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내 고향 이야기-큰 집

Jay.B.Lee 2014. 11. 17. 07:44

       

사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큰집(1881년 건축)

앞 건물이  사랑채고 뒤가 안채다.

원래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닌데다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를 하지않아 서서히 내려 앉고 있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사이에 담이 있고 문이 있어 안채는 외부인 출입이 어려웠다.

집은 대문과 세개의 쪽문이 있다.

텃밭으로 가는 문과 사랑채에서 대각선 방향에 한개 ,안채옆에 한개가 있어 동네 어느 방향으로든지 출입하기 좋게 달려있었다.

사랑채 나무가 쌓여 있는 곳은 작은 루가 있어 마루엔 아름답게 만든 난간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머무시던 남향집외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산세를 따라 북서향으로 지어져 특히 골짜기(동네 이름이 각골-柯谷里다)의 동향집은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웠다.

큰집에 우물이 없어 50여미터 떨어진 마을 공동무울에 서 길어다 먹어야 했는데  옛날 머슴이 있던 시절은 몰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방학이면 힘드실 큰어머니를 생각하여 익숙하지 않은 물지게를 지고 부엌에 있는 큰 독에 물을 가득채워놓는 일이 우리의 아침 일과였다.

나중에 지하수에 수도를 설치하여  그런 불편은 없어지고 말았다.

소유자인 사촌형의 이름인 ,이진환  가옥

 

증조모가 돌아 가시자(약 1936년경) 대문 밖에는 하얀 무명을 깔고 노제를 지낸후 상여가 떠났다

나보다 어머니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은 아내의 얘기다.

많은 자손을 두고 떠나신 증조모.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대고모 두분과 많은 손자 손녀를 두셨다.

할아버지에겐 아버지 형제 6형제와 작은 할아버지에겐 많은 당숙과 당숙모들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댁 당숙들은 한분만 제외하고 젊은 시절 장티브스,페결핵등으로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대신 당고모(5촌 고모)들은 모두 장수하셨다.

동네에 그러싸한 기와집을 화적떼들이 곧 잘 습격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벨기에제 장총과 권총을 구입하셨고 포수를 집에 머물게 하신 적도 있다고 한다.

총이 있단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화적에게 총쏘는 법을 시범보이시고 총을 주어버린  할아버지 .

칼든 화적떼 앞에서 안전을 택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사진의 사랑채 문엔 위협하는라 칼로 찍은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할아버지께서는 1910년 사립 조양(朝陽)학당 건립시 돈을 기부하셨는데 100년이 넘은 양산 초등학교가 되었다.

한때 할아버지는 일본시민지 시절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으로 가시고자 하였으나 증조모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주저앉으셨다고 한다

미국으로 가셨으면 우린 태어나지 못한 거다.

어머님과의 혼인은 없을 터이니까. 

 

뒤에서 본 사랑채.왼편으로 가마솥이 걸려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었다. 문지방이 높아 드나들기에 불편했다.

광과 안채 화장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옹기와 단지  

화적떼가 들이 닥쳐 불을 질러 소실된 집.

처음 기와집이 소실된 후 초가 지붕을 얹어 집을 지었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주하셨던 곳으로 남향이라 빛이 바르고 따스한 집이다.

왼편 창고가 되어버린 곳은 원래 Y자형 디딜 방아가 있던 곳으로 어릴때 방아위에 올라 방아찟는 시늉을 하며 놀던 곳이다.

 

나중에 큰아버님께서 쪽문을 올라 다니는 것이 불편하여 담을 허물고 문을 내셨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집. 나중에 스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이곳이 아래 사진을 찍은 장소다.

증조모의 상을 마치고 가족들이 찍은 기념  사진(1936년음력 11월)

증조모 기일이 11.13일로 3일장 ,5일장에 따라 11월 16일 아니면 18일로 추정한다)

지금은 없는 오른쪽 문도 보인다.

      

건을 쓰신분들은 상주인 작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이미 작고하셨다)의 맏손자인 백부

앞의 두 남자 어린이는 사촌형님들로 후일 교장,의사가 되었다.

두번째줄 우측이 새댁시절의 어머니

친형이 태어나기 전의 사진이다.

 

증조모의 장례 사진;

지금 87세로 살아계신 당고모의 말에 의하면 사진을 찍느라 잠시 멈추었다고 한다.

현재 보관하고 있는 1936년 음력 11월 증조모 장례 사진이다.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 상여꾼들은 12명 이상이고 상제중 두사람이 당나귀를 탔다.

 종조부와 백부로 짐작한다.

  장례행렬을 가다 멈추게 했다는데 당고모는 이 사진을 찍기위해서였다고 기억하셨다.

조문객들이 타고온 두대의 버스와 두대의 승용차도 보인다.

뒤로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다.

남쪽 담

안채.마루밑에 는 디딤돌이 있었다.

처마에 갈린 저 나무는 괴일 딸때 사용하던 장대인지

 

 

 

커다란 자두나무엔 지금도 수많은 자두가 달린다.

나무도 노쇠하고 비료도 주지않아 단맛이 거의 없다.

행랑채로 나가는 쪽문.

쪽문을 나가변 행랑채가 있었고 일꾼들이 살았다.

가을 추수후 이곳에 노적가리를 쌓아 두었다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행랑채에서 동네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셨다 한다.

왼편이 행랑채 방이고 오른편은 사랑채 화장실 자리였다.

안채

담장안의 돌배나무.  흉악할 정도로 맛없는 돌덩이 같이 작은 배들이  달렸다.

 

 

 

 

안채 화장실에 매달린 끈

할머니께서는 말년 실명하신채로  10여년을 사셨는데 수십년 살아오신 곳이라 눈 감고도 잘다니셨다.

저 손잡이 끈만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안채 뒤안.커다란 가죽 나무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께서는 종종 가죽나뭇이 적당히 커지면 얻어와 찹쌀풀을 발라 말린후 겨울이 오면 기름에 튀겨 안주와 밥반찬으로 상에 올랐다.

이 음식은 경상도와 충청도 아래지방에서만 먹던 음식처럼 보인다.

페허로 변해가는 큰 집을 보며 아픔도 안타까움도 사라져 버렷다.

세상의 이치요 삶의 순환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청주고보(5년제)를 1년 남기고 할머니 명으로 중퇴한 큰아버지.

장자로서 집안을 지켜간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신모양이다.

 560석의 재산을 받은 큰아버지께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토지개혁으로 인해 많은 토지를 잃으셨고 벌채  사업을 하신다고  사들인 트럭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휴지가 된  종이 한장의 인수증을 받고  전쟁에 징발되고 말았다. 

재산이란 벌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

또 다른 사업중에 믿고 맡겼던 돈을 먹고 튀는 사건도 발생한다.

큰 아버지 사업에 보증서신 아버님이 대신 빚을 갚느라 힘들어하셨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학자풍의 큰 아버님은 사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남아계시던 큰아버지,큰어머니 별세후 작은 할아버지댁의 당숙까지 과수원과 집마져 팔아 버리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랬다.

"각골 이씨 "망했다고 .

천석꾼의 자손들이 땅한평 없이 되었으면 망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 사는 세상에 어찌 시샘이 없을까.

그러나 자손들은 번성했고 다들 자기 몫을 하며 잘 살고 있다.

땅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땅은 없어졌을 지라도 조상들의 근검 절약하는  생활신조와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교훈에 힘입은 바 크다.

둘째인 작은 아버지 한분은  일본 와세다를 나오셨고 셋째 작은 아버지는 고향에서 약종상을 하셨다

영민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졸업후 집안 재산관리와 경성에서 학교다니는 동생들 뒷바라지 하는 동안  부기 학원을 다닌 것이 전부다.

밑의 두 작은 아버지들은 현재 경기고 전신인 제일 고보를 다니셨고 피하고 피하다 일본 유학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출정전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귀국후 연희전문과 서울 법전을 졸업하셨다.

아버님은 공무원으로 일하시다 은퇴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살아생전 아버님 교육을 못 시킨 것을 늘 후회하셨다고 하셨다.

모두 돌아가신 지금 다 지난일이요 운명이다.

우리 형제를 포함 27명의 사촌들은 부산,청주,서울 해외로 흩어져 살고 있다.

9명이 해외에 거주한다.

제일 위로는 82세의 사촌형에서 58살의 막내 사촌까지 있다.

아버지 형제 6형제를 거쳐 27명의 사촌 형제에게선 56명의 자녀와 조카들이 있다.

단 한명의 사촌형님만이 암으로 타계하였고 모두 건재하다.

 

 

할머니방  뒤안의 감나무

 

 

왼편이 큰집 모습이다.

아버지 집과 똑 같이 지은 집이 있던 작은 집 자리.

이 곳에 살던 사촌들은 제일 먼저 이민하여 시카고 공무원으로 자리잡은 사촌 누님 내외를 따라 6남매가 시카고에 거주한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사촌의 형의 딸은 하나 은행에서 설립한 명문고 서울 하나고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부부가 근무한다.

나의 종손녀(큰 조카 딸)은  하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나중에 알게된  영어 선생님-미국인이된 재당고모(7촌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다.

좁은 세상이다.

먼 집안이 작은 집을 사들여 멋진 양옥을 지었다.

그러나 이집에서 오래 사시지 못하고 아저씨와 형님 되는 분들이 10여년 사이로 타계한 것은 안된일이다.

아버지의 8촌 동생인 9촌 아저씨가 사시던 곳.

멋진 정원수와 항시 꽃이 많던 집이다.

영동 농고를 나와 면장을 하셔서 면장 아저씨라 부른다.

12.12사태시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대장과 고종사촌간이다.

아버님 살아생전  얘기로 어린 시절 정승화 대장이 놀러온적 있다고 한다.

아저씨는 9남매를 두셨는데 60대에 돌아가신 아주머니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재혼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 하셨다한다.

아저씨는 홀로 사시다 암으로 돌아가셨다.

서울 막내 아들집에 계시는 동안  방문 할때마다 앙상하신 몸으로 반가워하시던 아저씨.

지금은 막내 아들이 집터에  새집을 지어 놓고 주말에 가끔 9남매들이와서  놀다 가곤 한다고 한다.

 건설사에 다녔던 10촌 형님은 지금 71세다.

 

가곡리 입구에 있는 성당 공소.

 

작은 천주교 공소가 아담하다.

팥죽을 대접해주신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로 말씀에 따르면 10여리 떨어진 학산면(포도로 유명하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공소에서는한달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본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 공소 앞에 말라가고 있는 맨드라미.

고향길 나들이가 행복했다

설령 이번 나들이가  마지막이 되더라도나에겐  여름날 붉은 맨드라미 같은 빛나던 삶이 있었던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