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쏘라는 총이긴 한데-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을 보며

Jay.B.Lee 2011. 7. 7. 09:23

이번 강화도 해병대 해안초소 김상병의 총격사건을 보며 벌써 40년이 훌쩍지난 군 생활이 떠오른다. 

69년 3월 입대하여 군자 일대의 해안초소(안산시가 되었다)에 근무중 소래에 소재한  대대본부 내무반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

당시 막 전출온  신병으로 사고 소식만 접했을 뿐 사고 원인은 모르는 채 지나갔다.

이듬해 겨울 연대본부 인사과로 전출하자마자  접하게 된 소식은 한달전 함께 한솥밥을 먹던 김상병의 수류탄 사고 소식이었다,

 충북 제천출신 고아로 하사관 학교에서  퇴교를 당해 군번에 비해 복무 기간이 짧았다.

제대 말년 동기인 병장의 비호아래 항상 "열외 취급"을해주어  주로 내무반보다 초소방커에서 자유롭게 생활했다,

25일 정기 휴가에 더이상 갈 곳이 없다고 10일을 일찍 귀대했던 딱한 선배였다.

소대장,선임하사 ,소대원들 모두 그가 말썽없이 제대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로  배려해 주었다.

어느 날 그가 술에 취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든채 죽겠다하여 설득하러간 중대장과 중대장을 따라간 예비소대 하사가 그만 수류탄 사고로 죽고만 것이다.

중대장-지금 생각하면 아까운 20대 후반의 꽃같은 젊은이다.

참 어질고 따듯한 군인이었고 천주교 교인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때 부인과 함께 어둠이 짙어가던 해안 초소를 돌며 사병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던 분이었다.

 김상병은 죽고 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술이 취해 3시간 동안 쥐고 있던 수류탄 핀을 힘이 빠져 실수로 놓히는 바람에 터진 것으로 짐작한다.

연대 본부로 오기전 초소 근무중 모두를 모아놓고  수류탄을 든채 어두운 초소 밖에서 분대원들과 함께 죽자던 김상병 .

초소에 들어가  등불 밑에서 수류탄 안전핀을 끼고 있는 김상병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단순 위협이나 장난인줄 알았지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을 줄이야.

논산 1172군번이었다.

 

연대가 훈련을 마치고 인천 해안지역으로 파견나가며 나는 다시 합류하여 해안 근무를 하게 되었다.

 소대엔엔 Caliber 50기관총,50미리 박격포, LMG(경기관총)-2,500발의 실탄 보유,AR(Automic Rifle)자동소총,M79유탄 발사기와 인명 살상 효과가 큰 크레모아(베트남 에서 사용하던 폭탄이다)등의 화기를 갖추었고 각사병에게는  월남에서 빼돌려 한국으로 들여온 것으로 짐작하는   M-16과  160발의 실탄과 수류탄 한개가 지급되었다.

카빈자동소총(Carbin-2) 소지자는 240발의 개인 탄약을 지급받았으며 분대장은 M-1소총을 소지했다.

소대장은 육사,3사관 학교출신,ROTC로 자주 교체되었는데 인천 송도 지역근무는  전방과 달리 장교들에게도 벅찬 지역이라 자주 교체가 되었다.

소대엔 나이어린 소대장,단기하사,장기하사,대부분 고교를  마친 소대원으로  대재,대졸까지  있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사병들도 진급시험이 있어 대재나 대졸들은 시험에 가산점이 있어 유리했다 

나는 연대본부에서 시험을 친 관계로 나보다 6개월 먼저 입대 선배들이 상병을 달때 일찍 병장계급장을  달았다.

소대장이 하사관들을 기합을 줄 때  병장인 나도 불리워갔지만 소대장의 의도를 알기 때문 아무 불평을 안했다.

해안 야간 동초(보초가 아니라 움직이며 경계하는 근무를 말한다) 근무란 힘들다면 힘든 근무다.

좁은 방카에서 교대로 잠을 자야 했으며 추운 겨울이나 비바람이 불면   더 힘들었다.

다 같이 고생하는 것이어서 특히 고참들은 대우를 받기 보다 많은 희생과 봉사를 해야 했다.

새 보급품 -털장갑,양털 바지,조끼등 이 나오면 가장 막내 이등병 부터 주었으며 식사는 더 많이 먹게 늘 배려했다.

 간혹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옮길 때도 고참 상병들이 맡았다. 

덩치 큰 일병이나 이병들은  요령이 없어 비실대기만 했다.

병장인 나는 계급은 아래인 선배 상병들을 예우해 주었고  친구로도 살갑게 지냈다.

비록 사단 본부에서 쫓겨온 하사가 분대장으로 오거나  갓 하사관 학교를 졸업한 애송이 하사가 오더라도 계급 우선 원칙을 두어 깍듯이 모셨고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여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되도록 했다.

야간 근무시엔 분대 조장으로 근무지를 철저히 지켰으며  만조시를 제외하고 바다물이 멀리 빠져나간  간조시엔  가능한한 일병 ,이병들을 잠을 더 재웠다.

집안 고민으로 술먹고 주정하는 후배가 생길 땐 고참들을 보내 근무를 시키지 않고 달래서  잠을 재웠다.

다음 날 그를 구타한다던지 기합 주는 일없이 스스로 미안하게 만들었다.  

해안 부대엔 구타가 없었으며 총기를 소지한 야간 근무시엔 야단치는 것조차  금물이었다.

타 부대 전출자가 소대에 배치되어 오더라도 불안하지 않게 텃새를 부리지 않게 하였으며 월남 귀국 병장들이 제대전  잠시 두어달 머무는 경우에도 하극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했다.

오랜기간 동안 총기와 탄약을  늘 다루면서 대대내에 단 한번도 총기 사고가 없었던 것은 고참들의 희생과 노력때문이었다.

제대후 한참 지나 서울에서 당시 인천에서 근무했던  제대한 선후배-장교,하사,사병40여명이 모여 웃고 떠들수 있었던 것은 계급,나이,기수를 떠나 서로가 아껴준 사랑때문이었다.

40여년전 군생활을 회상하며 시대에따라  변화하지 못한채 퇴화된 군대를  본다.

인격모독과 구타,얼차려등으로 지면을 메우는얼룩진 의경들과 이번 "기수 열외" 해병대 사건의 전말을 보며 이것이 대한민국의전투 경찰이요,군대인가 심히 우려된다.

전통의 계승이란 분명 이런 악습을 두고 하는 얘기는아니며 총은 그렇게 쏘라고 가르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