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가 신형호선생의(1902-1946)의 생가로 고종 18년(1881년)에 지은 충청도 양반주택이다.
할머니에겐 시아버님이시다.
어머님의 기일을 맞아 고향 청주 가덕 공원묘지를 방문했다.
모기나 물것들을 대비 ,모기 벌레 퇴치제를 발주변에 뿌리고준비한 장갑을 끼고 부모님 합장한 묘의 잡초를 깨끗하게 뜯었다.
전에는 잔디 가위까지 가져와 손질을 해주고 찾아오지 않는 이웃산소까지 손을 보아 주었건만 이제 열정이 식어간다.
나이탓일까.
추석때가 되면 관리 사무소에서 대대적으로 벌초를 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9년,어머님이 돌아가신지 11년이다.
한여름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어머님 장례를 치루었섰다.
안사람이 준비한 빨간 장미꽃을 바쳤다.
늘 국화나 수수한 꽃을 준비하다 이번에는 화려한 꽃을 드리고 싶었다.
어머님을 위해 찬송가를 두곡 불러드렸다.
어머님은 생전에 좋아 하는 곡들을 찬송가 한쪽에 적어 놓으셨다.
별 말씀이 없이 알아서 불러달라는 묵언의 유언을 남기신 셈이다.
오늘 따라 찬송가를 부르는 동안 눈물이 맺힌다.
그리운 아버지,어머니.....
부모님 산소에 들리면 점심때가 된다.
그리 멀지 청주 낭성 (산성) 초입 "꽃피는 산골"의 음식이 정갈하고 시골 고추장 된장이 유난히 맛있었는데 돈을 벌더니 시내로 나가버려 아쉽다.
특히 청주는 고향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 먹기가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렇다.
가까운 곳의 "시골 밥상" 집이 대안이다.
차를 돌려 가는 동안 늘 안내판을 지나치던 신씨고택이 있어 한번 찾아 가보기로 했다.
대문안을 들여다 보니 지나던 아저씨가 저기 길가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주인이라며 손님 왔다고 전하자 지팽이를 짚은 할머니께서 들어 오라며 안내를 하셨다.
집만 둘러보고 가려 했는데 방으로 들어오라기에 대청에 올라 방안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너무 곱게 늙어 피부가 맑았고 우아할 정도로 고왔다.
집은 건너방과 대청이 있고 ,안방에는 정방형 방이 4개가 미닫이를 사이를 두고 있었다.
새댁였던 송씨 할머니께서서는 대청 건너 큰방을 혼자 쓰셨고 시어머니 와 과부된 집안 여자들이 사용했다는 미닫이로 구분된 독립된 방이 특이한 구조다.
미닫이 문들은 집을 오래 비워둔 사이 문들을 훔쳐가 버렸다 했다.
송씨 할머니께서는 군산에서 청주 가덕 신씨집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사랑채와 행랑채와 곡간이 있었는데 왜놈들이 불을 질러 소실되고 지금 남은 것은 안채뿐이라고 하셨다.
커피를 대접하신다기에 안사람이 거들려고 하자 당신이 해야 한다며 손수 물을 끓여 타주신다.
방 하나에는 침대가 있고 뒤곁을 접한 방에는 냉장고와 이인용 식탁을 놓았고 벽에는 예수님 의 십자가 가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의 사진들과 바닷가에 찍은 사진이 있었다
딸이 사는 LA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라며 딸이 바닷물에 손을 담구어보라며 이물이 우리나라와 맞닿는 바다라고 일러주더라고 회상에 잠기셨다.
얘기중에 할머니 나이를 맞추어 보라하셨다.
아무리 고와도 연세가 워낙있어 보여 90세정도 되지 않으셨냐고 하자 94살이라고 하신다.
할머니 얘기를 듣는다.
결혼 하여 아들 둘,딸둘을 낳았으나 신씨 집안의 내력인지 家運인지 시아버지,남편 , 아들둘 모두 단명하고 말았다고 했다.
남아 있는 딸이 둘로 한분은 LA에 살고 ,한분은 서울에 사는데 70이 넘었다고 했다.
서울딸이 잘해주고 함께 살수 있으나 고향을 지키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가끔 손자가 들려 식수를 사다주고 냉장고를 채워주고 들여다 보는 모양이다.
혼자 주무시다 돌아가시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니 돌아가신후 며칠간 아무도 모르면 어떻하나.
복지과 직원이 알아서 가끔 찾아오고 반찬도 가져다 준다고 했다.
돈은 나라에서 받으시냐고 물었더니 통장에 매달 들어오는 데 찾아 쓸일이 없으신다고 했다.
94세의 나이에 구사 하시는 어휘력이대단하신 걸 보면 젊은 시절 많이 배우신 분이 틀림없다.
나이를 염려 성당에서 나가지 못하는 대신 신부님이 한달에 한번 직접 방문해 준다고 했다.
부모님 산소에 들렸다 가는 길이라고 했건만 할머니께선 혹 실례지만 두분이 어떤 사이냐고 물으셨다.
그날 따라 처음 으로 앞머리 흰 머리를 감추느라 염색약을 사다가 염색을 한 안사람이훨씬 젊게 보였나보다.
결혼한지 33년 된 부부라고 하였더니 장가 참 잘갔다고 하셨다.
전화하면 식사 배달 온다고 점심 사줄터이니 먹고 가라는 할머니.
그럴순 없어 서울 올라가야 된다고 일어나 앞마당에서 대문까지 할머니의 크지 않은 소박한 정원을 구경했다.
안사람이 오랫만에 보는 꽈리를 보고 탄성을 지르자 두말없이 그중에 한가지를 꺽어 주신다.
주렁주렁 달린 붉은 꽈리.
다음에 산소에 들릴때 맛있는 것 사가지고 들리겠다고 약속하고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실제 그럴셈이다.
편안한 삶속에서도 외로움은 짙게 드리운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친척처럼 환대를 해주신 할머니.
한사람 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살아계셨으면 91세가 되셨을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기미년 동갑으로 생존해 계신 장모님을 다시 생각한다.
시간이 좀 지나 한가한 시골 밥상집 ,내가 좋아하는 매콤한 장떡과 시골된장,된장국이 맛있는 집.
당기시오(PULL)대신 충청도 사투리 "땡겨유".
사투리 시리즈중 충청도 버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보신탕 잡수십니까(개혀?)돌아가셨습니다(갔슈)
'살아온,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자와 예방주사 (0) | 2009.08.17 |
---|---|
인도네시아 커피 (0) | 2009.08.17 |
두이와 퍼즐 (0) | 2009.07.23 |
"두이 "를 보내고. (0) | 2009.07.13 |
남주기 아까운 그녀 (0) | 2009.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