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1968년1.21 청와대 습격사건

Jay.B.Lee 2008. 10. 30. 19:20

68년 1월 21일  124부대가 산등성이를 타고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날.

보통 1.21 사태라고 말하는 <'68.1.21 청와대 습격사건 >을 정리해 보았다.

69년 초  대전에서 머리를 깎고 논산 훈련소로 입대 시 전쟁이 언제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A. 사건의 개요.

 

북한의 무장공비단 124부대가 1968.1월 16일 개성을 출발.

17일 밤 8시 미 2사단 지역 철책선을 통과하여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인원은 31명으로 개인당 기관단총, 소련제 TT권총, 방어용 수류탄 10발, 실탄 300발과 단도로 무장하였으며 대전차 수류탄 2발도 지참했다

침투 루트는 파평산-삼봉산-북노 고산-앵무봉-남노 고산-북한산 비봉을 거쳐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5개 조로 나누어 1개 조는 2층을 습격 ,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며 모든 작전은 5분 내로 끝낸다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그들이었다.

그들은 1월 19일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 삼봉산에서 나무하던 우 씨4형제와 조우,그들을 4시간이나 억류했다.

천현면 초리동 우씨 집성촌에 거주하던 우철제(21) 우성제(20)는  6 촌간이었고 우희제, 우경제는 형제간이었다.

무장 공비들은 영하 15도의 날씨에 나무를 하러 온 어리숙하고 불쌍해 보이는 형제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 남하하는 도중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발각되면 무조건 죽인다는 원칙"을 어기고 투표를 통해 살려 보내고 만다.

나중에 실수를 깨달은 그들은 124부대 본부에 임무수행 여부를 타전하였다.

그네들은 응답받은 무전을 해독할 수 없어 계획대로 임무를 수행하기로 하고 남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19일 오후 8시경 4형제는 3.5킬로 떨어진 천현면 지서로 달려가 공비 출몰 신고를 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보고 받은 이각현 서대문 경찰서장은 자하문 고갯길에서 그들을 발견, 정체를 물었으나  방첩 훈련 후 돌아간다는 군인들의 위세에 눌려 보내주고 말았다.

무장공비들이 자하문 고개를 넘어 임시 검문소에서 박태안 , 정종수 형사에게 또다시 검문을 당하자 수적으로 열세인 형사들은 공비임을 직감하고 종로 서장에게 괴한의 출현을 보고했다.

그들은 공비들을  따라가 가로막고 신분증을 요구하다 대열의 맨 끝 김춘식에게 말을 붙여 대열에서 떨어지게 했다.(21일 밤 10시 5분경)

이때 최규식 종로 경찰서장은 지프차를 타고 올라오며 권총을 뽑아 들고 소속을 밝히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지프차의 헤드 라이트가 환히 비추고 청와대 쪽의 군인 발자국 소리를 나무꾼 신고로 국군들이 접근해 오는 것으로 착각한 공비들은 작전을 개시했다.

최 서장은 공비가 쏜 기관단총에 세발을 맞고 절명했다.( 21일 밤 10시 15분경)

공비 한 명은 종로서 형사의 사격으로 쓰러지고 맨 뒤 박,정 형사는 김춘식(그날 밤 치안국에서 조사 받던중 자폭)을 돌로 내리친후 제압, 수갑을 채웠다.

이를 본 공비들은 도주하며 형사들에게 사격을 가해 정형사는 총을 맞았다 (정형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 마침 자하문을 올라오는 시내버스 불빛을 보고 국군 출동으로 착각하여  버스를 향해 수류탄 세발을 던져 중학생 1명과 회사원 1명이 숨졌다.

이때 총성이 들리자 청와대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수경사 대대(대대장 전두환 중령, 작전주임 장세동 소령))병력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페닉 상태가 된 공비들은 도주하기 시작, 일부는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뒤편 북악산을 타고 도주했고  일부는 경복고 뒷담을 넘었다.

공비들과 본격적인 교전을 벌인 곳은 세검정과 청와대 뒤 북악산 일대였다.

1월 21일에는 최 서장과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1월 22일 오전 5명의 공비가 사살되었다.

김신조는 1월 22일 새벽 인왕산 기슭에서 생포되었다.

1월 23일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되었고 그 후 노고산, 포천, 파주 등지에 출현한 공비들과 교전 , 5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동안 아군은 13명이 전사했다.

1월 31일까지 계속된 소탕 작전으로 31명 중 총 26명이 사살되었고 한 명은 자폭, 김신조는 생포되었고 2월 중순 양주에서 공비 시체 한구가 발견되었다.

남은 두 명은 휴전선을 넘어 이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 습격 사건으로 우리 측은 민간인 포함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했다.

 

 

 B. 본인이 본 작전 실패의 원인.

그네들은 무엇보다 훈련시" 남하 도중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발각되면 무조건 죽인다는 원칙"을 자신들이 스스로 어긴 탓이다.

남조선에 가면 모두 거지처럼 살고 있다는 평소 그네들의 사상교육이 오히려  영하 15도의 날씨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여 살려 보내게 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훈련이란 산악, 사격훈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상적 철학적 훈련도 필요한 것인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서양의 속담을 접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자라고 훈련받은 젊은이들이 어줍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민주주의의 대표적 장점인 투표를 했다는 것이 또한 실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속담을 들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30킬로의 군장을 한채 밤에 아무리 산악을 타는 훈련을 했어도 청와대를 습격 , 결국 사람들을 죽인다는 데에 대해 심리적 불안감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정신무장을 시키지 못하고 보낸 124부대의 실수다.

철저히 훈련을 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우 씨 형제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의 철저한 반공의식과 간첩신고에 막대한 상금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테러 작전에 있어서도  124부대는 평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잠재해 있어서다.

인원이 많으면 서로 지원을 받아 작전이 성공 전할 것이란 생각은 우둔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인원이 많으면 발각되기 쉽고 행동 통일에 지장을 주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실수는 120명을 보낸 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똑똑한 애들 셋만 데리고 와"궁정동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우리가 경험한  강직한 장군, 김재규의 발언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중국이 한국 축구를 이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장 공비들에겐 강력한 리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로 경찰서 형사들 둘을 보고도 처지하지 못한 것 또한 실수다.

우 씨 형제 생사 여부를 투표로 부치게 한 것이나 자하문에서 시내버스를 국군 출동으로 착각하고 한 명이 죽는 것으로 순간에 지휘부가 무너지고 도주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결국 그넨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잘하는 것이라곤 30킬로 군장으로 야간에 산악을 시간당 10킬로에 주파하는 능력뿐으로 보인다.

"국방군 동무들이 비행기로도 못 쫓아오게 만들겠다"라고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는 데 그네들은  허풍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아군 측은 신고를 받고도 해병대 행군 속도를 감안해 서울에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외곽에 6군단 예비사단을  배치한 것은 아군 작전상 최대 실수다.

(당시 해병 전투 여단장이었던 김성은 국방장관 회고)

신고받았을 때 공비들의 인원으로 보아 그네들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간파했어야 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경찰들은  한두 명의 간첩 체포하듯 경계령 속에서도, 세명이 충분한 화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검문에 나섰다는 것이 너무 안일했다.

수갑 하나만 달랑 차고 검문에 임한 무지함이란 그 시대나 가능하다.

당시 영화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가 있었더라면 한 수 배울 수 있었을 터이다.

최고 주파 속도에 플러스알파를 감안, 지역을 넓게 봉쇄하는 혜안이 필요했다.

자기중심적 사고란 국가나, 사회나, 기업을 얼마나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청와대 습격이 실패한 것은 대한민국의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우 씨 형제들 이종 갓집에 달려가 어른들과 상의한 뒤 함께한 신고가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그네들의 공로란 크게 칭찬받아 마땅하다.

또한 최규식 총경, 박태안, 정형수 형사 등은 모두 일등공신들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이다.

세월이 지나도 궁금한 것은 북한의 당시 124부대 작전 책임자들은 어떤 평가와 상벌을 받았을까.

 

 

C. 후기

 

무장공비 신고로 제일의 공로자가 된 우 씨 형제들 중 우철제 씨는 고향 삼봉산에 살고 있으며 우성제 씨는 군 복무 후 경찰에 투신 파주 경찰서에 근무했다. 

우희제 씨는 사망했고 우경제씨는 인천에 산다.

김춘식을 맨손으로 잡은 박태안 형사는 파주 보안과장으로 근무도 하다 은퇴했다.

 연대 철학과 재학 중 1950.6.25가 터지자 입대, 군정관으로 근무 중 5.16 후 경찰에 특채 종로 서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최규식 총경(당시 38세)의 부인 유 씨는 서른다섯에 미망인이 되어 재혼하지 않은 채 남겨진 1남 3녀를 잘 양육하였다.

지금도 자하문 고갯길에는 최 총경의 순직을 기리는 동상이 서있다.

1.21 사태는 국가 안보를 고려하는 계기가 되어 1968.4월 1일 상비군에 이어 250만의 예비군을 조직함으로써 북한과 전력 경쟁에 기여했다.

  예비군을 통한 효율적인 조직은 산업발전에도 기여했으며  많은 예비 위, 영관급 장교들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장발족들이 머리를 깎이는 등 수모를 당하고 , 훈련 면제 조건으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국가 산아 제한 정책에 이바지 한 점은 이제 생각하면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체포된 후 "박정희 목을 따러 왔어요"라고 섬찟한 말을 내뱉었던 김신조는 군 복무시 우리 사단을 방문하였다.

 강연 도중  본인들(무장공비)로 인해 군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된 것에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 했다.

복무기간이 30개월에서 36개월로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김신조는 남의 목숨을 빼앗던 무장공비에서 전도사로 목회자로 변신했다.

 새 삶을 찾아 이제는 남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김신조는 분단된 조국과 이념 아래 희생된 삶을 살았다

 사실 아무런 선택권 없이 이북에서 태어난  20대 청년을 어떻게 비난하랴.

 그 후 김신조 목사는 우씨 형제들과  왕래하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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