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과 군시절 쓴 일기나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읽어 본뒤 모두 버렸다.
지난 세월에 말라 부스러질듯 가벼운 종이장처럼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마음의 부담을 덜어낸 셈이다.
그러나 혹시하며 입대관련 기록을 조금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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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28 군대 소집영장을 받고
1969.3.13 충북 옥천에 집결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옥천의 학교 교정에 집합 기차를 타고 천천히 쉬다 가다를 반복하며 밤중에 논산 연무대역에 도착, 수용연대까지 도보로 이동했다.
어두운 밤, 기간병의 인솔아래 각 막사로 이동.
3월 19 일 ,제 8989부대 (*29연대) 2중대 3소대 소속으로 배치받다.
군번 119420XX.
훈련소장으로는 논산 훈련소를 개혁하려 애를 많이 썼다는 *박남표 준장
연대장 대령 박영철
중대장 중위 최광영
소대장 소위,김수정,이경호 소위
내무반장 조정웅하사다.
전반기 교육 6주를 마치고 5월2일 후반기 교육을 받기위해 배치 받았다.
금마 제 6750부대 8중대 5소대 투입.
주특기 104 . LMG 기관총 사수로 탱크 공격용 로켓트 포까지 훈련을 받는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시 사용한 구식 무기다.
연대장 대령 박제현 ,중대장 중위 김원만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6월 2일 수용연대 배출대대에 도착했을 땐 연병장 담장 가까이 뽕나무에선 막 오디가 익기 시작했다.
6월 4일 101(경기 지역)보충대 ,103보충대(강원 지역) 전출자 명단이 불려지고 거의 모든 병력이 호명을 듣고 빠져나간 후 드디어 남은 몇몇은 33사단 특명을 받았다.
모두 어디인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기간병이 소사에 있는 예비사단이라고 일러주었다.
드디어 우린 영등포 구로동에 위치한 206 보충대를 향해 출발.
저녁 206 보충대에 도착하여 약삭빠른 몇몇은 돈을 주고 일찍 보충대를 빠져 나갔다.
어차피 쌀값을 아끼기 위해 모두 내보낸다는 정보를 들은 뒤라 서너시간을 버티자 다음날인 6월 6일에 사단에 도착 하라는 지시를 하고는 내보내 주었다.
6월 5일 오후 고향으로 향했다.
보충대에서 막 남한 산성(육군 교도소)에서 출소해 거의 얼이 빠져 음울한 얼굴들의 *선배 보충병들을 보며 우리는 하루밤도 그곳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6월 6일 상경하여 소사 사단 앞에서 인천행 시외버스에서 내리자 사단 위병소 정문이 멀리 아득했다.
입대전 이문열의 "논산"이란 다큐에 가까운 소설을 읽었으나 실제 훈련소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래는 훈련소가와 훈련소에서 사이비 <군가>로 행군시 참 많이도 불렀다.
<훈련소가 >
백제의 옛터전 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뼈가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호남무대 높이 우러러 있고
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곳이
오오 젊은 이의 자랑 *제2훈련소
<삐쩍 마른 갈비>
춘향이와 이도령이 남원에서 연애할 때 연애할 때
(꽉밟아 눌러 삐쩍 마른 갈비 꽉밟아 눌러 삐쩍 마른 갈비 갈비 갈비)-후렴
즐거웠던 이도령이 한양가서 소식없네 소식없네
신관삿도 변삿도가 수청들라 하였건만 하였건만
절개 굳은 춘향이가 수청들리 만무하네 만무하네
암행어사 출도소리 산촌 초목 벌벌 떠네 벌벌 떠네
춘향이와 이도령이 얼싸안고 춤을 추네 춤을 추네
<007가>
두드리면 목탁소리난다 율 브리너 대갈통
숲속에서 연애하다 들킨 신성일과 엄앵란
장총의 명사수는 존웨인이 아니고
달라스의 이름 높은 *오스 왈드다.
등치크다 자랑마라 *스티브 리브스야
등치작은 *고재봉이 도끼들고 찍었다.
지하의 고재봉아 서러워 마라
전라도의 김대두는 쌍낫으로 찍었다.
지하의 김대두야 서러워 마라
안동의 *신하사는 수류탄을 던졌다.
우리 옆집 여대생 밤만 되면 나간다 나간다
그 이름 <빠껄>이라네 짜아란 ~ 짜아란 ~(혹은 짜~잔)
*지금쯤은 할꺼다, 할꺼다
빤스벗고 할 꺼다.
눈알이 뱅뱅 돌거다. 짜아란~ 짜아란 ~
*29R(연대 :Regiment)
제 2훈련소에 처음으로 지은 현대식 훈련소 막사로 2층 건물에 유일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타 연대막사는 난방시설로 "페치카"를 사용한 반면 29연대는 중앙난방 시설이었다.
현대 막사라 훈련병들에겐 오히려 청소가 아주 고역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하도 실수를 많이해서 수시로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했다.
*박남표 장군(소장)(1923~)
1923년 생으로 항일투사 박지영의 아들로 중국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군 사관학교 제2기 동기다.
육사 제 2기는 263명이 입교하여 196명이 임관하였으며 이중 79명이 별을 달았다.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최전방 연대장,사단장을 거쳐 1968-1970년까지 논산 제2훈련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 소장으로 전역했다.
현재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며 시애틀의 "큰어른"으로 한인회를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선배 보충병:
군대서 사고내지 범죄를 일으킨 사병들은 군 교도소에서 복무 기간을 마친후 군대에 돌아와 잔여 기간을 군에서 마쳐야 했다.
군 교도소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을 그들은 대부분 건강해 보이지 않았고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어떤 희망도 기대감도 포기한채 신병인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은 우리에게 공포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후에 출소병들이 기존 병사들과의 부조화,비효율적인 제도임을 들어 잔여기간 복무대신에 불명예 제대시키는 것으로 제도가 변경되었다.
*오스왈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용의자
*스티브 리브스(Steve Reeves:1926-2000)
1940년대 활약한 최초의 보디빌더.1948년 Mr.World 우승 ,1949년 MrWorld우승, 1950년Mr. Universe 우승
그는 영화계의 Call을 받아 선수 생활을 접고 몇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헤라클레스(1958),폼페이최후의 날(1959)등이 있다.
*왜 007가로 제목을 부르는지 알 수 없다.
60년대는 이안 후레밍의 007소설과 영화가 휩쓸던 시대다.
6.25당시 한국에 와있던 터키군에 의해 전해진 노래 "위스크달라".(이스탄불 해협 건너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구역으로 우리나라 동대문구처럼 하나의 區를 이른다)
그 곡에 맞추어 행군시 많이 불렀는데 가사는 유치하고 노골적이고 퇴폐적이나 사회나 학교와 너무 다른 군대 훈련소의 괴리감과 허무감에 모두 열심히 불렀다.
아니 불러야 했다.
소리가 작으면 얼차려를 받았다.
*고재봉 살인사건:
63.10.19일 3군단 소속 1109야전포대 소속 고재봉 상병(27)은 부대장 박모 중령의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사택에서 군화를 집어들고 나오다 식모에게 들켜 도끼로 살해 위협후 절도및 살인 미수혐의으로 남한 산성(육군 교도소)에서 7개월 복무후 출소한다.
그는 "남한 산성"의 혹독한 수감생활을 통해 자기에게 누명을 씌운 박모중령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인제군 남면 어론리 사택을 찾아가 박중령은 이미 타부대로 전출된 사실을 모른채 손도끼로 그 사택에 살고 있던 엉뚱한 이득주 중령과 부인 김재옥 ,자녀 둘과 식모를 무참히 살해했다.
한번에 5명이 무참히 잔인하게 살해당한 이 사건은 당시 순수한 국민들에게 너무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후 검거에 현상금을 거는등 , 사건 발생 24일만에 서울 종로 5가에서 땅콩 장수의 제보에 따라 검거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로 전도 받고 사건 발생후 5개월인 1964.3월 10일 찬송가를 부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나중에 내가 근무하던 소사 33사단내 사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얘길 전해들었다.
*김대두(1949.10.11-76.12.28)
전남 영암군 출신으로 대한 민국 최초 살인마로 사이l코 페스의 전형.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농사꾼으로 일했다.
71년 징병검사를 불합격할정도로 허약했다.
폭행 전과가 2회로 75.7.18일 만기 출소후 주위,특히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겨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알리고 싶다"며 출소후 한달만에 범행을 시작했다.
75.8.13부터 10.7일 까지 55일동안 17명을 살해 ,3명 중상,1명 미수의 범죄를 저질렀다
지역으로는 전남 광산군,무안군,경기 평택,서울등으로 이동하며 범죄를 저질렀으며
특히 일주일동안 11명을 살해한 건 기록적이다.
75.12월 살인후 기념품으로 가져온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겨 ,피묻은 바지를 본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살인 흉기로 망치,돌,칼 을 사용했으며 3개월 영아부터 엄마까지 살해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대부분 시체가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여서 "김대두 악마"라고 불렀다.
76.12월 사형이 집행 되었다.
*신하사:
1968년 5월 18일 안동의 극장 입구에 신영식 하사는 만취 상태로 수류탄을 2개 던져 5명이 죽고 4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애인의 변심에 분풀이로 한 행동으로 진술하였으나 연인은 그런일은 없었으며 남의 말을 잘못 들은 오해라고 했다.
1969년 2월 육균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참회의 뜻으로 사후 안구를기증했다.
*제 1훈련소:
제주도 모슬포 항 근처에 있으며 원래 일본군 지휘부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해병대부대로 사용 중이며 6.25전쟁시 제 1훈련소에서 단기 훈련을 마친후 즉시 전선에 투입 되었다.
*제 2훈련소:
논산 연무대 에 자리한 훈련소로 처음엔 훈련소 훈련병들에게 면회가 주어졋다.
교통편도 좋지 않은 시절 모든 부모들이 여관에 묵어가며 음식점,여관에 부탁하여 닭을 잡고 아들들을 위해 한입이라도 잘먹이려 애들을 썼다.
주말마다 얼마나 많은 돈들이 풀렸는지 논산을 "돈산"이라고 불렀다.
논산 훈련소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개혁은 면회제도의 폐지였다.
각종 부정을 막고 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또 훈련병들의 과식으로 건강문제가 발생하여 훈련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등 부작용을 막자는 요지였다.
또 부수적으로 면회 오는 사람이 없는 훈병들과 그렇지 않은 훈련병들의 괴리감을 없앨 수 있었다.
면회제도가 폐지되자 각종 관련일거리는 없어지고 논산은 서서히 활기를 잃어 버린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입대하기전 제도가 그나마 폐지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유착되어온 관련 사업들을 한꺼번에 뿌리 뽑기란 쉽지 않았다.
군데 PX에서 파는 물건들이란 멀쩡한 큰 회사 제품들이 있음에도 논산에서 만드는 "성일 (星一)"제품사의 빵,과자,사이다등을 먹어야 했다.
정말이지 설탕하나 들어가지 않은 제품들로, 동물 사료수준이었다고 보면 맞는다.
우리가 훈련을 마친뒤1,2년 뒤인가 부터 훈련병들은 PX에서 제대로 만든 과자,스낵류-예를 들어 오리온,크라운 제과에서 나온 제품들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나중에 논산 훈련소에서 시설 부족으로 장정들을 전원 수용 시킬수 없자 각도의 예비사단에서도 훈련을 실시했다.
그들은 논산 훈련소와 다른 군번을 사용하여 총기 번호처럼 복잡하여 놀리느라 "총번"이라 불렀다.
후임으로 들어오는 신병들에게 문의 결과 훈련 내용과 시설들은 오랜 전통이 있는 논산 훈련소만 못했다.
예비 사단 훈련소에서 논산 훈련소에는 절대 없었던 훈련병 구타 가 존재한다는 얘기들을 들으며 분노하던 시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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