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실미도 사건-실미도를 찾아서

Jay.B.Lee 2011. 4. 28. 08:28

 

 

사진:잠진도 페리 선착장

쉽게 올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 오랜만에 친구들과 무의도를 가볍게 산행하고 실미도를 가보기로 했다

꼭 가보고 싶었던 실미도였다.

 71년 8월 23일-그들은 야간 해안 근무 후 아침 취침 후 막 잠이 깰 무렵 우리 부대를 통과했었다.

잠진도에서 30분마다 있는 페리로 무의도로 들어갔다.

차로는 인천 국제공항이 있는 영정도를 거쳐 과거 용유도로 거쳐 잠진도에 이른다

 

잠진도.

 

무의도 -생가보다 큰섬으로 산을 종주하면 4-5시간이 걸린다.

 

무의도 선착장

 

무의도 선착장에서 본 페리.290명정도 승선 가능하고 30여 대의 차를 운반한다. 뒤로 보이는 잠진도.

 

마을버스(1,000원/일인)로 섬 중간으로 들어가 실미 유원지로 내려가기로 했다. 바닷바람이 있어 아직 새삭이 나지 않은 나무들

 

실미벚곷축제가 4월 29일부터라고. 추운 날씨 탓에 이곳은 개화가 서울보다 며칠 늦다

 

 

 

 

 

 

 

 

 

 

 

축대를 보며 앞쪽 평지에 막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평지를 이룬 곳이다. 이곳도 막사가 있었던 자리다

 

물을 어디서 먹었을 까 궁금하던 차 우물을 발견했다. 지금은 비록 이끼가 끼었으나 당시는 깨끗한 물이었을 것이다. 

이 우물만이 유일하게 남은 684부대, 실미도 특수 공작원들의 흔적일까?

 

우물-지형적으로 보아 높지 않은 산등성이고 섬임에도 불구 맑은 물이 풍부해 보인다.

 

작은 모래사장 우측의 바위

 

뒤쪽으로 보이는 중간 부분은 평지로 막사 자리로 짐작되는 곳이다.

 

앞으로는 바다, 양편으로는 바위가 시야를 차단한다.

 

모래사장에서 본 좌측 바위

 

작은 섬치고 바위가 많다.

 

실미도 해변. 막사가 있던 곳은 산등성 넘어다.

 

실미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앞으로 보이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실미도

 

이 모래사장을 따라 실미도 특수 공작원들은 무의도로 향했을 것이다,

 

어망조차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이젠 고기가 잘 안 잡히는 모양이다.

 

20여 미터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모래톱이다.

 

앞에 보이는 곳이 실미도다. 오후 3시 반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들어갔다.

 

무의도의 소나무 숲. 특수 공작원들도 이 숲을 지나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실미도 사건 개요>

1971년 8월 23일 33사단 102 연대 2대대 6중대 소속으로 야간 해안 경계근무를  마치고 오전 취침 후 잠이 깰 12시경 통신병 이상병이 "괴한 출현 비상"을 외쳤다. 

순식간에 전소대원이 군복을 입고 탄약고로 달려가 실탄을 집어 들고 중대 입구 언덕길을 쫓아 내려갔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605 초소 옆 소대 분대원들이 "실탄! 실탄! "하며  중대 언덕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인천 송도로 들어오는 택시를 모두 세운 후 영문도 모르는 승객들을 내리게 하고 택시를  타고 경인 간 고속도로를 차단 차들을 서행시킨 후 차에 올라 국군 복장을 한 괴한들을 찾기 시작했다.(지금 생각해보니 도화 IC 부근이 아닌가 싶다)

즉시 대응토록 총의 잠금쇠는 풀어놓았으며 M16 약실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고 손가락은 방아쇠에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내가 근무했던 인천 송도 부근 해안 경비부대(*33사단 102 연대 2대대 6중대)를  통과했다. 

 그들을 추격하여 쫓던 우리 부대를 앞지른 버스가  경인 가도를 달려 대방동 유한 양행 앞에서 기둥을 받아  멈추기까지 뒤늦게 "실미도 부대"와 "실미도 사건"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자료들을 취합하여  <정리>해보고 싶었다.

영화 "실미도"를 본 후 더욱 마음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33사단은 해체되었던 얘기를  얼마 전 들었다.

33사단은  33 숫자 마크가 번개모양처럼 생겼었다.

 

1."실미도 북파 공작원 부대"편성의 배경

1968 년년 1월 21일 새벽 북한의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으로 대로한 박정희 대통령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 조치를 하기 위해 1월  특수부대 창설을 명했다.

그 목적은 특공요원을 양성해 특수작전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고 , 그 목표는 김일성의 거처를 습격하는 동시에 북한의 경제적 , 군사적 요충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창설 주역으로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철희 제1국장이 맡아 "인간병기"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부대 명칭은 실미도 부대, 68년 4월 창설된 특수부대라 하여 "684부대"라 불렀다.

혹 "김일성 주석궁 폭파 부대"라고도 했다.

훈련은 공군 특수부대인 2325부대(209 파견대)가 담당키로 하였다.

 

2. 훈련을 위한 기간병의 구성

  공군 2325부대에서 공작원을 훈련시킬 적임자로 특수 훈련과 낙하 훈련을 받은  "강인한 군인"  김이태 중사(23세, 당시 하사)가  중앙정보부에 선발되었다.

그의 임무는 적지에 떨어진 조정사를 구출해오는 특수업무로 처음부터 684 부대 창설 및 전 훈련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주요 순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실미도에서는 "김빈'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특수 훈련을 받아 북한에 갔다 온 일부 기간병과 기본 훈련을 받은 상당수 기간병이 차출되었다.

소대장들은 모두 중사로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다른 소대장으로 김방일 씨(당시 실제 계급 중사, 영화 속 허준호))로 김이태 소대장과는 동기이기도 하다.

김방일 소대장은 실미도 사건 발생 하루 전 실미도 교육대장과 인천으로 나왔다가 약혼녀와 친척들이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일단 배를 탔다가 교육대장의 배려로 하루 외박허가를 얻어 극적으로 살았다.

실미도 사건 발생 후 영화에서처럼 대방동 총격전 현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실미도에 들어가 사체 수습 및 건물 폭파 등 뒤처리를 했다.

 

3. 훈련병의 구성

훈련병은 3개소대(1소대"10명)로 구성하였으며 북한의 124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조직했다.

훈련병들은 교육을 시키는 기간병들이 공군 인지도 몰랐고 군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소대장 김이태 씨에 의하면 1968년 4월부터 3년 넘게 훈련을 시키는 동안 그들의 성장 배경을 묻지 않아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 절반 가량은 죄 없이 차출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살인을 저지른 죄수도 있었으나 (김이태 증언) 영화처럼 사형수나 무기수로 이루어진 것으로 만은 아니었다.

옥천에서 동시에 실종된 7명 중의 청년 중 5명의 명단이 훈련병 명단과 일치했으며 당시 공군 감찰관으로 난동 사건 수사를 맡았던 김중만(전 청와대 비서실장)씨의 방송 인터뷰 증언도 이를 뒷받침 한다.

"훈련병 31명 중 사형수나 무기수 등 범죄자는 한 명도 없었다"-김중만

그러나 소설 실미도 저자 백동호 씨는 "분명 사형수가 있었고 그 사람을 내가 교도소에서 만났고 당시 684부대는 국가적 비밀사항이어서 파헤칠 수 없었고 김중권 씨도 마찬가지다"라고 반박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는 같은 방송에서"북에 가서 일정 임무를 수행하면 사면해 준다는 조건으로 무기수 등을 모집해 훈련을 시킨 것으로 안다"라고 상반된 주장을 폈다.

소대장였던 김방일 씨는 "훈련병 가운데 강도나 깡패 출신도 있었지만 일반인도 상당수 있었다"며  모두가 범죄자였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한다.

사형수나 무기수라는 얘기는 흔히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다(예: 지옥의 특전대-찰손 부론 손, 리 마빈 주연)

훈련병의 평균 연령은 30세로 제일 어린 21세와 최고령 38세까지 있었다.

훈련병들에겐 북한에 넘어가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김이태 씨는 밝혔다.

 

 

4. 훈련장소

실미도는 인천항에서 20킬로 떨어져 있는 인천 영흥도 남쪽 " 무의도"(무희가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舞依로 지어짐) 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썰물 때는 무의도와  갯벌로 이어져 무의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섬이다.

현재는 무의도엔 2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당시 인근 성갑도, 덕적도, 서곶에도 북파를 위한 특수부대들이 있었다고 한다.

 

5. 부대 주요 시설 현황

교육대장 숙소, 기간병 막사, 휴게실(운동기구 및 당구대), 취사장, 훈련병 막사, 창고, 무기고, 통신실, 연병장, 모래밭, 우물, 평양 모형,, 발전소, 훈련병 화장실, 기간병 화장실

그리고 유격장, 도강 하강 훈련장이 막사 북편에 위치하고  수류탄 훈련장과 폭파 훈련장은 산악 훈련 코스 넘어 동편에 위치했다.

막사 서편 선착장  모래밭 앞에는 "우리의 신조"팻말이 있었다.

 

6. 훈련의 목적

북한의 김일성 주석궁에 침투하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을  궁극적 목적을 삼았다.

68년 1.21 청와대를 습격하다 체포된 무장공비 김신조의 입에서 나온 "박정희 목 따라왔어요"에 대한 대응 목표였다.

훈련병 기간병 공히 모두  하나의 목표는 "김일성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68년 11월, 6개월이 넘는 훈련 끝에 684 훈련병들은 출동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실미도를 나와 남한 내 최북단인 백령도까지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684부대가 북에 침투할 경우 제2의 6.25 전쟁이 날 것을 우려한 상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다시 실미도로 돌아왔다고 김이태 소대장은 밝혔다.

 

7. 훈련.

북한 침투에 대비, 북한군가를 부르고 북한식 제식훈련을 받았고 개인화기로 카빈 소총 외 AK소총을 지급받았다.

군가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인민군 군가"를 주로 불렀다고 훈련병 조교였던 양동수 씨는 밝혔다.

영화에서 처럼' 비겁한 자는 갈 테면 가라'등의 "적기가"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강도 높은 고된 훈련을 통해 북한의 특수부대 124부대를 능가하는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으로 훈련 결과  실제 해병대나 특수부대 이상이었다고 김이태 소대장은 확신했다.

"인도주의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오직 목표와 방식만이 존재한 훈련이었다".-김이태

그들은 3년 4개월이란 오랜 시간을 훈련받았다. 실제 훈련은 영화 이상으로 혹독했다고 한다.

특히" 북괴군에게 잡히면  자폭하라"라고 수없이 강조되었다.

 실제 북파작전 시엔 고무보트 보다 공중 침투로  준비하고 있었다고 김이태 씨는 증언했다.

 

 8. 훈련병 8명의 사망 사유

 

1명;훈련 중 익사

2명:야간 독도법 훈련 시 민가에 침입, 숨어있어 훈련병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본보기로 즉결" 처형"되었다.

3명:훈련병들이 썰물대를 기다려 무의도에 들어가 동네 20대 처녀 두 명을 강간하고 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민간인을 풀어 주고 나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설득에 "개소리 마라. 우린 다 죽겠다"라고 불응했다.

 훈련병들 중  두 명은 한 명이 칼로 찔러 죽였고  그는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기도에 실패한 훈련병은 즉결 처형방식으로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대의를 앞두고' 배신행위'란 용서받을 수 없었다고 김이태 소대장은 밝혔다. 

"군인의 신분으로 민간인을 강간한 그놈들은 처벌돼야만 했다"라고 했다.

당시의 처녀 두 명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고 있다.

1명;별명이 "오랑캐"인 폭력적인 훈련병이 화장실에서 동료 훈련병을 "계간(남색)"하고 불응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눈치채고 조사차 몰래  딸려 보낸 기간병을 기절할 정도로 구타하여 다른 훈련병들을 시켜 때려죽였다.

이는 하나의 목적에 반하는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26대에서 27대를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훈련 소대장에게 생사 여탈권 까지 주어진 상황으로 보아 훈련병을 어떻게 다루며 주어진 훈련 임무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 그 냉정함과 철저함을

볼 수 있다.

훈련병 처형에 대해" 나중에 생길 법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큰 일을 위해서라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제 겐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김이태.

따라서 사건 전 실미도에서 죽은 훈련병은 7명이다.

1명:사건 당일 "프락치"로 간주되어 동료 훈련병들에게 사살되었다.

 따라서 총 31명의 훈련병들 중 실미도를 출발할 당시의 인원은 *총 23명이었다.

(최근 밝혀진 문건으로 사건 당일 실미도에서 교전 중 2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어 이것이 맞다면 출발 당시 *총 21명이 된다.)

 

9. 상급 부서에 대한 건의 사항

작전이 중단된 채 잊혀가는 684부대 훈련병들을 위해 김이태 소대장은 다음과 같이 상부에 건의했다고 증언했다.

1) 훈련받은 대로 당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북파 해 줄 것.

2) 베트남에  파병해 줄 것도 요청했으나 '부대 존재'  자체가 기밀이라 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정식으로 군인으로 임관해 줄 것도 거절당하자

4) 그렇다면 놔두면 반드시 사고를  칠 것 같아 "모두 죽이자"며 "본인이 직접 해치우겠다"라고라고까지 건의했으나 어느 요청하나 수용되지 않았다.

 684부대의 특수 임무상  몇몇 관계자만 아는 일이어서 누가 나서서 책임을 지고 처리해주어야 하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아 잊힌 부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항상 벌리기만 하고 깔끔한 마무리 하지 않은 일이 그런 것처럼 시한폭탄처럼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상부에서 훈련병 사살 명령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10. 사건 발생일 8월 23일 진행상황

 1) 오전 5시 50분경 교육대장 김순웅(영화 실미도에서 안성 기분)은 당번병에 의해 둔기(해머)로 맞아 사망했다.

내부 벽이 피범벅이 돼버린 벽의 흔적으로 보아 일격을 당한 뒤 상당한 육박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2) 훈련병들은 기간병 막사에 침입 자고 있던 기간병들에게 난사하여 기간병 24 명중 12명을 사살했다.

6명은 바다로 도망쳤으나 익사하고 경비병 6명과 외출 중이던 김방일 소대장이 생존했다.

화장실 똥 통속에 피신하여 사살을 피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3) 오전 7시 군 위장복으로 갈아입은 훈련병들은 통신실 및 무기고를 폭파하고 실미도 옆 섬인 무의도로 이동했으며 이때의 시간은 대략 오전 9시경이었다.

4) 그들은 무의도에 나와 "해방군'이라 자칭하며 주민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여  섬에 있는 단 한 척인 동력선을  빼앗아 선주 석영산 씨를 인질로 잡고 송도 605 초소 부근 앞바다까지 타고 나와 해안에 상륙했다.

오전 밀물이 들어와 노 젓는 고기잡이 배로는 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5) 낮 12시경 33사단 102 연대 6중대 관할 송도 부근 605 해안 초소를 통과하기 전  분대가 야간 근무 후 철수 후 혼자 초소를 지키고 있던 김형운 일병과 마주쳤다.

6) 김형운 일병은 소대에 보고 했고 소속과 작전임무를 을 확인하라는 소대의 지시에 그들은 "특수부대로 해안침투 훈련 중"이라고 시비조로 얘기한 뒤 605 초소를 빠져나갔다.

6) 12시 53분경 송도 부근에서 인천 항도 교통 소속 버스(경기 5의 2373)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달려 나온 102 연대 6중대 605 초소 "최 하사"와 분대원들이 교전을 했다.

야간 근무 시 기본  탄약 소지량이  아닌 각 개인 화기의 탄약, 한탄 창만 가지고 나와 금방 실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사건 후 당시 분대장 최 하사가 보이지 않았는데 2개월 뒤에 나타났다.

입원했었는지 조사 진술을  때문이었는지  본인만이 알 것이다.

7) 오후 1시경 간석동 고갯길에서 버스 뒷바퀴가 펑크나 태화 운수 소속(5-1681호)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로 오며 경찰과 충돌, 작은 교전이 있었다.

8) 2시 15분 유한양행 부근에서 기둥을 들여 받고 버스는 정지했다.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인 군경과 대치한 가운데 총격전에서 일부 사살되었고 자폭함으로써 처음 6명이 생존했으나 2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 후 생존한 4명은 공군 군법 재판을 통해 72년 3월 1,2심에서 모두 사형 언도를 받고 즉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1. 당국의 발표

8월 23일 3시 15분 대간첩대책본부는 "서울 침투를 시도하려던  무장공비 21명을 군경이 저지했다"라고 발표하였다가 오후 6시 35분 정래혁 국방장관은 "공군 관리하에 수용 중이던 특수범 23명이 고도에 격리된데 불만을 품고 부린 난동 사건"으로 정정 발표했다.

당시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는 등 남북 화해 무드가 익어가고 있던 시점에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한 특수부대"라고는  발표할 수 없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10. 훈련병들의 난동 사유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탔던 버스 승객의 증언을 보면 그들 중 상급자로 보이는 훈련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해 4년간 산골에서 고생했는데 나라가 우릴 배신했다. 각오는 섰느냐?"

"네!"

또 체포된 훈련병 4명 중 이석천(31)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훈련이 고되고 모든 게 말한 것과 달라 중앙청 높은 분을 만나 따지려 했다"

김종철(29)씨는 직속상관이 오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말을 않겠다"며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임무를 완수한 뒤  보상을 원했던 기대가 무너지고 자신들의 가치는 없어진 채 철저히 방치된 데서 온 그네들의 "분노의 폭발 "이었다.

시한폭탄이 되어버린 그들의 인간 심리를 이해할만한 "인간들"이 상급부서에는 없었고 부대 작전의 취소, 인간적 욕구 분출마저 제한된 , "감옥 아닌 감옥"이 돼버린 상황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군에 근무 당시 나는 그네들의 부식은 처음과 달리 점점 나빠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12. 의문점

처음 발표는 21명으로 발표되었다가 23명으로 늘어났다

 체포된 4명을 감안하면 19명이 청와대로 향했다.

사고 당일 전 까지 7명이 사망.

출발전 교전으로 2명 사망 

인천 조개 고개에서 교전으로 2명 사망

유한 양행 앞에서 14명 사망. 체포된 6명중 2명은 병원에서 사망.

4명은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소설가 백동호 씨의 주장에 의하면 훈련병중" 청와대에 가서 담판 짓자"는 다수의 주장에 3명이 반대하였고 한 명은 실미도 현장에서 다수파에 의해 살해되었고 두 명은 달아나 후일  백동호 씨가 교도소 복역 시 당시 684부대의 생존자를 "직접"만나  그것이 소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출발전 교전 중 사망이라는 2명에 해당된다.

 

13. 후기

사건 날 저녁 오후 7시 정래혁 국방부 장관과 김두만 공군 참모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방일 소대장(충주출신:영화 실미도에서 허준호 분)은 90년 준위로 예편하여 청주에서 냉난비 설비 업체인 유일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2005년 사망)

김이태 소대장은 사건 두 달 전 낙하산 부대 훈련차 이동하여 그 자리에 없었으며 보안사 근무 후 준위로 예편 현재 고향에서 이장을 보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이태 씨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책임의식이 투철한 "철저한 군인"이었다.

훈련병들이 교전 끝에 자폭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동정보다 훈련받은 대로 행한 그들의 행동에 우선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왔던 실미도 출신의 훈련담당 기간병과 교관들은 99년 소설 실미도가 출간되고  MBC TV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실미도 "편이 방영된 후 200년 3월 1일"실미 전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택시기사, 미술교사, 목수, 시장상인, 식당 운영, 건축업, 공무원 등 다양했다.

김이태 씨 포함 17명의 회원과 김순웅 교육대장(영화 속의 안성기)의 아들 김태영 씨가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소설가 백동호 씨는 회원으로 있다가 탈퇴했다.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18명의 장교와 기간병은 모두 적정한 보상을 받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추기:*김방일-본명 김상진

         충북 충주시 충인동 10번지에서 부친 김영암과 모친 김위술 사이에서 1945년 출생.

             형으로  김상희 , 동생인 상현(2008.2월 사망), 상수가 있다.

            김방일 씨는 2005년 5월 25일 오후 3시 청주 의료원에서 지병인 당뇨로 사망했다-형의 블로그에서 참조.

 

 

"영화 실미도"에서는 부대 창설의 당위성 부각이나 사망한 기간병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 없이 훈련병에 대해 피해자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훈련병에 의해 무고하게 죽은 기간병들 또한 피해자임이 분명하다.

당시 국가에서는 살아남은 기간병과 훈련병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었다.

전우회 회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병을 앓았으며 당시의 충격으로 사회생활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영화 상영 후 사회 분위기가 훈련병에게 동조적 입장이 되며 마치 자신들이 가해자로 몰리는 듯한 느낌으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영화에서  캐비닛에서 보관 , 잠자는 관련 보고 파일처럼 무의도 주민, 당시 기간병, 군 관계자 모두 잊고 싶은 사건을 영화가 다룸으로써 잊었던 상처를 건드렸다

특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꺼려하는 무의도 주민들에게는  지나간 일로 잊고 싶은 사건이다.

영화 실미도를 보면 실미도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린 긍정적 의미 외에 과거 정부 시절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무시되었던 암울했던 시절을 그림으로써  과거의 정부에 대해 흠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히 숨어 있음을 안다.

영화는 1.21 청와대 습격으로 죽은 민간인과 군경 30명과 부상당한 52명, 한나라의 국가 원수를 살해하려던  배경은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다.

좌파적 정권 아래 유행처럼 과거의 정권의 부끄럽고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도 흥미뿐 아니라 형평에 맞는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만  오랫동안 좋은 영화로 기억된다고 믿는다.

부끄럽거나 어둡거나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자화상이요 현대사다.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자는 누구인가.

민주주의, 자유, 인간의 권리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온몸을 던져 애국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 역으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국민들을 보살펴 주는 게 국가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실미도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차근차근 풀어가야 합니다"-김방일

김방일 씨가 당시 부대원을 정당하게 평가해 달라는 부탁처럼 우리가 실미도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올바른 시각이다.

실미도 사건 관련  소설은 "실미도"(백동호 지음-1999년)가 있고 영화로는  "실미도"(강우석 감독.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출연-2003년)가 있다.

영화 상영 후 " 실미도의 증언"(실미도의 생존자 김방일 증언-2004년)이 발간되었고 "충성의 섬 실미도"(이수광의 실화소설)가 뒤늦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