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명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마모되지 않은 모국어 몇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수 있다면...."-최명희
10권으로 된 혼불을 읽고 난뒤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 오래 남아 문학관이 생겼다는 소식에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문학관과 생가터와 무덤 그리고 "혼불"의 매안 마을의 무대가 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일대를 답사하기로 했다.
다큐먼타리를 보며 국어 사전을 시집읽듯 했다는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말 선택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혼신을 기우려 한자 한자 원고지를 채워간 인고의 시간을 짐작해본다.
같은 년대에 태어나 비록 51세로 단명했음에도 최명희씨로 인해 동시대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조상의 뿌리를 찾는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와서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와세다 대학을 나온 아버님님이 돌아가신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 전주에서 2년제 대학 야간부를 다닌후 전북대 3학년에 편입했다는 개인 약력 기록이다.
1981년 창간 기념 장편 소설 공모전(당시 상금액 2천만원) 에 "혼불"로 당선,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성보 아파트에서 "성보암(서재)"보살이란 별명을 들으며 글에 전념했다.
199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아름다운 세상 ,잘살고 간다"고 유언을 남기고 영면했다 .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로 남겼으나 최명희씨는 말로서 남겼다.
<인간 세상이 한 조각 꿈인 것은 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대로 보내다니 이 슬픔을 어찌 가눌 수 있으리 늙은이 어린 아해 모두 나와 언덕에 서 가는 이 영결할 제 구슬픈 상여 소리 서러운 울음 소리 눈물 바다를 이루네-최명희 지음 "혼불"에서>
이 시대의 대 작가를 잃는 마음을 모두 그런 심정으로 최명희씨를 떠나 보냈으리라.
사진:전주 최명희 문학관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 길 29번지(풍남동3가67-5번지 )
063-620-6178/063-620-6788
<최명희 문학관은 2006년 4월 전주에 들어선 최초의 문학관으로 "작가 최명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전시관은 녹록치 않은 작가의 삶과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의 혼이 담긴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엽서들,생전 인터뷰와 문학 강연을 담은 동영상과 여러작품 중에서 추려낸 글이 새겨진 각종 페널을 만날수 있다.>-문학관 안내서에서
<魂불>
아름다운 모국어로 한민족의 전통문화와 민속,생활의 속성들을 치밀하고 폭 넓게 복원해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표현했다-안내서에서
문학관은 편하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앞쪽 지하실엔 세미나 실이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8분 50초짜리 최명희에 대한 다큐먼타리가 방영 된다.
최명희의 여동생인 최은영씨가 직접 쓰고 구성하여 제작한 것으로 작가인 최명희와 언니인 최명희를 가장 가깝게 지내온터라 짧은 시간속에서도 언니의 작가적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았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언제나 살아 있듯 작가가 전하는 그 하나 하나의 말에는 진실이 숨어 있고 정열이 숨어 있다.
"말의 씨를 어떻게 뿌리느냐가 제일 문제였고 그로 인해 매혹과 고통의 삶을 살았다"고 육성으로 전하는 작가의 진솔한 고백에 전율과 감동을 함께 할수 있다.
고교 작문으로 교과서에 실린 작품"우체부"
상금 이천만원으로 당시 그 상금은 강남의 아파트를 살수 있는 돈이었다.
지금은 재건축 되어 변했지만 작가는 그 상금으로 성보아파트를 구입한후 글쓰기에 전념한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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