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ing stone 숙소에서 아침은 식탁에 가져다 놓은 빵 한덩이와 한통의 잼과 버터가 전부다.
Tea가 있지만 Tea로 아침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우선 한국에서 가져온 일본제 인스탄트 야채숲에 끓인 물을 붓는 다.
그리고 사과 반쪽, 요거트 한컵 토스터기에 올라온 구운 빵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가져간 French Cafe를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9시 브란성과 시나이아 관광을 하기로 한사람은 우리부부와 키가큰 일본인 같은 친구 ,오마 모두 셋이었다.
9시 출발 하기로 해서 모든 준비를 미리하고 기다려도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Common Room엔 아무도 없고.
약속시간 25분이 지나서야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기사가 나타났다.
우리의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시키다니.
약속시간이 9시가 아니냐고 하자 아침 Traffic에 막혀서 그렇다고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는 표정이다.
평일 아침으로 이 작은 도시가 얼마나 막히는지 알 수 없어도 한두번 한 것도 아닐 터인데 소피아 처럼 5분전에는 미리 와 있어야 하는 것이 영업하는 사람의 도리다.
기사 기분 나쁘게 하여 출발하면 좋을 것이 없어 알겠다고 응수하고 말았다.
통성명을 나누고 우선 Bran 성으로 행했다.
기사 이름은 그레그다.
나중에 숙소에서 들은 얘기론 전직 군대 해리콥터 조정사였다고 한다.
브란 성은 부라쇼브 남서쪽 32키로 위치다.
그의 차는 Audi로 운전 솜씨가 좋았고 소피아의 기사처럼 불필요하게 추월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중세시대의 전형적 건축 양식으로 1377년에 부라쇼브 상인들이 지었다는 브란 성이다.
절벽위에 지어진 성은 음산한 분위기 때문 드라큐라 성으로 부르나 드라큐라의 모델인 된 블라드 제베쉬 3세는 이곳에 머문적이 없다.
성이라기 보다 마치 감옥 같은 분위기다.
자금성이 큰 감옥이듯.
성절벽 밑에 세워놓은 십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가이드가 없어 그냥 둘러 보는 셈이다.
오디오 안내는 가능하다.
이어폰을 끼고 하나 하나 설명들을 시간이 없다.
옛 루마니아 의 왕들의 초상으로 짐작 한다
브란 성의 옛 사진
이성에서 제일 관심을 끈 Prince Ileana의 사진.
그녀의 여러사진을 보며 공주란 이런 모습일것으로 상상이 가는 모습을 잘 포착하였다.
사진 작가가 프로라면 공주는 훌륭한 모델이다.
하나 하나의 자세에는 우아함이 베어있다.
식당
2층에서 독서실인 윗층으로 가는 비밀통로 혹은 지름길
독서실.비밀 통로로 나오면 서재 뒤가 된다
우아한 복장과 해맑은 미소는 지금도 살아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사진 찍기를 즐겼던 공주.
음악실.작은 영화관도 있다.
공주의 베일이 신비롭다. 요즈음 사진도 저렇게 잘 찍을 수 없으리.
그림인지 사진인지 구분이 잘안된다.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의 그림. 그 자손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
좁은 마당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우물이 있다.
성안의 통로인 복도.
사진;성안에 있는 드라큘라 (Dracula) 안내문과 소설가 "부란 스토커"
1960년 중학교 입학전 12월 영화 드라큐라 백작을 보고온뒤 별채에 있던 화장실을 갈 때마다 영화의 장면이 떠 올라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십자가,마늘,햇빛을 싫어 했던 드라큐라에게 커튼을 걷자 햇빛에 한줌의 재로 변한 자리에 반지만 달랑 남았던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게 남아있다.
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빛이 승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
원래 햇볕을 싫어 하는 병은 "포르피린 '증세라 한다
드라큐라 영화는 크리스토 리가 주연한 영화(1970:제스 프랑크 감독)가 대표작이며 1999년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큐라"는 게리 올드만("레옹"에서 또라이 형사 연기가 압권이다)과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이 볼만한 영화다 .
서양사람들은 흡혈귀 영화에 환타지까지 곁들여 좋아하지만 아주 오래전 흡혈귀나 우리나라 불여우 얘기는 시들해 버리고 말았다.
최근엔 소녀 뱀파이어까지 등장하여 슬픈 사랑의 얘기를 전한다
스웨덴 영화로 "렛미인(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드라큐라 하나만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드라큐라 T- shirt 는 가면과 함께 이곳 저곳에서 주요 관광 상품으로 팔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의 원작자 부란 스토커(Bran Stoker)에게 사후라도 감사해야 할일이다.
198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란 스토커가 쓴 소설은 연극,영화로 각색되어 끊임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런던과 루마니아의 트랜실바니아 가 배경으로 스토커는 과거 잔인하기 소문난 블라드 체베슈(1427-1476)를 소설의 모티브로 삼았다.
블라드 체베슈3세는 원래 15c 왈카리아 공국의 영주였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장군으로 용맹성 때문에 '용의 아들'이란 이름의 Dracula란 이름도 사용했다.
1459년 브라드 체페슈왕이 요새를 건설하며 왈라키아 지방의 주도가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현재의 부카레슈티가 되었다
(부쿠레슈티는 전설속의 양치기 소년 'Bucur'에서 유래되어 왈라키아왕 시대부터 불리워졌다 한다)
블라드 체베슈는 시기쇼아라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그가 태어난 집은 레스토랑으로 사용중으로 벽에 출생지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드라큘라 백작은 1427년 오스만 트루크와 전투에 참가 ,전사하여 목이 잘렸다 한다.
중세 유럽은 당시 암흑의 시대로 흑사병,결핵,천연두가 창궐하고 지진과 홍수등의 자연 재해가 성경의 마지막 시대의 징후처럼 잦았으며 마녀사냥이 창궐하던 시기였다.
그시대에 오스만 투루크의 슐탄 마메드를 물리친 블라드 체베슈는 가뭄에 단비였고 유럽에선 기독교 문화의 수호자로 떠 올랐다. .
그가 오스만 투르크를 이겼다는 소문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으며 그에 관한 잔인한 소문도 함게 따랐다.
그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정부의 배를 갈랐다느니 수집품으로 24,000개의 적군의 귀를 모았다는등의 소문이다.
잔인하기로는 코를 베어간 일본놈들이 더 잔인하다.
적군(오스만 투르크군)을 잡아서는 항문으로 꼬쟁이에 꿰어 놓고 무게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2-3일 걸린다 한다) 식사를 즐겼다고도 했다.
정신 병자가 아니고서야 밥맛이 날까?
만약 사실이라면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방법이다.
그래서 오스만 투르크 병사들은 그를 <창에 꿰어 죽이는 자>-'Impeler"라고도 불렀으며 공포에 치를 떨었다한다.
이혼해도 양당사간의 얘기를 들어봐야하고 교통사고를 내도 쌍방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 세상에서 이젠 동영상까지 확인해야 하는 세상이라 믿을 것은 못된다.
두려움의 존재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 승리한 그가 평범한 사람이면 않되었고 좀 특이한 인물이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블라드 체베슈는 정적,적군에 대해서는 잔인하였으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잔인한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는 군사학자의 연구도 있다.
더우기 정적이었던 항가리 왕국이 계략으로 그를 왈라카이 영주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잔인 무도한 폭군이라고 선전하면서 기피 대상으로 삼게 했다.
그의 잔인함은 흡혈귀를 상상시키고 피를 마시는 폭군으로 그려졌다.
루마니아인들에게는 브라드는 자유의 수호자,영웅으로 가슴속에 살아있지만.
실제로 흡혈귀들은 한국과 아프리카에 많다.
한국은 건강에 좋다고 사슴피를 날로 마시며 날 간을 먹고, 또 소문에 건강해 지겠다고 젊은 피를 수혈했다는 최고 경영자도 있고 아프리카에선 생존을 위해 소의 피를 마신다.
유능한 사람은 수많은 정보와 첩보 속에서 쓸만한 정보를 가려내듯 많은 상상의 소문과 얘기중에 흡혈귀를 문학의 소재로 삼아 그려낸 소설가 "브란 스토커"가 루마니아에게는 일등 공신이다.
그 후손들을 초청하여서라도 공로패를 주어 마땅하다.
캐나다 Prince Edward Island(캐나다의 한주로 붉은 토양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유명하다)는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을 쓴 작가 "루시 몽고메리" 여사의 소설로 유명해져 수많은 관광객을 모은다해도 드라큐라 백작을 쓴 '브란 스토커"에 비견할 순 없다.
*드라큘라는 블라드 드라큘의 아들(용의 아들)이란 의미와 드라큘이란 이름 자체에 "악마"란 뜻이 담겨져있다.
성밖으로 보이는 그림같은 마을
구석의 도자기 난로.
사진:Ileana 공주.공주의 어린시절 시절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진 5장이 지나온 삶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곳에서 또 관심을 끈 것은 왕자들의 이야기 보다 Princess of Romania 인 "Ileana"공주 이야기다.
Ferdinad 1세와 Queen Maria 사이에서 5번째로 1908년 1월 5일 출생(여섯째가 죽어 막내가 되었다)하여 가정교사들과 공부하고 영국에 유학하여 Y.W.C.A회원이 되었다 .
루마니아 돌아와 부카레슈티에서 체육 교육을 받았으며 조각과 그림을 공부했다.
그녀는 Constantza(루마니아 흑해 항구 도시) 해양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키잡이 선장 자격도 획득했다.
1926년 그녀는 Y.W.C.A와 유사한 기독교 여성 연맹을 설립했고 1926년 Blue Triangle이라고 부르는 청년 모임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26년 어머니인 Queen Maria와 미국을 여행했고
1931년 7월 26일 시나이아 팔레슈 성에서 투스카니의 왕자이며 오스트리아 왕자인 Anton 대공과 결혼하였으며 6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번의 이혼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남미 아르헨티나 에서 Shelter를 운영하며 고국에서 망명한 이들을 도왔다.
그녀는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사망했다.
이 브란 성은 미국에 살고 있는 건축가의 소유로 그는 '이리아나 " 공주의 아들이며 Ferdinad 1세의 외손자다.
1948년 소련 체제시 수용되었 던 것을 재판을 통해 루마니아로 부터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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