의 방법이다.

 

<오스만 제국 때의 커피 대접>

오스만 제국 시대의 커피 대접은 특색있는 명물이다.

어떤 곳에서는 커피를 대접하기전에 로쿰(Lokum:터키식 다과류)이나 단 음식을 내오고 ,그 맛이 없어지기전에 쓴 커피를 내오곤 하엿다..

축제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손잡이 없는 밑받침의 일체형인 핀잔(Fincan)에,그 밖의 날에는 밑받침이 있는 핀잔에 내온다.

가끔은 커피에 색다른 맛을 첨가하기 위하여 꽃물이나,용현향,혹는 카르다몸을 넣기도 하였다.

궁전에서의 커피 대접은 더욱 특별한 일이었다.

슐레이만 대제때 처음으로 커피가 궁으로 들어왔지만  음료로 자리잡은 것은 마흐메드 4세(1648-1687)때의 일이다.

군전에서는 예멘 커피만 취급되었고 커피를 내오기 위해 사용된 핀잔들은 이즈니크(*니케아)또는 큐타히야 도자기들만이 사용되었으며 ,핀잔 주변에는 손을 데이지 않게 하기위한 손잡이에 금이나 은 장식이 들어갔다.

터키 커피는 아주 어래전부터 특별한 음료로 자리매김 하였다.

불에 굽는 것부터 ,로스팅,만드는방법 그라고 대접하는 방식 모두가 노력과 청결 그리고 주의를 요하는 음료이다.

이 방법들중 하나 하나가 커피의 맛을 살리는 방법이자 ,다른 한편 커피를 대접할 손님을 얾마나 중요시 여기는 지의 여러가지 흔적이 된다

음식의 아름다움은,그것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식습관 그리고 음식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터키 커피는 다른 음식을 소비할 때 느끼는 고마움과 감사함을느끼며 마시는데,그 풍미로 인하여 그것은 터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이자 문화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 : 참고를 위해  주석을 붙여 보았습니다.

 

*2차 빈포위: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재상 카라 무스타파가( 1차 빈포위:100여년전슐레이만 1세가 실패한 전쟁을 이름)1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정규균 1200명이 지키고 있던 빈을 포위하고 60여일간 공격않고 있다가 발빠른 오스트리아 황제의 구원요청으로 베네치아 ,폴란드,독일 구원병의 공격으로1만 5천명의 사상자를 남긴채 패한 전쟁을 이른다. 무스타파는 사형에 처해졌다.

 

*메흐테르 :터키의 전통 군악대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적들의 사기를 꺽기위한 악대.

            주로 취주악기와 타악기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서양 군악대는 이를 모방하여 발전 한 것이다. 

 

*커피 생산순위: 터키에서 커피에 언급한 시절과 현재는 큰 변화가 있다.

                      브라질,베트남,콜럼비아 순위로 변경되었다.

 

*Cezve:혹은 이부릭(Iblik)이라고 한다

          터키어의 경우  C는 즈 발음으로 분명히 " 제즈베"로 발음 해야한다.

            영어식 발음에 익숙한 사람들은 "체즈베'로 부르는 오류을 범한다.

            보통 구리로 만들어 자루가 길게 달린 주전자 형태로 뚜껑은 없다

            한 쪽 끝이 커피를 따르기 좋게 주둥이가 있으며 제즈베 주변은 망치로 두드려 수작업으로  문양을 넣는다.

*니케아(이즈닉)

터키의 서부에 위치,이스탄불에서 가깝다.

B.C 301년 알렉산더 대왕의 무장 리시마루쿠스에 의해 정복되어 그의 아내 이름을 따 니케아로 명명했다.

특히 니케아는 콘스탄 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주교들을 모아 제 1차 종교회의를 연곳이다.

1077년 셀주크 튀르크는 "니케아"를 수도로 삼았다가 아나톨리아의 "콘야(Konya)"로 수도를 옮겼다.

1204년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한때에는  비잔틴 정부는 이곳에 니케아 왕국을 수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1299년 오스만 제국을 세운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재위1324-1360)은 부루사(Brusa:터키 3대 도시 중의 하나)를 차지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1330년 니케어를 정복하여 이름을 '이즈닉'으로 개명하였다.

이즈닉은 16-17세기 타일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스탄불의 주요 모스크들은 이즈닉의 타일을 주로 사용했다.

18세기 오스만제국의 쇠퇴와 때를 같이하여 이즈닉의 백색 점토가 고갈되어 타일 생산의 거점은 규타하로 옮겨졌다.

현재 도기와 타일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호수 옆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남아 있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2-3시간,부루사(Brusa)에서  한시간거리다.

종교회의가 열렸던 아야 소파피아 교회가 있으며 비잔틴 시대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세번의 터키 여행중 두번째인  2010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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