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의 추억

하숙집의 추억(9)-그녀,나의 아내

Jay.B.Lee 2008. 12. 30. 22:53

갈월동 쌍굴다리를 지나  길을 건너 100여 미터 올라가면  제주 약국이 보인다.

"제주 약국을 보고 우측으로 돌면 왼쪽에 '원소아과' 간판이 보이고 그 골목길을 조금 더 따라 올라가면 우리 집이 있다.."

마해송 선생님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동화작가 강소천 선생님이 청파동  자택이 있던 동네를 묘사하며 그렇게 썼다.

"원 소아과"는 작은 어머니께서   30여 년 넘게 청파동에서 병원을 여셨던 곳이라 우연히 읽은 글을 기억한다.

80년대 중반 암으로 돌아가신 뒤에도 빈 집에 간판이 쓸쓸히 매달려 있었다.

안채의 작은 아버님을 뵈려면 대문 안으로 손을 넣어 밖에서 보이지 않게 달려있는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숙집에 가는 도중 종종 들려 숙부님과 얘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숙대 앞 길로 슬슬 걸어 올라가면 손바닥만 한 가게들이 죽 늘어서있었다.

지금 안사람이 된 그녀를  만나 가끔 언덕길을 올라 가면 숙대 정문 부근에서  왼쪽으로  성당이 있었고 골목길을 이리저리로 내려오면 외인 아파트로 오게 되었다.

5월이면 당시 다른 곳에는 흔치 않던 라일락에서 풍기는 꽃향기가 어두운  골목에 내려앉아 가능하면 천천히 걷고 싶던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발을 밟은 큰 남자와 인연이 되어 결혼한 안사람 친구와  달리 나는 나의 아내를  버스에서 만났다.

아니 내가 버스에서 보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퇴근하기 위해 57번 버스를 탄 날이다.

버스가  숙대 앞을  지날 때 당시 긴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건너편에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는 처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Dark blue 스커트에 노란색 바탕에  파란 체크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단아한 옆모습을 훔쳐보듯  보며 뭔가 가슴이  철렁했다.

후일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의 운명이었던 거다.

그녀는 뜻밖에도 외인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 내가 내릴 곳에 먼저 내렸다.

금양 국민학교 아랫길로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내 가슴이 갑자기 쿵쿵 뛰었다.

"그래 따라가는 거야.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 것이라고"

"아니 , 나이가 몇인데 여자를 따라가냐"

그녀는 멀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빨리 쫓아가 이 바보야"

누가 등 뒤에서 떠미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는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어느 집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빨리 말이라도 걸었어야지 하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 집 문을 바라보며 몇 분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기적처럼  그녀가 다시 나와 오던 길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망서릴 수  없었다.

그녀를 뒤 따라간 나는 말을 걸었다.

"저기요. 버스에서 보았는 데요."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한번 만나고 싶은 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시간이 있으실  때 한번 전화 주시겠어요"하며 회사 명함을 주더란다.

아내가 기억하는 첫 만남의 대화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지금 시간 있냐 혹은 다음 며칠 후 약속을 강요하여 퇴자를 맞는 것보다 명함을 주고 나의 신분을 확인하게 한 다음 나의 운을 걸고 싶었다.

대기업의 명함 한 장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지금 생각해도 퍽 대담한 작전(?)이었다.

명함을 거절하지 않고  그녀는 받아 넣었다.

며칠이 지나도 전화가 없어 후회막급이 되었다.

그날 한번 약속을 잡아 보던지 전화 연락처라도 받아 놓던지, 이름도 모르면서  뭐 잘났다고 명함을 주어 운을 걸어본다고?

금요일 오후, 회사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받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저 지난번 명함 주시면서 전화해달라고 했잖아요"

"아, 네~"

그 순간의 기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저녁  설레는 마음으로 명동 약속 장소에 나간 날, 밝은 분홍색에 긴 흰 줄이 간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같은 이 씨. 그러나 한산 이 씨였다.

동성동본이 아니 것에 감사했다.

내가 친구에게 소개해준 처녀가 있었는데 동성동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 명함을 주던 날 웃던 내 하얀 이가 마음에 들었고 사람이 선해 보였다고 했다.(결혼 후 독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속았다 했다)

그녀는 자기의 이가 안 좋아  내 고른 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뛰는 가슴으로 인해  나는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7년 전  입대 후 깨져버린 첫사랑 이후  모든 감정은 메말라버려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내 가슴에 다시 불을 지펴준 준 여자다.

그러한 연정의 감정이 불길이 되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늦봄이, 여름이 갔고 가을을 보냈다.

그 해 겨울 12월 , 명동 다방에서 만난  그녀는 내게 편지를 주고 황급히 떠났다.

편지를 받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나간 후 다방에서 나는 두장으로 쓰인 그녀의 작별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도 결별의 구체적 사유를 알 수 없었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의 내가 어린 그녀에겐 부담이었을까 하는 짐작뿐이었다.

흔히 연인들은 겨울에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해 연말은 쓸쓸했고 다음 해 75년은 나에겐 긴 방황의 시간이었다.

여자를 소개받기도 했고 내가 찾아도 보았다.

하숙집 둘째 딸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하숙집 아주머니는 은근히  나 같은 사람 사윗감으로 어디다 내놓아도 좋다고 간접적으로 의중을 내비치지 않았던가.

나의 반쪽, 나의 허전한 빈 마음을 채워줄 동반자를  찾던 1년이었다.

누구도 내 마음을 주었던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1975년 12월 , 지나간 1년이란 시간 동안  그녀의 생각이 변하였기를 기대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도박이란  기분으로 다시 그녀를 찾았다.

12월은 연인들이 헤어지면 너무 쓸쓸한 추운 계절이다.

 그러면서도 쓸쓸히 한 해를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에겐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간절한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나를 만나준 그녀는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는  사람처럼 반겨주었고 우리는 정말 "새해"를 맞았다.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나와의 결혼을 암시적으로 묵계했고  요즈음처럼 따로 특별한 프러포즈를 한 기억도 없다.

76년 9월 초  함께 살 잠실 3단지에 다녀온 어느 토요일  나는  내가 하숙집에서 어떻게 사는지 몹시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하숙집 방 구경을 시켜준다며 2층 내방으로 안내했다.

신입 사원 시절과 달리 너무 아낄 필요 없어 후일 미국으로 이민 간 룸메이트와는 나중에 각각 독방을 사용했었다

그녀와 함께 유리창 너머로 머지않아 떠날 효창동 동네를 내려다 보 며 얘기하는 동안 느닷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하숙집 아주머니.

평상시와 달리 얼굴이 하얗게 된 하숙집 아주머니 뒤에는 <이달조 선생 > 부인이 서있었다. 

아주머니의 비서며 정보통이었던 "이달조(부인이 남편을 부르는 별칭:쪼다리를  거꾸로 부르는 악처) 선생" 부인이 이층 방 내가 아가씨를 하나 데려왔다고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라도 나를 사위 삼고 싶어 했다면 실망을 하게 된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죄송할 뿐이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곧 결혼할 여자라고 그녀를 인사시켰다.

76년 10월 , 결혼 며칠 전  나는 효창동을 떠났다.

그 후 누님이 효창동에 남아 사셨던 관계로  효창동 갈 때  몇 번 안사람과 하숙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때마다 하숙생 중 "틀림없었던 사람'이라고 안사람 앞에서 낯간지럽게 내 칭찬을 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도 어떻게 참한 색시를 만났냐고 하는 인사치레라도 아내 칭찬이 한마디도 없었다.

 둘째 딸의 사위로 삼지 못한 앙금이 남아있었나 보다.

아내는 왜 내가 하숙집을 찾아가는지 이유를 알겠다고 슬슬 놀려댔다.

아주머니는 과일을 깎아도 포크로 찍은 과일을 내 손에만 쥐어주어 아내는 늘 자기가  먹어야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경상도 분이긴 했지만.

 결혼 직후 청파동이 본적지였던 안사람의 처가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누님도 효창동에서  강남으로 옮겼다.

작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청파동 병원을 닫은 사촌동생까지 작은 아버지를 모시고 강남으로 모두 이사를 해버린 후 우리는 더 이상 청파동, 효창동에 갈 일이 없어졌다.

3년 전 안사람과 날씨 좋은 날을 택해 안사람이 학창 시절을 보낸 청파동 효창동 일대를 거닐며 안사람에게 추억의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효창 공원, 운동장을 제외하면 너무 변해버렸다.

 변해 버린 골목을 걷다가  안사람은  어릴 때의 친구 가게를  방문하고 친구의 여동생에게서 모든 가족이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떠났고 또 떠날 것이다.

앞집이 없어져  간신히 찾아 간 하숙집엔 나이 든 아주머니가 혼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88년 북미로 가기 전 방문했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나.

 이제는 백발이 되어버린 아주머니.

 떠난 아들 딸 , 사위 손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오래전  천주교에 귀의,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아주머니의 집은 '기도의 집'으로 불렸고  안방에는 커다란 마리아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효창동  외인 아파트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오르던 언덕길이 보인다. 

하숙집 철문을 열고 안채에 들어서면 시끌 버끌 했던 하숙집 안방이며 하숙집 딸과 아들들, 생각날 듯 스쳤던 하숙생들의 얼굴들.

3년을 보낸 효창동과 하숙집.

그곳엔 나의 젊음 , 나의 청춘, 나의 사랑이 내 삶의 한 단원이 되어  효창동 골목길의 라일락 향기의 여운처럼 아스라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주) 안사람 이야기를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얘기를 끼워 넣어야 마무리가 될 것 같아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는 쑥스러운 얘기의 일부를 글로 남겨봅니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가운데  나에게 준 그 순간의 기쁨들이  쑥스러움에 대해  충분히 보상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