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부부 둘만이 살아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는 친구

Jay.B.Lee 2012. 4. 25. 05:43

 

 

 

 

몇년전 고교 동창으로   은퇴한  K 교장 부부를  우연히 만난것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부근  야산 등산로에서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내려 오는 길에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마시고 온적이 있다.

반년전인가  K교장이 우리 아파트 건너동으로 이사왔다는 얘기는 동창 결혼식에서 만나  함께 집에 오며 들었다.

우리가 K 교장 부부를 집에 초대하려 해도 토요일,일요일밖에 시간이 없다는 K교장이고 우린 우리대로  주말엔  손자나 사위가 집에 방문하고 결혼 식장에 다녀오는 일도 있고 일요일엔 교회를 다녀오고 해서 도무지  짬이 나질 않았다.

우리가 시간이 나면 K 교장이 사정이 있고.

주일 예배를 보고 아내가 외손자 돌봐주러 딸집에 간날  일요일 저녁 마침 K 교장과 연락이 되어  혼자서 집에 찾아 왔다.

전에 봤을 때 야윈 모습보다 얼굴엔 살이 좀 오르고 좋아져 있었다.

K 교장은 수년간 치매인 어머니를 모시느라 피골이 상접 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당뇨까지 있어서다

 가까이 사는 여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아마 혼자 사는 모양이다) 여동생이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자기와 아내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여동생의 집에 가서 돌봐드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쉰다는 것이다.

왜 노인 요양원에 입원시키지 않냐고 묻자 첫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여동생에게 절대로 어머니를 요양소에 넣지 말라고 유언을 해 여동생이 말리고  또 현실적으로 그럴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소문처럼  그는 사업하던 동생에게 담보조로 해준 보증으로 인해 집이 날아갔다고  했다.

또 아들은 아들대로 최근 작은 사업을 하다 전부 날렸다고 했다.

햇볕 좋은 날 야외 결혼을 치루었던 그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K 교장은  자기의 지난 삶을 담담히 얘기했다

시골 말단 공무원의 장남으로 태어나 나와 함께 고교에서 나와 같은 반인 이과반을 다녔으나 학비 때문에 엉뚱하게  등록금이 저렴한  교대를 나왔다. 

서울 학교에 근무시  시골의 아버지가 점찍어 놓은  시골 처녀와 맞선을 보러 고향에 내려가 의자가 10여개 밖에 되지 않는 시골 읍내 다방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부모들까지 한꺼번에 나와 얘기하라고 하고   둘만 남겨 놓고 나가던 그시절의 맞선 풍습이다.

 추운 겨울날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왔던 아내를 기억하는 K 교장은 아련한 젊은 날의 추억속으로 빠져드는 듯 했다.

서울로 불러서는  창덕궁을 함께 걸었고 부모님을 모실수 있냐는 다짐을 받고  그 해 가을 혼례를 올렸다 했다.

시골이지만 마땅히 땅도 없고 농사라곤 모르는  부친은  은퇴후 서울서 아들집에 얹혀 사시게 되었고 아내는 시할머니,시부모,시동생,시누이까지 한집에 살게 되었다 한다.

층층시하에 시동생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다는 그의 아내 .

 요즈음 같아서는 그런 조건 보고 결혼 할 여자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한결같이 시할머니,시부모를 잘 모셨다 한다. 

전형적인 효부다.

근래 머리가 아팠던 것은  최근까지 계속 이어온 재판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은 또 항소 할것이라고 .

난 처음 듣는 얘기라 모르고 있었냐며  대부분 은퇴한 교장들을 포함  100여명이 수뢰 혐의로  기소를 당했다고 했다.

유죄로 판결될 경우  연금에 미치는 영향때문에  현역 교장들은 걱정이 많다고 한다.

동생 사업 보증으로 집을 잃은 뒤 처음은 월세를 살다가 지금  겨우  작은 평수로 전세로  얻어왔다며 이젠 체념한 표정이다.

단지 어머니가 문제인데 한동안 포악해져 물건들을 던지다 지금은 마구 소리를  지르신다고 .

80대 후반으로 아직 식사를 잘하신다는  친구의 어머니다.

(얘기를 들으며 죄송하지만 식사라도 잘못하셨으면 바랬다)

그동안 치매인 어머니까지 보살피게 하는 것이 너무 아내에게  미안해 집에 쉬라하고  이젠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와 국가에서 보내주는 간병인이 보살핀다고 한다.

치매로 인해 친구를  보고 아저씨,여보 하며 소리까지 지르는  어머니를 보는 고통은 안보아도  지옥이다.

가끔은 어머니와 아내를 보고 "우리 셋이 같이 죽자"는 소리가 종종 나올 정도로 한계를 느낀다고 했다.

이젠 어머니도 잊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둘이서 시골에 가서 (땅도 보아 두었다고 ) 전세금으로  작은 집 짓고 평생 둘이서 살지 못한 한을 풀어주고 싶다고 했다.

 연금으로 생활은 되지 않겠냐며.

그러나 착한 심성을 가진 그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엔  절대로 시골로 떠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왜 착한 친구 부부에게  복을 주시지 않고 마치 "욥"에게 처럼 끊임없는 시련만을  주실까 의문이 든다.

그만큼 시련을 주었으면 복을 줄 때도 되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다.

남에게 하기 쉽지 않은 얘기를 다 털어 놓은 친구.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할데 없어 나에게 쏟고간 친구에게 그 시간만이라도 조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돌아간뒤 시계를 보니 밤 12시 반이 훌쩍 넘었다.

 

집 베란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앞동산.

2년전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을 많이 베어내어 나뭇잎이 무성해지기까지  이젠 듬성 듬성하다.

 봄이 되면 꽃구경을 하러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을만큼 각종 꽃이 어우러져 핀다.

진달래,목련,산수유,개나리,철쭉,살구꽃,복사꽃,벚꽃 ,홍매화,라이락,아기사과꽃,앵두,감꽃,수국등이 쉴사이 없이 피어난다.

 

 겨울 동안 메마른 동산에 봄이 오면 새옷을 입는다.

오래되고 낡아 떠나고 싶은 아파트면서 봄만은 좋은 동네라는 아내 .

 몇년뒤엔 재건축으로 흔적없이 사라질 풍경이어서 담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