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27-8년전 아들과 딸. 창경궁 아니면 어린이 대공원에서.
6.25동란이 나자 내가 3살 때 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큰 조카들을 데리고 피난 가셨다.
어머니와 어린 3남매는 충북 영동읍에서 40리 떨어진 고향인 영동군 양산면으로 피난을 갔다.
어머니등에 업힌 나를 향해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떠나 셨다던데 헤어지던 아버님,어머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기억은 만세살 때 부터 가능하다하지 않는가.
다 들어서 아는 이야기다.
다만 영화의 몇장면처럼 머릿속에 잠재된 기억이 있다.
앞동산에서 어머니가 솔잎을 긁어 땔감을 모으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낮게 폭격기가 낮게 하강해 왔다.
나는 그 굉음에 놀라 평상시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소나무 밑으로 피해 무서워 울던 기억도 그중 하나다.
시골의 아버님 집에서 언덕길을 내려오면 지금도 남아 있는 멋진 느티나무 두그루가 있는앞쪽으로 기와로 된 작은 아버지 집이 있었다.
뜨럭위 툇마루에선 작은 어머니와 10여세 된 누이(하와이에 사는 사촌 누나다)가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먹고 싶은 마음에 한참 쳐다 보다가 어린 마음에도 쑥스러워 돌아오던 기억이 있다.
피난시절 ,세살 짜리 어린 조카가 왔으면 번쩍 안아 올려다가 입에 닭고기 한쪽 넣어줄 일이었다.
전쟁이 심해지자 십여리 떨어진 더 깊은 산골로 열흘 정도 피난을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도 한방을 쓰며 따로 밥을 해먹었는지 작은 어머니께서는 자기들끼리 닭을 사서 잡아 먹다가 고기 먹고 싶다고 보채는 어린 나에게 닭목아지 한개 주더라 했다.
나보다 3살 많은 누나의 기억이다.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부산서 피난 생활을 하며 열댓살된 큰집,작은 집 조카들을 데리고 고생하고 계실 때였다.
평상시 청주에 내려갈 때 자주 찾아 뵙고 후일 양로원과 노인 병원에 계시던 작은 어머님을 우리 내외가 찾아 뵙고 용돈도 드리고 하던 것은 의사로서 집안 주치의 역할을 하던 작은 어머님의 아들인 사촌 형님의 공이 크다.
암으로 돌아가신 사촌형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였다.
1988년 1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남자가 만 40세이상이면 여자의 나이 관계없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실시 되었다.
70년대에는 남녀 나이 합해120세이상이 되어야 가능했다.
그후 88올림픽을 전후하여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1987년 12월 한영 경제인 친선 협회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받은 적이 있었다.
행사의 마지막에 장미희씨가 뽑은 추첨에서 안사람이 1등으로 당첨되어 홍콩 왕복 티켓 두장을 얻었다.
88년 2월말, 주말과 노태우 대통령 취임일 ,삼일절 휴일과 하루 휴가를 보태 안사람과 홍콩에 다녀 오기로 했다.
초등학교 2학년과 4학년이던 딸과 아들을 누나집에 맡기고 떠났다.
지금은 아들까지 둔 가장이 된 아들은 낙지를 먹으면 가끔 그때 고모가 생각 난다고 했다.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낙지를 사준다고 잠실 먹자골목에 데려가 낙지를 모두 골라 형(두살위인 고종 사촌이다)에게만 주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형은 먹지도 않고 다 씹어서 뱉더라고 했다.
자기는 좋아하는 낙지를 먹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로서는 누나가 늦게 결혼하여 5년 만에 얻은 장손이라 조카에 대한 누나의 정성은 더 각별했다.
누나는 기억에 없다고 하나 서러움을 당해본 사람은 기억한다.
그래도 고모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냐, 고모같은 사람도 없다고 위로해도 아들의 유년시절 의 섭섭했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나보다.
요즈음도 낙지요리를 하는 날 아들내외가 주말 집에 와서 식사를 할 때는 아내는 나보다도 항상 아들 앞으로 낙지 볶음이나 데친 낙지접시를 놓아 준다.
많이 먹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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