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23일 33사단 102연대 2대대 6중대 소속으로 야간 해안 경계근무를 마치고 오전 취침후 잠이 깰 12시경 통신병 이상병이 "괴한 출현 비상"을 외쳤다.
순식간에 전소대원이 군복을 입고 탄약고로 달려가 실탄을 집어들고 중대 입구 언덕길을 쫓아 내려갔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605초소 옆 소대 분대원들이 "실탄 !실탄! "하며 중대 언덕길을 달려 오고 있었다.
인천 송도로 들어 오는 택시를 모두 세운 후 영문도 모르는 승객들을 내리게 하고 택시를 타고 경인 간 고속도로를 차단 차들을 서행 시킨후 차에 올라 국군 복장을 한 괴한들을 찾기 시작했다.(지금 생각해보니 도화 IC부근이 아닌가 싶다)
즉시 대응토록 총의 잠금쇠는 풀어놓았으며 M16 약실에는 실탄이 장전 되어 있었고 손가락은 방아쇠에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내가 근무했던 인천 송도 부근 해안 경비부대(*33사단 102연대 2대대 6중대)를 통과했다.
그들을 추격하여 쫓던 우리부대를 앞지른 버스가 경인 가도를 달려 대방동 유한 양행앞에서 기둥을 받아 멈추기까지 뒤늦게 "실미도 부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자료들을 취합하여 <정리>해보고 싶었다.
영화 "실미도"를 본후 더욱 마음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33사단은 해체되었던 얘기를 얼마전 들었다.
33사단은 33숫자 마크가 번개모양 처럼 생겼었다.
1.부대 편성의 배경
1968년년 1월21일 새벽 북한의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으로 대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 조치를 하기위해 특수부대 창설을 명했다.
창설 주역으로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철희 제1국장이 맡아 "인간병기"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부대 명칭은 실미도 부대,68년 4월 창설된 특수부대라하여 "684부대"라 불렀다.
혹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라고도 했다.
훈련은 공군 특수부대인 2325부대(209파견대)가 담당키로 하였다.
2.훈련을 위한 기간병의 구성
공군 2325부대에서공작원을 훈련시킬 적임자로 특수 훈련과 낙하 훈련을 받은 "강인한 군인" 김이태 중사(23세,당시하사) 가 중앙정보부에 선발되었다.
그의 임무는 적지에 떨어진 조정사를 구출해오는 특수업무로 처음부터 684 부대 창설및 전 훈련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주요 순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실미도에서는 "김빈'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특수 훈련을 받아 북한에 갔다온 일부 기간병과 기본 훈련을 받은 상당수 기간병이 차출되었다.
소대장들은 모두 중사로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다른 소대장으로 김방일씨(당시 실제계급 중사,영화 속 허준호))로 김이태 소대장과는 동기이기도 하다.
김방일 소대장은 실미도 사건 발생 하루전 실미도 교육대장과 인천으로 나왔다가 약혼녀와 친척들이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일단 배를 탔다가 교육대장의 배려로 하루 외박허가를 얻어 극적으로 살았다.
실미도 사건 발생후 영화에서처럼 대방동 총격전 현장으로 달려 가지 않고 실미도에 들어가 사체 수습및 건물 폭파등 뒷처리를 했다.
3.훈련병의 구성
훈련병은 3개소대(1소대"10명)로 구성하였으며 북한의 124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조직했다.
훈련병들은 교육을 시키는 기간병들이 공군인지도 몰랐고 군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소대장 김이태씨에 의하면 1968년 4월부터 3년 넘게 훈련을 시키는 동안 그들의 성장 배경을 묻지 않아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 절반 가량은 죄없이 차출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살인을 저지른 죄수도 있었으나 (김이태 증언)영화처럼 사형수나 무기수로 이루어진 것으로 만은 아니었다.
옥천에서 동시에 실종된 7명중의 청년중 5명의 명단이 훈련병 명단과 일치했으며 당시 공군 감찰관으로 난동사건 수사를 맡았던 김중만(전 청와대 비서실장)씨의 방송 인터뷰 증언도 이를 뒷바침한다 .
"훈련병 31명중 사형수나 무기수등 범죄자는 한명도 없었다"-김중만
그러나 소설 실미도 저자 백동호씨는 "분명 사형수가 있었고 그 사람을 내가 교도소에서 만났고 당시 684부대는 국가적 비밀사항이어서 파헤칠수 없었고 김중권씨도 마찬가지다"라고 반박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는 같은 방송에서"북에가서 일정 임무를 수행하면 사면해 준다는 조건으로 무기수등을 모집해 훈련을 시킨 것으로 안다"고 상반된 주장을 폈다.
소대장였던 김방일씨는 "훈련병 가운데 강도나 깡패 출신도 있었지만 일반인도 상당수 있었다"며 모두가 범죄자였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한다.
사형수나 무기수라는 얘기는 흔히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다(예: 지옥의 특전대-찰손 부론손,리 마빈 주연)
훈련병의 평균 연령은 30세로 제일 어린 21세와 최고령38세까지 있었다.
훈련병들에겐 북한에 넘어가지 않으면 죽는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김이태씨는 밝혔다.
4.훈련장소
실미도는 인천항에서 20키로 떨어져 있는 인천 영흥도 남쪽 " 무의도"(무희가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舞依로 지어짐) 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썰물때는 무의도와 갯벌로 이어져 무의도와 한몸을 이루는 섬이다.
현재는 무의도엔 2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당시 인근 성갑도,덕적도,서곶에도 북파를 위한 특수부대들이 있었다고 한다.
5.부대 주요 시설 현황
교육대장숙소,기간병 막사,휴게실(운동기구및 당구대),취사장,훈련병 막사,창고,무기고,통신실,연병장,모래밭,우물,평양모형,,발전소,훈련병 화장실,기간병 화장실
그리고 유격장,도강하강 훈련장이 막사 북편에 위치하고 수류탄 훈련장과 폭파 훈련장은 산악 훈련 코스넘어 동편에 위치했다.
막사 서편 선착장 모래밭 앞에는 "우리의 신조"팻말이 있었다.
6.훈련의 목적
북한의 김일성 주석궁에 침투하여 "김일성 목을 따오는것"을 궁극적 목적을 삼았다.
68년 1.21 청와대를 습격하다 체포된 무장공비 김신조의 입에서 나온 "박정희 목 따라 왔수다"에 대한 대응 목표였다.
훈련병 기간병 공히 모두 하나의 목표는 "김일성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68년 11월, 6개월이 넘는 훈련끝에 684훈련병들은 출동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실미도를 나와 남한내 최북단인 백령도까지 이동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684부대가 북에 침투 할 경우 제2의 6.25전쟁이 날 것을 우려한 상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다시 실미도로 돌아 왔다고 김이태 소대장은 밝혔다.
7.훈련.
북한침투에 대비,북한군가를 부르고 북한식 제식훈련을 받았고 개인화기로 카빈 소총외 AK소총을 지급 받았다.
군가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인민군 군가"를 주로 불렀다고 훈련병 조교였던 양동수씨는 밝혔다.
영화에서 처럼' 비겁한자는 갈테면 가라'등의 "적기가"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강도 높은 고된 훈련을 통해 북한의 특수부대 124부대를 능가하는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으로 훈련 결과 실제 해병대나 특수부대 이상이었다 김이태 소대장은 확신했다.
"인도주의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오직 목표와 방식만이 존재한 훈련이었다".-김이태
그들은 3년 4개월이란 오랜시간을 훈련받았다.실제 훈련은 영화이상으로 혹독했다고 한다.
특히" 북괴군에게 잡히면 자폭하라"고 수없이 강조되었다.
실제 북파작전시엔 고무보트 보다 공중 침투로 준비하고 있었다고 김이태씨는 증언했다.
8. 훈련병 8명의 사망 사유
1명;훈련중 익사
2명:야간 독도법 훈련시 민가에 침입,숨어있어 훈련병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본보기로 즉결" 처형"되었다.
3명:훈련병들이 썰물대를 기다려 무의도에 들어가 동네20대 처녀 두명을 강간하고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민간인을 풀어 주고 나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설득에 "개소리 마라.우린 다 죽겠다"라고 불응한 훈련병들중 두명은 한명이 칼로 찔려 죽였고 한명은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기도에 실패한 훈련병은 즉결 처형방식으로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대의를 앞두고' 배신행위'란 용서받을 수 없었다고 김이태 소대장은밝혔다.
"군인의 신분으로 민간인을 강간한 그놈들은 처벌돼야만 했다"고 했다.
당시의 처녀 두명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고 있다.
1명;별명이 "오랑캐"인 폭력적인 훈련병이 화장실에서 동료 훈련병을 "계간(남색)"하고 불응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눈치채고 조사차 몰래 딸려 보낸 기간병을 기절할 정도로 구타하여 다른 훈련병들을 시켜 때려 죽였다.
이는 하나의 목적에 반하는 반역행위로 간주 되었다.26대에서 27대를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훈련 소대장에게 생사 여탈권 까지 주어진 상황으로 보아 훈련병을 어떻게 다루며 주어진 훈련 임무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 그 냉정함과 철저함을 볼 수 있다.
훈련병 처형에 대해" 나중에 생길 법적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큰 일을 위해서라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제 겐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김이태.
따라서 사건 전 실미도에서 죽은 훈련병은 7명이다.
1명:사건 당일 "푸락치"로 간주되어 동료 훈련병들에게 사살되었다.
따라서 총 31명의 훈련병들중 실미도를 출발 할 당시의 인원은 *총 23명이었다.
(최근 밝혀진 문건으로 사건당일 실미도에서 교전중 2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어 이것이 맞다면 출발당시 *총21명이 된다.)
9.상급 부서에 대한 건의 사항
작전이 중단된채 잊혀져가는 684부대 훈련병들을 위해 김이태 소대장은 다음과 같이 상부에 건의 했다고 증언했다.
1)훈련 받은대로 당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북파해 줄 것.
2)베트남에 파병해 줄 것도 요청했으나 '부대존재' 자체가 기밀이라 그역시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3) 정식으로 군인으로 임관해 줄것도 거절 당하자
4)그렇다면 놔두면 반드시사고를 칠 것같아 "모두 죽이자"며 "본인이 직접 해치우겠다"라고라고까지 건의 했으나 어느 요청하나 수용되지 않았다.
684부대의 특수 임무상 몇몇 관계자만 아는 일이어서 누가 나서서 책임을 지고 처리 해주어야 하는 부담을 지고 싶지않아 잊혀진 부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항상 벌리기만하고 깔끔한 마무리 하지 않은일이 그런 것처럼 시한폭탄처럼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상부에서 훈련병 사살 명령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10.사건 발생일 8월 23일 진행상황
1)오전 5시 50분경 교육대장 김순웅
(영화 실미도에서 안성기분)은 당번병에 의해 둔기로 맞아 사망했다.
내부벽이 피범벅이 되버린 벽의 흔적으로 보아 일격을 당한뒤 상당한 육박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2)훈련병들은 기간병 막사에 침입자고 있던 기간병들에게 난사하여 기간병 24명중12명을 사살했다.
6명은 바다로 도망쳤으나 익사하고 경비병6명과 외출중이던 김방일소대장이 생존했다.
화장실 똥통속에 피신하여 사살을 피한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3)오전 7시 군 위장복으로 갈아입은 훈련병들은 통신실및 무기고를 폭파하고 실미도 옆 섬인 무의도로 이동했으며 이때의 시간은 대략오전 9시경이었다.
4)그들은 무의도에 나와 "해방군'이라 자칭하며 주민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여 섬에 있는 단 한척인 동력선을 빼앗아 선주 석영산씨를 인질로 잡고 송도 605 초소 부근 앞바다까지 타고 나와 해안에 상륙했다.
오전 밀물이 들어와 노젓는 고기잡이 배로는 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5)낮 12시경 33사단 102연대6중대 관할 송도 부근 605해안 초소를 통과하기전 분대가 야간 근무후 철수후 혼자 초소를 지키고 있던 김형운 일병과 마주쳤다.
6)김형운 일병은 소대에 보고 했고 소속과 작전임무를 을 확인하라는 소대의 지시에 그들은 "특수부대로 해안침투 훈련중"이라고 시비조로 얘기한뒤 605초소를 빠져나갔다.
6)12시 53분경 송도 부근에서 인천 항도 교통 소속버스(경기5의 2373)시내버스를 탈취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이때 달려나온 102연대 6중대 605초소 "최하사"와 분대원들이 교전을 했다.야간 근무시 지급하는 탄약 소지량이 아닌 각 개인 화기의 탄약, 한탄창만 가지고 나와 금방 실탄이 떨어지고 말았다)-사건후 당시 분대장 최하사가 보이지 않았는데 2개월뒤에 나타났다.
총울 맞고 입원했었는지 조사진술을 때문이었는지 본인만이 알 것이다.
7)오후1시 경 간석동 고갯길에서 버스 뒷바퀴가 펑크나 태화 운수소속(5-1681호)버스로 갈아 타고 서울로 오며 경찰과 충돌,작은 교전이 있었다.
8)2시 15분 유한양행 부근에서 기둥을 들여받고 버스는 정지했다.
연락을 받고 대기중인 군경과 대치한 가운데 총격전에서 일부사살되었고 자폭함으로써 처음 6명이 생존했으나 2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후 생존한 4명은 공군 군법 재판을 통해 72년3월1,2심에서 모두 사형언도를 받고 즉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1.당국의 발표
8월23일 3시 15분 대간첩대책본부는 "서울 침투를 시도 하려던 무장공비21명을 군경이 저지했다"라고 발표하였다가 오후 6시 35분 정래혁 국방장관은 "공군관리하에 수용중이던 특수범 23명이 고도에 격리된데 불만을 품고 부린 난동사건"으로정정 발표했다.
당시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는등 남북 화해 무드가 익어가고 있던 시점에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한 특수부대"라고는 발표 할수 없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10.훈련병들의 난동 사유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탔던 버스 승객의 증언을 보면 그들중 상급자로 보이는 훈련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해 4년간 산골에서 고생했는데 나라가 우릴 배신했다.각오는 섰느냐?"
"네!"
또 체포된 훈련병 4명중 이석천(31)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훈련이 고되고 모든게 말한것과 달라 중앙청 높은분을 만나 따지려 했다"
김종철(29)씨는 직속 상관이 오지않는 한 아무에게도 말을 않겠다"며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임무를 완수한뒤 보상을 원했던 기대가 무너지고 자신들의 가치는 없어진채 철저히 방치된데서온 그네들의 "분노의 폭발 "이었다.
시한폭탄이 되어버린 그들의 인간 심리를 이해 할만한 "인간들"이 상급부서에는 없었고 부대 작전의 취소,인간적 욕구분출마저 제한된 ,"감옥아닌 감옥"이 되버린 상황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군에 근무 당시 나는 그네들의 부식은 처음과 달리 점점 나빠졌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12.의문점
처음 발표는 21명으로 발표 되었다가 23명으로 늘어 났다
체포된 4명을 감안하면 23명이 섬을 나와 19명이사망한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소설가 백동호씨의 주장에 의하면 훈련병중" 청와대에 가서 담판 짓자"는 다수의 주장에 3명이 반대하였고 한명은 실미도 현장에서 다수파에 의해 살해 되었고 두명은 달아나 후일 백동호씨가 교도소 복역시 당시 684부대의 생존자를 "직접"만나 그것이 소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 한다.
13.후기
사건 날 저녁 오후 7시 정래혁 국방부 장관과 김두만 공군 참모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방일 소대장(충주출신:영화 실미도에서 허준호 분)은 90년 준위로 예편하여 청주에서 냉난비 설비 업체인 유일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김이태 소대장은 사건 두달전 낙하산 부대 훈련차 이동하여 그자리에 없었으며 보안사 근무후 준위로 예편 현재 고향에서 이장을 보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이태씨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도 그럴수 밖에 없다는 책임의식이 투철한 "철저한 군인"이었다.
훈련병들이 교전 끝에 자폭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동정보다 훈련받은대로 행한 그들의 행동에 우선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왔던 실미도 출신의 훈련담당기간병과 교관들은99년 소설 실미도가 출간되고 MBC TV 프로그램 이제는 말 할수 있다 "실미도 "편이 방영된후 200년 3월1일"실미 전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택시기사,미술교사,목수,시장상인,식당운영,건축업, 공무원등 다양했다.
김이태씨포함17명의 회원과 김순웅 교육대장(영화속의 안성기)의 아들 김태영씨가 특별회원으로가입했다.
소설가 백동호씨는 회원으로 있다가 탈퇴했다.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18명의 장교와 기간병은 모두 적정한 보상을 받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추기:*김방일-본명 "김상진"
충북 충주시 충인동 10번지에서 부친 김영암과 모친 김위술 사이에서 1945년출생.
형으로 김상희 ,동생인 상현(2008.2월 사망), 상수가 있다.
김방일씨는 2005년 5월 25일오후 3시 청주 의료원에서 지병인 당뇨로 사망했다-김방일 형 김상희의 블로그에서 참조.
"영화 실미도"에서는 부대 창설의 당위성 부각이나 사망한 기간병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없이 훈련병에 대해 피해자로 촛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훈련병에 의해 무고하게 죽은 기간병들 또한 피해자임이 분명하다.
당시 국가에서는 살아남은 기간병과 훈련병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었다.
전우회 회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병을 앓았으며 당시의 충격으로 사회 생활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영화 상영후 사회 분위기가 훈련병에게 동조적 입장이 되며 마치 자신들이 가해자로 몰리는 듯한 느낌으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영화에서 캐비넷에서 보관 ,잠자는 관련 보고 화일처럼 무의도 주민,당시 기간병,군관계자 모두 잊고 싶은 사건을 영화가 다룸으로써 잊었던 상처를 건들였다
특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꺼려하는 무의도 주민들에게는 지나간일로 잊고 싶은 사건이다.
영화 실미도를 보면 실미도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린 긍정적 의미외에 과거 정부 시절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무시되었던 암울했던 시절을 그림으로써 과거의 정부에 대해 흠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히 숨어 있슴을 안다.
영화는 1.21청와대 습격으로 죽은 민간인과 군경 30명과 부상당한 52명,한나라의 국가 원수를 살해 하려던 배경은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다.
좌파적 정권아래 유행처럼 과거의 정권의 부끄럽고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데 있어서도 흥미 뿐 아니라 형평에 맞는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만 오랜동안 좋은 영화로 기억된다고 믿는다.
부끄럽거나 어둡거나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자화상이요 현대사다.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자는 누구인가.
민주주의,자유,인간의 권리가 거져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온몸을 던져 애국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역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친 국민들을 보살펴 주는 게 국가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실미도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차근 차근 풀어가야 합니다"-김방일
김방일씨가 당시 부대원을 정당하게 평가해 달라는 부탁처럼 우리가 실미도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올바른 시각이다.
실미도 사건 관련 소설은 "실미도"(백동호 지음-1999년)가 있고 영화로는 "실미도"(강우석 감독.설경구,안성기,허준호출연-2003년)가 있다.
영화 상영후 " 실미도의 증언"(실미도의 생존자 김방일 증언-2004년)이 발간되었고 "충성의 섬 실미도"(이수광의 실화소설)가 뒤늦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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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21 청와대 습격사건 (0) | 2008.10.30 |
실미도 - 군대 이야기. (0) | 2008.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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