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가려던 월북자 최모씨가 아군의 사격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주 오래전 해안 부대에서 근무하던 서해안 군복무시절이 떠오른다.
인천 송도 동막에는 609해안 초소가 마지막으로 ,일개분대가 한 초소씩 맡아 해안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리 교대조가 방커에서 취침을 취하고 있던 새벽, 총알 볶는소리가 났다.
LMG (경기관총:2차대전,6.25때 사용하던 총기로 Caliber 50으로 부른다)소리에 우리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 나왓다.
드디어 간첩선이 출현했나 보다 생각하고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옆초소는 소속연대와 대대가 다른 부대였다.
순식간에 상황이 끝났다.
부대원들이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에서 시체를 꺼내왔다는데 몸이 아주 벌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로 윗동네 아저씨로 정신이 온전하지않아 몇년간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가 새벽 서너시쯤 왜 해안 철조망을 넘어 걷기 힘든 갯벌로 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초병이 어둠속에서 움직임을 포착하고 서라고 몇번 소리치자 바다쪽 갯벌로 도망쳐 경기관총으로 탄약 한통을(250발이다)다 쏘아 버렸다.
수상한 사람을 발견시에는 윗선에 보고 하고가 없던 시절이다.
저녁 8시부터 새벽6시까지 해안에서 움직이는 물체엔 우선 무조건 사격을 가하란 명령이 우리가 지켜야할 수칙이었다.
전에 울진 해변 백사장에 새까맣게 기어 오르던 무장 공비들을 향해 최초 발견자인 일병이 수칙대로 기관총으로 취약지대에 노출된 그들을 향해 사격했더라면 우리군이나 민간인이 나중에 크게 고생하지않고 피해도 적었을 것이다.
며칠후 한낮, 옆초소 상병이 사단에서 돌아오며 우리초소를 지나가게 되었다.
사단에서 표창장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궁금한 우리에게 그가 부상으로 받은 큰 봉투를 열어보이자 건빵만 여러봉지가 들어 있었다.
사단에서 예산은 없고 사병들 앞에서 시상시 무언가를 주어야겠고 건빵을 크게 포장하여 부상처럼 준 것이다.
표창장과 함께 진짜 부상인 일주일< 휴가증>를 받은 그를 우린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아야 했다.
표창장 내용은 다음 같았다.
< 야간 경계 근무 철저,사격술 우수>
그 달빛도 없던 어두운 새벽에 어떻게 그렇게 사격을 잘했는지 LMG 사수였던 나도 감탄스러웠다.
죽은자에겐 아무 책임도 없었다.
이번 임진강에서 굳이 사격을 했어야 했냐고 경고를 더 했으면 어떻했을까 하는 "적절성"여부를 묻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생명은 물론 소중하다
허나 군은 지침과 수칙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적이 공격하면 허락을 받아 반격해야하는 <바보같은 지도자가 있던 시대>가 아니다.
단지 이번 사건을 보며 밝은 대낮 오후 2시 15분 ,대대장의 지시 아래 30여명이 K-1.K-2,K-3로 집중 사격을 한 결과가 겨우 두발의 명중이라니 한심스럽다.
거리가 어느 정도 였는지 모르나 우리군의 사격술에 적이 실망스러울 뿐이다.
훈련받은 군인답게 좀 더 잘 쏠 수는 없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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