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충만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2번지
공세리 성당을 뒤로 하고 진안 마니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수당 이남규의사의 고택을 찾기로 했다.
고택입구에 새로 지은 이남규 기념관이 있다. 사무실에서 여직원이 나와 이곳을 방문한 다른 몇 사람과 우리 부부를 위해 기념관을 열어 주었다.
이남규(1855-1907) 선생은 조선말기 고종 31년 (1894년)일본 공사가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오자 부당함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명성왕후 시해사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왔다.
1906년 홍주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었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연행,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과 함게 순국하였고 함께간 가마꾼도 죽었다.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는 고귀한 정신을 남긴 이남규 선생은 한산이 본관이다.
이 남규 선생은 고문가요 학자로서 올곧고 바른 절조를 이어온 당대 명문의 집안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대를 이어 왔으며 수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하였다고 이남규 선생의 증손이며 현재 관장인 이 문원 선생(전 독립 기념관장.중앙대 교수)의 설명이다.
모처럼 오셧는데 차를 마시고 가라며 우리 부부에게 커피를 권했다.
기념관을 돌아보며 4대에 걸친 애국자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남규 선생과 아들 충구는 순국하였고 이만규 선생의 손자 "승복'은 상해,연해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승복의 아들" 장원"은 1950년 해병대 장교로 전투중 사망했다.
이문원관장은 의사 이남규로 부르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이준열사 처럼 열사가 낫지 윤봉길 의사처럼 '의사"로 표현, 뭐 폭탄이나 들고 항거하신 분으로 보여지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기념관에는이남규 선생 집안의 유품들이 잘 보관 되어 있는데 전쟁중에도 조상들의 유품을 가지고 다니며 간직해온 후손들의 노력 덕분이다.
상아로 된 홀.
본 고택은 이남규 선생의 생가로 이구의 부인이 1637년 지은 것을 헌종 12년(1846년)에 다시 지었다 한다.
안채는 "ㄷ" 자 형태로 마당 공간은 안주인들이 활동하기에 넓다.
남쪽 양끝으로 서로 마주보며 부엌이 달렸는데 거의 동일한 규모의 부엌으로 부억위는 다락이 된다.
대청이 넓다.
안채
사랑채 "평원정"전경.
앞들을 넘어 산이요 뒤도 산이어서 포근하게 자리한 이남규 선생 고택
안채와 사랑채 사이엔 쪽문이 있어 출입을 따로 할수 있게 되어 있다.
앞산을 바라다 보면 보이는 효부 신씨지문(申氏之門).왼편으로 200여미터 지점에 저수지 제방이 있다.
저수지 제방이 오른쪽 아래 지점에 계획되어 고택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시절 현위치에 건설하는 것으로 타협,고택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고 이문원 관장이 설명해 주었다.
'국내 여행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명희의 "혼불'의 숨결을 찾아서 (1) (0) | 2012.04.30 |
---|---|
마이산 탑사 (0) | 2012.04.30 |
공세리 성당 을 찾아서 (0) | 2012.04.29 |
선정릉(宣靖陵)을 찾아서 (0) | 2012.04.25 |
사진전 보러가던 어느날 (0) | 2012.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