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의 추억

하숙집의 추억(8)-하숙집 조카 딸

Jay.B.Lee 2008. 12. 30. 10:55

그녀를 처음 본것은 76년 하숙집 에서다.

지금은 아름다운 펜션이 많고 긴다리가 육지와 연결된  충청남도의  섬  "안면도"에서 올라온 하숙집 아주머니의 조카 딸"S"였다.

안면도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온 조카딸도 가끔 하숙집에 놀러와 아주머니를 도와주고 가곤 했다,

키가크고 말라깽이 처럼 보이는 조카딸은 갓 여학교를 졸업한 아이같지 않게 아주 의젓했다.

맑은 목소리 ,영리해 보이는 눈과 약간 얼굴의 광대뼈가 나온 S는 시골 처녀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재치가 있었으며  조숙했다.

나는 76년 10월 결혼을 하여 하숙집을 떠났다.

회사는 그동안 사옥을 서소문에서 광화문으로 ,79년엔 광화문에서 계동 휘문 고등학교교사로 옮겨  왔다.

어느 날 인사로 친구부터   회사 자체로 여직원 몇명을 채용한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상업학교 출신이 아니어도 시험을 칠수 있냐고 물었다.

인문 고교에 주산 ,부기 다 자격증은 있다고 토를 달았다.

며칠전 누님의 집에 들려오며 잠시 들린 하숙집에서만난  아주머니의 조카 딸이 생각나서였다.

최근 다니던 작은 회사를 그만두었다며 풀이 푹 죽어 있던 조카 딸이다.

하숙집에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물었다.

전화 놓기 어려운 시절,전화번호 대신 주소를 받았다.

나는 지급으로 전보를 쳐 회사로 긴급히 전화 할것을 통보했다. 전화온 조카 딸에게 제출서류를 알려주고 며칠후 서류 전형이 통과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험날 필기 시험중 너무 긴장하여 3시간째 갑작스런 복통으로 시험을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녀.

 포기하고 있다가 면접하러 오라는 통보가 믿기지 않았나 보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재정부의 부장님은 고교 10년 선배로, 인사과 친구에게서  면접 위원으로 선발 되었단 얘기를 들었다.

"부장님,저의 집안 조카가 이번에 시험을 봅니다."

"알았어. 누구라고?"

이 한마디로 그녀는 회사에 합격하였고 작은 회사와 비교도 안되는 큰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니다.

선배님게 부탁 할 때는 상업 여상을 나오지 않았어도 인물도 좋고 총기가 있어 일을 잘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여직원들은 모두 판매부서로 배정이 되었는데  판매 기획과장인  판매 인사담당에게 조카라고 본사에 근무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군대를 면제받은 관계로 과장의 위치에 있었으며 나의 고교 동창들과 동향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 부탁대로 본사 판매기획부에 근무하게 되었고 나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가끔 슬쩍 묻곤 했다. 

 아주 일을 잘한다고들 하여  그녀를 취직시킨 나로서도 무척 흐믓했다.

위기가 찾아온 것은 일년 정도 지나서다.

그녀가 3일째 무단 결근 하고 있고 그것도 오후 근무중 옷도 놔두고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아저씨 된다고 혹시 나에게 거처를 아냐고 물어왔을 때보다 그녀의 부서장님이 당장 모가지 자르라고 펄펄 뛰었다는 얘기에 너무 당혹 스러웠다.

4일째 그녀가 회사에 나타났던 날  기획 담당 과장이 잘 말씀을 드려주었고  화가 난 부장님은 내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자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해고라는 다짐을 받고 화를 풀었다.

그 부장님은 교통부에 근무하다 오신분으로   내가 교통부에 근무하셨던 숙부의 조카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이 그녀를 내쫓지 않은 사유일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결근 사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던  전의 하숙생-내가 하숙하던 시절 본 친구다-을 만나 그 남자가 무서워 줄행낭을 쳤다고 했다.

다시 이런일이 있으면 나도 더 보호해줄수가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여러가지로 신세졌다고 생각하셨는지 하숙집 아주머니와 조카딸"S"의 어머니가 나의 둘째 딸을 위해 금반지를 사가지고 잠실까지 다녀간 기억이 난다.

반년후그녀가 영업소로  발령 받아 나가기전 동료 여직원의 소개로 미팅에서 남자를 만났다.

제주사람으로 서울대 대학원 학생이었다.

그들이 결혼 한다고 나에게 인사를 왔다.

학생신분으로 결혼하는 그들을 위해 나는 마지막 봉사를 해주기로 했다.

식장은 한국일보 빌딩의 결혼식장이었다.

신부 화장은 신라호텔 미용실이어서 호텔에서 결혼식장까지,결혼식이 끝난후 김포공항까지 차가 귀하던 시절  내가 차를 운전해주기로 했다.

회사차를 가져온 내가 그녀를 직접 호텔 에 픽업하러 갔을 때 그녀는 잘 닦아 놓은승용차 노란 "포니"에겐 과분하게 아름다웠다.

김포 공항에서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나의 마지막 봉사(?)를 끝냈다.

 

오랫만에 연락한 하숙집아주머니에게서 그들이 강원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외주재하며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집중하다보니 연락처와 소식이 많이 두절되었었다.)

그녀의 남편은 강원도 W시에 있는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1999년이다. .기회를 만들어  나는  안사람과 함께 w시를 방문했다.

20년만의 해후였다.

이미 교수와 교수부인이 되어 행복해 보이는 중년이 되어버린 그들.

 딸,아들의 두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자녀들은 전국 수학 경시대회1,2등을 차지 할만큼 영재였다.

그네들은 나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내가 회사에 입사시키지 않았으면,  동료직원의 미팅 소개도 없고, 서로를 만날 확율은 전무했다는 이론이다.

비행기를 타고 안타고에 따라 추락사하고 안하고의 운명론 같은거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숙집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열심히 일했던 모습,그녀의 재치있는 총기가 서울대학원생을 사로 잡기까지 모두 그녀의 재능,그녀의 노력,무엇보다 그녀의 복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는 당시의 관습에 도전,성북동 회사 사장님과 사모님을 찾아가 남편이 학생이라 더 근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

또 결혼하면 그만 두어야 하는 당시 인사 관례의 부당성을 지적해 인사부장을  무척 난처하게 하였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후  타 회사에 앞서서 회사에서는 여직원이 결혼후에도  회사를 다닐수 있도록 인사방침이 바뀌었다.

과거  미국 유학하셨던 사장님의 철학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가 이부서 저부서 괴롭히고 사장님 사모님까지의 독대가 계기가 되었슴은 부인 할수 없다.

자기 삶을 열심으로 개척해간  하숙집 아주머니 조카딸 S와 그녀의 남편B교수.

지금도 나는 하숙집으로 부터 이어져 하나로 맺어진 인연이란 끈의 한 끝자락을 잡고  서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