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외손자 돌잔치

Jay.B.Lee 2013. 3. 13. 06:02

 

사진: 외손자 .신통하게 두건을 벗으려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직도 수시로 침을 흘린다.

외손자 돌이다.

몇개월전엔 친지들,친구들,회사 직원들 불러 크게 해야한다더니  결국 민폐고 고생은  손자 몫이라 돌날이 다가오자  친손자때처럼 가족들만 모여 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돌잔치를 받는 외손자는 행복한 세대다.

 40년대말 태어난 나는 돌사진이 없어도  돌잔치를 했는지 부모님께 물어 본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세대다.

딸은 어린 시절 성장기를 잘 정리해 놓은  앨범을 보며 오빠는 돌사진이  있는데 왜 자기는 돌사진이 없냐고 종종 물었다

사진을 찍지놓지  않아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가 더 큰다음에야 돌잔치를 할 경황이 없어 못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79년 Oil Shock으로 기름값이 폭등하고 100프로에 가까운 급격한 원화 평가 절하(1달러가 200원대에서 400원대로)로  우리나라 경제가 휘청했던 시기다.

당시 12,000여명의 직원은 8,000명 선으로 감원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직원들은 수시 감원에,전출에 불안에 떨었고 일부는 해외 건설사로 이직해 버렸다. 

회사에서는 급여 인상은 커녕 제때 지급도 못받아 일주일 내지 열흘 지연 되기 일 수라 상여금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부분 직원들은 주머니에는 토큰만 달랑 몇개 지니고 다니던 시기였다.

80년 아버님이 돌아 가셨고 회사에서는 주거래 은행으로 부터 운전 자금 한도를 받아야 그나마 자금차입을 해 부도를 막아야하는  시점에 딸의 돌이 겹쳤다.

집에 와서는 회사일을 붙들고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쩌다 보니 그냥 넘기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든 돌잔치를 했어야했다는 생각이 든다.

돌잔치를 차려주지 못했을 만큼 마음과 주머니가 모두가 가난해 지금 내가 생각해도 애잔해지는  시절이었다.

이제는 아무 걱정없이 자라날 외손자에겐 축복의 날이다. 

 

외손자 초음파 사진 부터 출산 사진,생후 며칠후,50일기념 100일 정도 .외손자의 살아온 기록이다.

 

 

친손자의 돌 잔치상은 며느리의 취향에 맞추어 떡만 우리 것이지 분위기가 자기 좋아 하는 색갈로  서구식으로 꾸몄었다.

현수막도 손자의 미국명을 사용했었다.

외손자 돌상은 우리 옛 풍습에 멋과 기교를 부려 잔치상이 우아하며 아기자기하다.

현수막은 이벤트 회사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조화에 초. 과일엔 모형 과일과 실제 과일이 섞였다.

딸은 편한 것을 좋아해 이벤트 회사에서 해주는 그대로 했다.

 많아 보이라고  기울여 놓은 떡

 

케익과 떡,벼루와 먹을 처음 본 다섯살된 손자는 그것이 뭐에 쓰는 물건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처음엔 초코렛이나 양갱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외할머니와 함께

 

돌잔치의 하이라이트 -행사 사회자가 돌잡이물건을 설명한다.

전에는 연필,실,돈등이 있었고 손자때는 망치도 있었다,

실과 마이크(연예인이 아니라 지도자라한다) 청진기,공(스포츠맨),돈이 등장했다.

돈은 친지들이 놓이야하고 만원짜리는 손자 몫으로 미리 들어가고 5만원짜리 대표 선수만 남았다.

알롱 달롱한게 청진기밖에 없어 청진기를 잡았다.

손자가  공을 잡아 운동 선수되길 바라는 사위였는데.

친손자 돌잔치때는 머리에 쓴 복건이 귀찮다고 휘딱 벗어 버렸는데 외손자는 신통 방통하게 얌전히 쓰고 있다.

허리에는 십장생을 수 놓은 돌띠를 둘렀고 쾌자를 입었다.

손가락에 낀 돌반지.

 금팔찌는 잘 않보인다.

 

 

외손자에게는 외사촌이 되는 친손자와 함께.

그저  사람이 많아 신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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