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나의 고향 이야기

Jay.B.Lee 2014. 11. 15. 07:43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곳이 호적에는 나의 출생지로 되어있다.

사실은 영동읍 계산동에서 출생한 것을 아버님이 이곳으로 출생신고를 하셔서 그리된 일이다.

400년전 합천에 사시던 할아버지께서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던 길 ,피곤하던차에 정자에 쉬고 계셨다 한다.

이곳에 사시던 최씨 할아버지께서 낮잠을 주무시다가 동구밖 정자 기둥에 용이 감겨 있는 꿈을 꾸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다.

 머슴을 시켜 보내보니  웬총각이 있어 데려다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과거를 보고 내려온 합천 할아버지를 정혼을 하여  무남독녀의 사위로 삼았다.

( 과거에 급제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려왕조시  인주이씨(소송이씨,경원이씨라고도 부름)는 " 이자겸(인주이씨)의 난"이후  몰락한 조상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일부에선 변성 (變姓)까지 할 정도로 삶은 고단했다.

유배를 당하고 나중에 어린 왕을 보호, 섭정했던  외할아버지(이자겸))의 공을 생각하여 사후 복권시켰지만 단지 역사의 한순간일 뿐이다.

지금은 인천이씨들은 합천,함양,장흥,파주 ,인천,영동,보은 등에 흩어져 살며 영동은 합천 할아버지의 이동으로 인천이씨의 일가를 이루었다.(옛 본관 대신 현재 지명인 인천으로 사용한다)

지금도 최씨 할아버지,할머니 묘소는 나의 할머니 산소부근에 자리하여 문중에서 일년에 한번 제사를 지낸다

 

고향에는 개천을 복개하고 아스팔트로 포장까지 하였다.

사진: 아버지에게 제금을 내준집

천석꾼인 할아버지의 6형제중 네째인 아버지께서는 19살(1934년경)에 장가들어 할아버지댁에 사시다 1935-6년경 제금난 집이  이집이다.

아버지가 19세,어머님이 16세에 혼인을 하셨다.

당시 시골에는 드문 양철집으로  모두 우물물을 길어다 먹던 시절 처음 마당에 펌프를 설치하여  내가 초등학교 시절 빈집에 왔을 때도 물이 나왔다.

아마 1960년대 중반이었나 시골에 가 살 이유도 없고 발갛게 녹쓸어가던 함석지붕의 집을 아버님께서 우리와 상의후 파시고 말았다.

아버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까 나이가 들어서야 짐작이 간다.

부엌과 안방과 건너방 그리고 대청에 해당되는 마루와 사랑방이 붙어 있다.

지금은 누가 사는지 반듯하게 지은 집에 개량 기와를 얹었고 처마를 길게 내었다. 

이 집에서 부모님이 사신 기간은 잠시, 아버지께서 영동에 근무하시면서 영동 읍내에 살았다.

영동읍 계산동 600번지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축사로 사용하던 이자리엔 행랑채 초가집이 한채 있었다.

부엌과 방하나인 집으로 황토뜨럭을 올라서면 댓돌위로  사람하나 겨우 기어들어갈만한 작은 문이 있는 초가집이 있었다.

방문을 열면 토굴같은 방너머 서쪽으로 작은 손바닥만한 창이 있었다.

60년대 매입후 부수고 축사를 만든 모양이다..

당시 " 광"이라 부르던 목재로 지은 창고에 들어서면 어린 내코에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 묘한 냄새가 좋아 자주 들어가보곤 했다.

창고 아래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었다.

 뿌연빛 물로 식수로는 부적합해  빨래물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던 곳.

공무원이 셨던 아버님이 큰 아버님과 부산으로 피난가 계신 시절,우리는 영동읍내에서 40리길을 걸어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 하자 아버님께서는 (당시35세) 어머니와 와 형제들 (형,누나 ,나)을 두고 할머니를 모시고 큰 집 식구들과 피난을 가셨다.

엄마등에 업힌 세살(2년반)였던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는데 기억이 없다.

사진 아래로 보이는 집이 둘째 작은 아버지 집이다.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받으신 유산을 팔아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일하신 적이 있다.

28세에 일찍 작고 하셨는데 사촌들 3남매를 두었다.

큰 사촌형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해군병원을 거쳐 충북의료원장을 하다  개업후 작고 하셨다.

둘째인 누님은 하와이에 살고 계신다.

셋째인 사촌형은 UN WHO에 근무후 은퇴하여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다.

세상이 좁아  필립핀 마닐라 Citicorp에서 연수 받을 때 마닐라에서 만났고 캐나다에 살 때는 형이 뉴욕에 근무해 맨하튼에서 형과 형수를  만난적이 있다.

피난 시절  고향에서 딱 세가지를 기억한다.

그중 한가지가 혼자서 걸어 사진의 집인 작은 집에 들엿을 때 마침 작은 어머니와 웬 여자아이가 점심으로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닭고기를 먹고 싶었으나 그냥 있기가 뭐해 어린 마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 여자 아이는 하와이에 살고 있어 캐나다 에서 귀국길에 만난  사촌 누님이다.

어린조카 (세살)입에 닭고기 한점  넣어 줄만한 어려운 피난 시절이다.

그 때의서운했던  심정을 이야기하면 동생은 '형, 내가 통닭 몇마리 사줄께 '하곤 했다.

나중에 쇠약해지신 작은 어머님이 대전으로, 수원으로 양노원을 옮기실 때마다 안사람과 찾아 뵈었다.

 돌아가시기전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닭고기 얘기를 듣지 못하고 90이 넘어 돌아가셨다.

 

 

무너져버릴것 같은 집.

 집안으로  촌수로는 멀다.

 무너져갈 것 같은 집지붕에  현대식 기와를 얹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아주머니뻘인 장녀가 했다고 한다.

일찍 서울로 올라간 이집 자손들로 장남은  토론토 영사로 근무했는데 근무당시는 서로가 몰랐다.

항열를 생각하면 혹시 궁금해 물어 서로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서로  예의상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해서 종친회에서 동생을 우연히 만나 알게된 사실이다.

큰 딸은 인사동에서 화랑을 했고 밑의 동생들은 외교관 ,성대 교수를 지냈다.

 동네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조금 남아있는 옛모습을 보며  이제 가슴이 저릴만한 시기가 지났음을 실감한다.

아버님이 많이 지나다셨음직한 길이다.

 

 

고향의 들과 산과 강을 내려다 보는 산이 비로봉이다.

큰집에서 보면 북쪽에 자리한 작은 할아버지를  남산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오래전 북쪽 마을에 살다 남쪽으로 이사후 습관적으로 남산으로 부른 모양이다.

 

 

 

 

옛부터 수리조합이 잘 발달되어 물이 마르지않던 문전 옥답이 저 너른 들판이다.

지금은 모두 밭으로 변해 특용작물을 심는 비닐 하우스가 가득찼다.

한때 댐 공사 계획이 있어 이곳 들판이 모두 물속에 잠길 뻔했다.

수백년된 보호수

감나무 과수원.

 조성한지 오래되지 않아  작은 감나무엔 따지 않은 작은 감들이 남아있다.

손에 닿아 따먹은 홍시가 무척이나 달다.

 

 

 

변약국으로 부르던 곳으로 오래동안 이자리를 지켜왔다.

경옥고를 만들어 유명한 곳이다.

남산 작은  할아버지집.

한옥이나 일본식집처럼 덧유리창을 내어 한옥의 단점을 보완한 집이다.

할아버지에게 한분밖에 없는 동생이셨다.

방학때 놀러가면 많은 당고모들로 시끌버끌했다

 나보다 나이가 두어살 어린 막내 당고모는 아무개 조카하며  열댓살 많은 조카들(형님들)이름을 마구부르며 재미있어 했다.

막내 당숙이 이집을 팔기까지 당고모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살아 15년전에만해도 고향을 찾으며 들려보던 곳이다.

이제 남의 손에 넘어간 집이다.

왼편으로 단감나무하나가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

여름방학에 놀러가  뒤안으로 가면 "보리똥"나무가 있어 뜹뜰하며 달콤한 열매를 따먹곤했다.

뒤담 넘어엔 과수원이 있었고 당숙이 뒷집 변약국에 땅을 매각한뒤엔 과수원 대신 변약국 주차장과 경옥고 공장이 들어섰다.

 

집도지(땅이 없는 분에게 집을 지어 살게하고 일년에 보통 벼 두가마 정도를 받는다)를 주었던 옆집에서 본 작은 할아버지집

재실(齋室)이 어떻게 되었나 들여다 보았다.

10월 초하루 문중에서 제를 지난다는 데 자손들이 전부떠나 9촌 아저씨마저 돌아가시면 누가 이어갈런지

기와를 갈아 무너지지않아 다행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옆집.

시골에 귀농 컨설턴트가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럽다.

오랫만에 본 아주까리.

옛날엔 집집마다 한두그루 심던 아주까리가 이제 보기 힘들다.

 

 

 

 

 

비봉산 오르는 제1등산로다

경사가 심한 산이다.

정상에 올라가 보려 했던 곳으로 힘이들어 전망대 정자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았다.

목표는 정상에서 아버지가 살았던 산하를 내려다 보는 것이었는데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보아야겠다. 

 

다시 온길을 되돌아 오자 옛 우리집이었던 파란 지붕을한 집이 보인다.

 

 

작은 아버지 집.

누가 살고 있나 들어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