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갑자기 생각 난 知人이 있다.
몇년전 차를 멈춰 한번 찾아갔던 그의 집을 기억못해 부근이라는 생각되는 면사무소에 들려 오래전 금계를 키우고 있던 부부 소식을 묻자 여직원이 그분들 서울로 이사갔다고 했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던 시절 알게된 분으로 서울 미국계은행에 근무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낙향 ,관상조인 금계를 키우고 있다고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참후다.
10여년전 아내와 설악산을 들려 강릉으로 가며 그와 연락이 닿아 그의 집을 찾았었다.
일찌기 시골에 아담한 전원 주택을 짓고 집옆에는 색갈이 화려한 금계(金鷄)를 키우는 계사(鷄舍)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애완견까지 가족의 시골 생활을은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도시의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없이 동물을 키우며 가끔 방 한 칸을 가득채운 드럼을 치며 소일하고 있었다.
문제는 관상조인 금계가 생각처럼 잘 팔리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남미의 삼바 축제의 화려한 색갈처럼 열대우림의 앵무새의 깃털을 한 화려한 색조의 금계가 우리나라에선 가정용 애완 동물로 조금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급기야 늘어나는 금계를 감당 할수 없어 그 '작은 닭'을 오골계처럼 식용으로 고아서 포장 판매까지 해야 했다.
작년 그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우연히 발견한 전화 번호였다.
혹시했으나 옛 전화 번호 그대로 였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에는 서울서 3일, 시골서 3-4일씩 보내고 있어 면사무소 직원이 제대로 일러주었으면 지나던 길에 다시 만날수 있었다.
그 후 전화로 두어번 통화하고 그에게서 한번 만나자고 연락온 것이 지난해 늦가을 마침 내가 해외 여행중이었다.
그에게 다시 연락 온것은 얼마전이다.
강남에 약속장소인 빌딩 로비에서 그를 만난 순간 잠시 착각을 했다.
그가 원래 다리를 조금 절었었던가하고.
다리외에 팔까지 불편한 모습을 제외하곤 얼굴에 세월이 간 흔적이 조금 비쳤을 뿐 여전히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커피샵에 앉아 그간 소식을 들었다.
아들은 결혼하고 딸은 대학을 졸업했다고.
의아해 하는 나의 표정에서 모르고 있었냐고 하며 뇌경색이 와서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그가 영원히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설명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는 것도 몸이 움직여주줘야지 죽을 수도 없는 몸이라는 걸 알고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재활 치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재활치료를 해봐야 걷지 못한다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서울 H병원에서 자기이름을 잘 기억한다고 한다.
강릉으로 옮겨서도 미친듯이 운동을 했으며 자기 보다 상태가 좋은데도 절망감에 빠져있는 환우들에게 희망 전도사처럼 포기하지 말라고 열심히 설득하고 다니곤 했다고 했다.
마침 그가 걷게 되었을 때(지금은 운전도 한다)의사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한다.
다른 병원에서도 그의 MRI 사진을 보곤 분명 휠체어에 앉아야 할 사람이 걸어다닌는 걸 보고 기적같은 일이라고 한다.
그가 걷기 시작했을 때 처음 한일은 옛 직장을 찾아가 본 일이라고 했다.
스스로 부끄러워 세상에서 은둔해 버리는 것과 달리 그는 세상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고 한다.
동정어린 눈도 잠시 세상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한 것 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되려 편해졌다고 한다.
그는 지금 불편한 몸을 끌고 사람들을 만나고 Head Hunter 컨설턴트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신체적 장애가 일을 하는데 큰 불편은 없기 때문이다.
정말 불사신처럼 다시 일어난 그의 의지력은 인간 승리를 보는 것 만 같았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수년간 노력한 부인의 눈물겨운 헌신은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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