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나의 고향 이야기-비석밭

Jay.B.Lee 2014. 11. 15. 07:54

 

 

 

집안 에서 보통  부르기를 "비석밭'이라 부르는 곳이다.

비석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어린 시절 이곳에 오면 이곳을 관리하던  산지기 집이 남아있었다.

고조할아버지께서 혼인후 제금 날때 쌀 한되 보리 한되와 됫박에 수저 두벌 꼿아 주었다던가

증조부代에  하루 두끼에 근검절약하며 살았고 그을음이 오르는  메케한 목화 기름등잔 밑에서 일을 하신 증조 할머니

목화밭을 일구시고 당시 금값과 맞먹던 인삼 농사를 지으시면서 부를 축적하여 할아버지에 이르러서는 천석꾼이 되었다.

장투가리를 숫갈로 긁고 물 한모금 마시며 허기를 달래며 밤에도 일하시며 근검절약으로 집안을 일으킨 증조 할머니는 집안의 전설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마름들과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받는 것을 배워온 아버지 말씀으로  정확히  쌀 1,800석이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경성 덕수궁 조경공사를 했다는 정원사를 불러 목화밭 일대를 정원을 꾸민다.

목화밭을 정원으로 만들어 부모님,조부모(내겐 증조부모 ,고조부모)들을 추억하고자 하셨다.

 공원안에는  무주에서 소달구지가 세번이나 부서져 나갈정도의 무거운 돌을 실어와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조상의 업적과 효행을 기리는  비슷한 것이다.

정원을 조성하며 연못을 대.중,소 세개나 만들었고  화단에 각종 꽃을 심었다.

어머님이  동서들(큰어머니,작은 어머니들)과 이곳 정원에서 찍은 사진만 보면 그땐 외지인들도  이곳에서 모임을 가질 정도였다.

큰 연못은 동네 처녀가 물에 빠져 죽은 후 큰아버지께서 메워버리고 말았다.

  

비석밭은 탱자나무울타리로 되어있어 접근이 어렵고 문은 잠겨있다.

잡초가 우거져 접근하기가 곤란하여 뒷길로 올라가 터진 울타리로 들어가 보았다.

작은 언덕길을 오르자 아버님이 신혼시절 지내시던 집이 눈아래보인다.

양철 지붕이 기와로 바뀌고 지붕을 덧내어 옛모습 그대로다.

1937-8년경 지은 집

왼편 솔밭이 우리가 비석밭이라 부르는 끝자락이다.

윗 산언덕으로 누가 오래전 작은 과수들을 심더니 지금은 크게 자랐다.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10여년전 이곳에 데려온적이 있다.

서울에서 자란 며느리는 처음으로  감을 따보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께서 생뚱맞은 장소에 기이한 형태의 돌을 쌓아 놓으셨다.

영모대(永慕臺)-조상을 ,특히 부모님을 그리워한다는 뜻이 강하다.

할아버지의 함자(李羲然)가 새겨져있다.

 

두번째 큰 연못

 

큰 비석이 있던 곳은 원래 담으로 둘러쌓여 있어 담이  무너진후 큰아버님께서 철책을 둘러 놓았다.

안의 작은 비석들은 송덕비로 지금의 감사패와 비슷하다

흉년이나 가뭄이 들었을시 소작료를 감면혹은 면제하여드린데 대해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후일 길에서 남의 발에 채여 욕이 될까봐 모아서 이곳에 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흉년이 들면 사랑채에 걸린 가마솥에 잡곡밥을 하여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사발씩 주어 구휼하셨다고 한다.

그들은 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다시 다른 산채를 넣어  죽을쑤어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엄명으로 어디서 오신 분인지 묻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중엔 양반 자손들도 있음을 배려해서였다고 한다.

흉년엔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도 먹어야 한다며 꺼끄러운 잡곡밥을 강제로 먹게하였다는데 아버님께서 나중에 부엌뒤에서 할머니가 주신 흰 쌀밥에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다 할아버지에게 들켜 아주  혼난적이 있다고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자랄때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고 여름엔 참외도 한개 이상 못먹게 하셨다는 할아버지.

그래도 흉년이 들면 할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집안 일가들과 동네 사람들 식솔수대로 양식을 보내곤 하셨다고 한다. 

 

비석이 있는 곳엔 잡목이 우거져 접근이 어렵다.

교장으로 은퇴한 사촌형이  관리에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잡목으로 뒤덥혔다.

82세의 연로한  사촌형에게 이제 무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14-5년전 아내와 몇번 이곳을 오며 톱과 사다리를 가지고와 잘라주고  했으나 역부족이다.

이제 이곳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떠나야 한다.

마침 면사무소에서 10년 계약조건으로 마을 휴식 공원으로 만들고자 예산까지 받아 사촌형과 접촉하였으나 사촌형은 고심끝에 거절했다고 한다.

황폐화된 정원.

 피난 시절 저 아래 큰 소나무중 하나를 끌어 안고 저공으로 날아오던 미국 전투기 굉음에  놀라 울던 내모습이 보인다.

 

 

 

 

수령조차 알 수없는 느티나무

 

왼편 축대위로 오른 편 느티나무와 쌍둥이 같은 나무가 있었다

웬일인지 휑하여 이상하더니 서울 나무장사에게 1,500만원을 받고 문중에서 팔았다고 한다.

느티나무 뿌리는 가구에서 소위" 용목"으로 불리우며 사용한다

나무의 뿌리 부분은 용의 형상을 한 것 처럼 문양을 이루어 옛 가구-반닫이 ,농문짝에  많이 사용했다.

 가구용이 아니라 옮겨 심느라 사간 모양이었다.

동네길을 내려가며 남이 담장들을 무너뜨려 배상하고 갔다 한다.

 

외과의사로 온집안의 가정의 역할을 했던 작고한 사촌형의 집이다.

(장티브스에 걸린 내가 살아있는 것도 형님 덕분이다)

누가 살고 있나 들어가자 마침 들어오시던 어느 할머니께서 들어 가잔다.

앞집 조카된다고 하였더니 마침 팥죽을 쑤었다며 같이 들자하여 네분의 할머니들과 계획에 없던 팥죽을 얻어 먹었다.

옛날 먹던 팥죽의 맛을 느껴본다.

모두 80대 중반으로 한국전쟁 무렵 시집을 오신 분들이다.

우리 어머니 택호인  '천안댁'을 기억하고들 계셨다.

이곳에 사시는 할머니는 얼마전 마흔에 결혼한 나의 5촌 조카( 堂姪)과  새댁인 조카 며느리(姪婦)를 데리고 다녀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촌 형님이 타계후 이젠 이집이 조카 소유인 셈이다.

빈집으로 두었으면 벌써 페허가 되었을 집이다.

나중에 팥죽을 대접해준 할머니는 아버지 8촌의 제수씨로 아주 남에게서 얻어먹은 아니라고 사촌형이 나중에 일러준다.

큰집  건너집인 이집엔 이층집 같은 창고가 있어 어릴 때 볼대마다 신기했던 집이다.

아버지께서는 "목수 할아바지'가 사시던 집이라고 일러주셨는데 한문을 잘 아셔서 집안의 대소사에 많은 일을 해주시던 집안 할아버지라고들었다.

내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셔서 뵌적은 없다.

자손이 살고 있나 들어가 보자 사시는 분은 자손이 아니라 한다.

나중에 사촌형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할아버지 처가의 조카뻘되는 분이라든가 남이 살고 있는 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