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내 삶의 유년의 흔적을 찾아서-영동(충북)에서

Jay.B.Lee 2012. 5. 19. 07:15

내가 태어난 곳은 원래 충북 영동으로 계산동 600번지(?)로 기억한다.

호적에는 아버님께서  출생지를 원적지인 충북 양산면 가곡리(각골)로 올려 놓으셨다 .

아내가 딸과 손자 봐주느라 왔다갔다 하며 집에 없는 날, 집에서 가까운 동서울 터미날로 가기위해 마을 버스를 타러 나갔다.

마침 버스가 금방 도착해 동서울 버스 터미날에 영동행 버스 출발전 10분전 도착하여 참으로 오랫만에 고향을 찾는 날 일이 순조롭게 잘풀리는 기분이었다. 

좌석은 우등인  고속버스가 오창에 잠시 정차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벗어나더니 옥천에서도 버스 터미날에 잠시 멈췄다

 그후엔 고속도로 대신 눈에 익은 옥천-영동간 국도를 달려 영동에 도착, 영동 시장앞에 내려준다. 

승객은 단 4명뿐이었다.

 

승용차로  우회도로로  지나쳐  다니던 영동읍이다.

차 없이 온날  영동거리를  모두 걸어보며 지난날의 추억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어린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이제는 떠날때다.

 영동 시장앞에서 내려 옛 우리집 가는 길 입구에서 발견한 제일의원.

일본식 주택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대문은 닫혀있고 간판은 있어 옆의 약국에 들어가 문의한 결과 의사 선생님이 연로하셔서 진료는 하지 않는다는 친절한 젊은 약사의 말이다.

기억이 맞다면 60년전(1952년) 내가 항아리 손님을 앓았을 때  턱의 커다란 혹을 수술해준 의원이다.

붕대를 턱에 칭칭 감은 채 아버지 등에 업혀 집에 오며 무슨일이냐고 묻던 동네 친구에게 수술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등은 포근했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넓은 등이었다. 

병원집에 누가 살고 있나 궁금하여 초인종을 누르자 할머니가 나와 철제문을 연다.

 지금 할아버지인 박원장이 편찮으셔서 돌봐주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연세가 어떻게 되셨냐고 묻자 90여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나를 수술해준  바로 그 선생님이시다.

한 장소에서  새 건물도 짓지 않고 옮기지도 않고 50년이상 한자리에서 진료를 해오신 분이 기이하게 보인다.

내가 수술을 받던 시절엔  새파란 청년의사 선생님이신 셈이었다.

턱밑의 수술 자국은 성장하며 턱밑에서 지금은 목 밑으로 옮겨져 있다. 

 

담쟁이 사이로 벽에 쓰여진 "제일의원"이 보이고 오래전에 달았을 법한 등이 이채롭다.

욕심없이 사셔서 장수한 것일까.부디 건강을 회복하시기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요리 연구가 하선정씨가 잠시 운영하던 집 근처 방앗간이다.

하선정씨에게는 누나와 동년배인 딸 희지씨가 있어 희지누나 라 부르던 기억이 있다.

하선정씨는 나중 수도 요리학원을 차렸고 하선정 액젓으로 이름을 날렸다.

원래 동생인 하숙정씨가 정통적으로 일본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온 것으로 안다.

어느날 잡지에서 본 요리 연구가 "박희지"씨 사진에  하선정씨의 딸임을 밝혀 성씨가 박씨임을 처음 알았다.

 가게에 앉아 있던 방앗간 주인은 이건물이 지은지  100년이 넘은 것으로 안다며 원소유주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다.

방앗간 대각선 방향으로 의료기 전문점이던 자리엔 술도가(막걸리 공장) 정문이  있었다.

지나다보면 막걸리 냄새가 났고  막걸리 '찌게미'를 얻어다 사카린을 타서 먹던 추억이 있다.

옛 우리집 처마의 제비집:어린 시절에도 집에 늘 제비가 오곤 했다.지금도 제비가 오는지 아니면 빈집인지. 

6.25당시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 앞집,뒷집 폭격으로 다무너졌을 때 우리집만 온전했다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지금은 앞집,뒷집도 새로  건물이 들어섰건만 대문과 대문에 붙었던 방은 사라지고 마늘을 심던 텃밭엔 지금은 고물상 하치장이 되어버려 쓰레기 같은 물건만 가득했다.

누나와 함께 풀방틀에 빵을 구워 먹던 부엌이며 (지금은 왜 그렇게 작게 보이는지) 안방 앞마루밑은  내 강아지 "바둑이"가 땅을 헤집고 파던 곳이다.

나중에 마늘을 심던 앞마당 텃밭에는 벌목사업을 하시던 큰 아버님이 사놓으신 휘발유 드럼이 가득했었다.

아마 암시장에서 사놓은 군용 휘발유일것이다. 

비오는 봄날 운전수가 담배불 부주의로 스페어 캔에 불이 붙어 흐른 기름이 불이 붙은채 빗불을 타고 처마밑을 돌아가자 소리 소리 지르며 호들갑을 떨던  여고생이었던 당고모.

용감한 다른 운전 기사의 기지로 불이 꺼진 다음 어린 사촌 시누이는  엄마에게 엄청 야단을 맞았다.

큰아버지의 사업으로 인해  연대 보증을 서셧던 아버지께서 매우 힘들어 하셨던 것을 어린 시절임에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평생동안 동생인 아버님께 도움은 커녕 폐만 끼쳤던 큰 아버지.

이젠 모두 안계시다.

대문과 옆의 방과 창고는 무너져 없어지고 남은 본체마져 기와는 없어지고 스레이트로 대체되었다.

아버지께서 창고 나뭇단뒤에 우리 가족을 숨기시고 옆집 아저씨와  깜깜한 밤에 얘기를 나누실 때 피던 빨간 담뱃불이며  총성들과 하늘을 날던 예광탄이며.

하늘을 날아가는 총알을 볼 수 있었다는 의문은 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풀렸다.

빨치산이 영동에 내려와 읍사무소를 불을 지르고 간 긴밤이었다.

나중에 소설"남부군"을 읽고서 그들이 지리산  이현상의 잔당임을 알게 되었다. 

 

길건너에는 석류나무가 마당 가운데에 있던 "국진이네집"이 있었다.

국진이가 마루에 엎지른 꿀을 핥아 먹고는 취해서 비틀거린 우스운 얘기가 기억난다.

집 바로맞은 편 길 건너에는 반쯤 부서진 허름한 빈집이 있었다.

그 집  헛간에는 검은 화약가루가 쌓여 있어 아이들은 화약 가루를 퍼다가 아궁이불에 조금씩 뿌리면서 확 타오르는 불꽃 놀이를 즐기곤 했다.

이웃집에는 당시 집에 유성기를 가진 친구가 있어 유성기를 들으러 간적이 있다.

손으로 태엽을 감아 돌아가는 유성기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친구의 아버님이 SP판에 틀어준 노래는 "정든 땅 언덕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

몇년이 지난뒤 제목이 "물레방아 도는  내력"으로 그 노래가 당시 최고의 유행가임을 알았다.

그친구에게서 사용하고 버리는 유성기 바늘을 얻어 싸리나무 가지를 잘라 앞에 바늘을 끼고 실로칭칭 감은 다음 뒤는 십자 형태로 쪼개 종이를 접어 넣어 소위 한국식 "Dart"놀이를 하며 놀았다.

매일 아침 집옆을 지나는 새우젓 장수의 소리를 들으며 보낸 어린 시절이다.

지게에 무거운 새우젓 독을 지고는 "새우젓 사~령~"하며 지게 작대기를의지하며 걷던 아저씨 .

고향이 이북이라 했다.

집 뒤에는 감나무가 있어 감꽃이 떨어지면 세살 위인 누이와 하얀 감꽃으로 목거리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곤 했다.

어렴풋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당엔 어수선한 고물들이 지저분하게 널부러지고 쇠락해 가는   옛집을 차마 사진으로 남길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내가 유치원 수료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주로 전학가기전 일학년을 다녔던 "이수 초등학교"다.

오른 편 노란 버스 자리가 "동진유치원" 자리로 기억하며 1954년 유치원  수료후1954년 4월 이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유치원  선생님은 7살 위인 형님 친구의  어머님이셨다.

 어머님 장례에 찾아 오신 형님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자당께서  아직 살아계시다는 소식에 안사람과 선생님을 분당으로 찾아 뵌것이 14년전이다 .

45년만의 해후였다.

평양 고녀를 졸업하셨다는 선생님,

내가 가지고 간 졸업 사진과 똑 같은 사진을 꺼내놓고 우릴 기다리시던 선생님 .

생각보다 작으신 선생님앞에 우리 부부는 큰 절을 올렸다.

아직 생존해 계시니 이젠 90대 중반이시다.

 

사진의여학생들이 지나는 방향 학교안으로 커다란 프라타나스가 몇그루 있었다.

어느 가을 참새들이 가득 앉은 나무 위로 형이 고무총을 쏘자 참새 한마리가 뚝 떨어져 7살 위인 형이 그렇게 존경스러울수가 없었다.

간혹 운동장에선 무료 흑백 영화를 상영하곤 했다

형을 따라 밤에 학교 운동장에 갔고 앞뒤로 보이는 노천 영사막에는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끌고 올라가는이의 한장면만  기억에 남았다.

십수년이 지나서야 그 분이 예수님이었고 선교영화를 상영한 것임을 알았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것은  그후로도  다시 이십여년이 지나서였다. 

 

              

다행히 잃어 버리지 않고 보관중인 나의 유치원 수료증서.

단기 4287년은 서기 1954년으로 유치원 다니던 1953년에 한국 전쟁이 휴전되었다.

 

경부선 철길밑의 등나무.

종전후 처음 입학한 일학년 우리들에겐  흙벽돌로 지은 교실조차 없었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학교 교사 .가마니를 깐 바닥, 책상조차 없는 학교였다.

흙벽돌교사 작은 창문에는 흰 창호지를  발랐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등나무 밑에서 수업을 했고  비오는 날이면 교실없는  1학년생 우리들은  교실 입구 통로  흙바닥에 앉아 회색으로 변한 작은 검정 칠판앞에서  했다.

학교에  처음 가던 날 모두 보자기에 필통이랑 책이랑 싸들고 와  나혼자 "란도셀"을 메고 온 것이 쑥스러워 다음날 부터 나도 똑 같이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다.

 60년이 지나는 동안 굵어진 등나무.

학교 개교에 맞춰 수령 70여년은 되어 보인다.

담임 선생님은 아침 마다 보건 체조시 앞에서 시범을 보이셨다. 

 "김건영 선생님".

선생님이운동장에서  얕으막한 나무 교탁에 올라 커다랗게 붓글씨로 쓴 흰종이를 들고 읽으면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소리내어  읽었다.

"아버지,어머니....'

돌이켜보면 현재  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캠보디아 시골 학교보다도 못한 한국 전쟁후의 이수 초등학교의  모습이다.

당시엔 어려서 몰라 그렇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비참한 일학년을 보냈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수업이 끝나면 일학년 아이들에겐 작은 가마솥에 전지 분유를 끓여 일열로 세워놓고  한잔씩 먹여 보냈다.

 작은 양은 그릇 한개에  한사람이 마신 다음에야  다음 사람이 마실수 있었다.

나중에 커서야  다갈색 둥근 전지 분유  종이통이  Unicef에서 온것임을 알았다.

그 고마움에 대한 기억으로 적은 금액이나마 지금까지 빈곤한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Unicef에 후원을 하고 있다.

영동 경찰서 건물.

학교 운동장에서 보면 흙벽돌로 지은 경찰서 건물이 있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경찰서라는 학교 수위 아저씨의 말이다.

교실이 없던  일학년 학생들을  위해  늦가을 목조 교사 세칸을 신축했던 자리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건물도 운크라(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에서 지어준 것임을 알았다.

학교에 오며  목조 교사앞까지 따라 왔던 "바둑이" .

내가 가라고 손짓을 하면 덜레덜레 집으로 돌아가던 바둑이였다.

어느날 개가 마루밑을 판다고 어머님이 나없는 사이 팔아버려 내가 받은 상처는 너무나 컸다

내 생애  처음 겪은 이별의 아픔이었다. 

일주일 동안 바둑일 찾아 길을 헤맸고  비슷한 개만 보면  쫓아가 보곤 했다.

겨우 교사만 마련한 교실에서 책상,걸상 없이 찬 마루 바닥에 업드려 공부 해야 했다.

 유리창틀에 유리대신  창호지를 바른 교실.

 찬바람 불던 가을 수업후 선생님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유리창을 달기위해 기부금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집이 학교에서 가까웠던  나는 겨울엔  작은 깔 방석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에 다녔다.

다음해 1955년 4월 아버지께서 청주로 발령을 받아  전학간 학교에서 처음 대하게 된  책상,걸상,프린트 시험지는  나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학교 본관에 들어가 처음 알게된  1946년 11월 개교했다는 연혁이다.

51년 9월부터 55년 5월까지 교장이었다는 김상희 교장 선생님.기억에 없지만 내가 일학년 다니던 때의 교장이다.(왼편)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젊은 여직원은 58년만에 찾아온 나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감사하게도 학교 생활 기록부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엔 학교가 4월에 개학했다.

졸업 년도별로 정리된 학교 생활기록부.

1954년 별도의 기록은 전무했고 <1954년 입학 1960년 졸업 생활 기록부>를 발견하고 마치 내 기록부처럼 반가웠다.

생활기록부 전면에 단기 4287년(4287-2333=1954)입학의 글씨가 선명하다.

졸업생들의 기록만  존재했다 

내가 친구의 이름 둘을 기억한다고 하자  전면의 한자로 된 명부에서  파란 잉크로 쓴  둘의 이름을  찾았다.

잉크빛 바랜 이름을 보며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난듯 반가웠다. 

유치원을 함께 다녔던 한선행(韓善幸:1947년9.2일생)과  전쟁으로 인해 늦게 입학한 손수삼(孫水三:1942.6.6일생)

생활 기록부 양식은 1955년 부터 적용 되었는지 1954년 기록은 모두  빈칸의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노란 학교 버스 주차자리가 기와집으로 되어 있던 "동진 유치원" 자리라고 짐작한다.

6.25후 영동군내 들어섰던 영동 구세군 병원 자리.

뒷산에 숲이 우거지고 간혹 사람이 죽어 시체실도 있다하고 밤이면 부엉이가 울어 어린 마음에 공포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지금은 허름한 연립주택이 들어서있다.

아래 사진은 1978.10월 당시 빈건물로  남아 있던 구세군 병원의 모습

영동 주민에겐 정겹고 오래된 <오포대>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낮 12시가 되면 앵~하고 정오를 알리는 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지금은 빨갛게 녹슬어 가던 철제 탑에 은색 페인트를 도색하고 돌로 받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시설 제작년도나 용도나 기타 안내 현판이 있을까 둘러 보아도 아무 것도 없다.

이 부근 어딘가 공터에 가마니로 벽을 두른 가설 극장이 있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유치원 다니던 전후일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한다.

추측컨데 아마 아버지께서  데려가지 않았을 까.

처음 본 천연색 영화로 변사가 대사를 읊조리던 기억이 난다.

웨스턴 무비였는지 옥수수 더미에 사람을  숨겨주자 말타고 온 수색대원이 수북히 쌓인 옥수수 더미 주위를  서성거려 어린 마음을 조리게한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동읍은 감 생산지답게 가로수는 감나무로 변했고 감을 따가는 외지인들로 부터 감을 보호하기 위해 집 앞 감나무는  집주인 소유라고 조례를 만들었다던가. 

경부선의 영동역이다 .

왼쪽 광장자리엔 무주쪽에서 벌목해온 목재가 몇겹으로 쌓여 있었고 가난한 여인들은 땔감용으로  소나무 껍질을 벗겨가기위해  끌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중에 반친구의 어머니도 있었는데 어느 날  찾아간 우리에게 물오른 소나무의 부드러운 부분을 벗겨 먹어 보라고 주었다. .

송진 냄새와 함께 쌉사름하고 달작지근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 성장하여 "(똥꾸멍) 찢어지게  가난했다"라는 표현이 나무껍질,산나물로 연명하던 데서 나온 표현임을 알았다. 

늦은 점심 시간 ,영동의 특산물 올갱이국을 먹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마침 역옆에 있고 허름한 식당에 비해 괜찮은 집인지 TV소개된 화면이 걸려 있었다.

보통 보다 "특"올갱이국을  시켰는데 국도 많고 올갱이 양도 많다는 주인 아주머니 설명이다.

퀘퀘한 냄새 없는 맑은 시골 된장국에 부추를 넣어 함께 올라온 파란 올갱이속.

조미료는 하나도 넣지 않았다는 국물을 천천히 음미하며 먼 아련한 추억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올갱이 국을 끓일때면 어머니옆에서 누나와 함께 삶은 올갱이속을 핀으로 빼던 기억이 난다.

 

 

올갱이 식당 에 걸린 박용하 시인의 시

옛일을 매달리는데 모두가 낯선 사람들-내가 그랬다.

 

*시인박용하:1963년생 강원도 강릉출신.

강원대학 국문과 졸,1989년 문예 중앙 신인상

"너무 절망적인 세계를 그리는" 시인이다

 

"생일아닌 하루가 어디 있으며 생존기념일이 아닌 하루가 어디 있겠는가-박용하 <인생>에서"

형이 다녔던 영동 중학교 .천연 잔디장인가 했더니 인조 잔디장이다.

축구시합이 있던 날 엄마를 따라 누나와 함께 영동 중학교를 찾았다.

 나와 달리 키가  컸던 형은 골키퍼였는데 형은 멋지게 공을 막아내곤 했다.

숲이 우거진 바위아래 휘돌아 가던 냇물은 시퍼렇게 소용돌이쳐 머리가마처럼 원형을 그리며  흘러갔다.

소용돌이에 휩싸이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는다는 얘기는  멱감기 좋아하던  어린 우리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10여년전 홍수피해로 제방을 새로이 공사했는지 모두가 변했다.

 

 

60여년전 "마차다리"라고 부르는 영동교 위엔 거창한 장식용 지지대가 현수교처럼 걸렸다.

한개 밖에 없던 다리는 한강처럼 많은 다리가 생겼다.

하얀 꽃은 영동의 상징이다.

다리의 가드레일은 영동이 시골 아니랄까  촌스럽기 그지없다.

 

바람이 불고 가을 낙엽이 흩어러지던 음산한 어두운 날 날 친구들과 갔던 무서운 곳.

수십년이 지나서야 그곳이  향교임을 알았다.

수령 200여년 되었다는 은행나무와 뒷산 대나무숲을 미루어 볼 때 여섯살  소년에겐 무서운 곳으로 각인 되어 있던 곳이다.

지금도 뒷산에는 가르이 되면 오래된 숲과 대나무 숲에서 쉿쉿하며 바람소리 일 것 같다.  

 

 

축제 준비에 한참인 영동읍 영동교 밑.

저 물에서 멱을 감고 형이 만들어준 대나무로 만든작살이나 혹은  손으로 고기를 잡곤 했다.

 잡은 고기를 검정 고무신 한짝에 담아오던 어린아이가 한쪽 발에만 고무신을 신은채  뜨더운 여름날  걸어가고 있다.

영동읍의 거리를 샅샅히 뒤지며 걷다 발견한 수령 송덕비와 6.25당시 전사한 사람들의 충혼비.

옛 지방 관리들의 송덕비야 전혀 믿을 게 못된다는 평상시 소신이다.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군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더 짜아 내던 관리이기 쉽다. 

어쨋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아 역사의 일부로 삼았다.

 6월 6일 현충일이 가까워 공원주변의 잡풀을 뽑는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바쁘다. 

 

두 냇물이 합쳐져 이수(二水)인가.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양수리)처럼 물이 합류하여 흐른다.

영동역엔 상행지 각계와 하행지 황간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각계'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 보는 지명이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청주에 가기위해 조치원에 내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철길에 대못을 올려 놓고 기차길 옆 제방 풀을 꼭 잡고 엎드려 놀던 시절이다.

기차에 빨려 죽을 수 있다는얘기를 형들에게서 익히 들어서다.

  위험한지도 모르던 철없던 시절, 까만 증기 기관차가 매쾌한 연기를 쏟아놓고 가면 달려가 납작해진 못을 보며 흐뭇해 하던 어린아이가 저기 있다.

가난한 여인네들은  석탄기차 아궁이에서 떨어진  석탄(역청탄)을  줍기 위해  역근처 철길을 따라 걸었다.

아무래도 기차가 멈추는 지점 가까이 화차에서 석탄이 많이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60여년전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던 한줌의 추억을 확인하고자 영동읍의  길들을 샅샅히 걸어 보았다.

혹시라도  숨어버린 기억의  한 올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대하며.

 이수 초등학교 경부선 철다리 밑을 지나 보리밭 밟던 곳은 어디일까.

나무 한그루 없던 민둥산길   따가운 햇볕속에서  마른 풀 사이로 뛰던 송장 메뚜기들을 쫒던 소년은 어디로 갔나.

영동에서 청주로 ,서울로 토론토로 다시 서울로 .마지막 남은 삶은 어디서보내야 할지 미정이다.

삶을 하나 하나 정리하며 나의 "버켓 리스트"에서  또 하나를 지운다.

 눈을 감으면 희미한 흑백 사진처럼 잔영으로 남아 있는 영동이다.

이제 다시는 영동을 찾지 않으리.

영동을 잊으리라.

 영동 순례를 마치고 다시 도착한 영동역엔 마침 10분뒤 출발하는 서울행 무궁화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 사진은 단기 4287년(1954) 3.19일  영동 "동진 유치원 "수료식날 기념사진이다>-뒷줄 왼편에서 다섯번째가 본인임.

유치원은 멋진 한옥으로 된 건물이었다.

앞줄 왼편의 선생님이 현재 분당에 생존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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