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제대후 3학년 1학기에 복학한 학교에는 나보다 먼저 입대하여 복학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언젠가 그 친구중 하나와 군시절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강릉에서 공군부대에 근무중 실미도로 차출이 되었다가 자신보다 복무기간이 더 남은 사병이 가는것으로 바뀌어 자신들의 운명은 생과 사로 바뀌었다고 했다.
실미도에 갔던 후배는 그곳에서 죽었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죄책감까지 든다고 고백했다.
1971년8월 23일 12시 ,야근근무를 마치고 아침 취침에 들어가면 12시에 정확하게 기상해야 하는 해안부대 생활이었다.
통신병 김상병이 "아니 저놈들은 뭐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12시가 거의 되어 일어날 시간이었다.
"비~상"
막 군복을 주어 입은 우리는 탄약 창고에서 실탄을 꺼내 비호같이 송도 유원지 입구로 올라오는 언덕길로 내려 뛰었다.
"군복입은 무장 괴한 수명 출현,버스 탈취 도주"-통신병이 멀리 언덕을 내려 가던 군인들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들로 짐작했다.
언덕길에는 2소대원 몇명이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가지고 중대 본부 언덕길을 뛰어 올라 오며 "실탄,실~타안"을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들은 송도 유원지 방향으로 올라오던 택시들을 강제로 세워 승객들을 급히내리게 했다.
승객들은 무장 괴한 출현에 기겁을 하며 내려 주었다.
택시들로 인천 용현동 경인고속도로에 도착했다.
3사관 학교 출신의 어린 소대장은 어쩔줄 몰라했다.
이때 월남 전투에 참가하여 실전을 치루고 귀국하여 제대를 한달 앞둔 P병장이 있었다.
침착한 그의 지시로 1개 분대는 경인 일반도로를,2개 분대는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올라 수신호로 모든 차량을 서행, 정지시킨뒤 차에 두명씩 올라가 검문을 시작했다.
늘 손에 익숙한 M-16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채 즉시 사격태세를 갖춰야 했다.
약실에는 실탄이 이미들어 있었고 연발모드에 잠금쇠는 이미 풀어 놓은 상태다.
말이 검문이지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무조건 즉각 사살을 해야했다.
버스를 세우고 검문하기를 세시간 .
3시 15분 상황 종료 연락을 받고 무장 괴한들이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했다는 상황을 들었다.
부대에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팅팅불은 라면으로 허기를 때워야 했다.
다음날 부대에서 유력지중 하나인 D일보를 손에 쥔 나는 소설을 쓴 기자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 초소에 도착 ,무장괴한들이 목욕을 하고 가는 동안 군부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힐난조의 기사였다.
현장에도 와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 주간지 기사 만들듯 상상으로 쓴 기사였다.
그가 과연 군부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기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인지 모두 분통을 터뜨렸다.
그 후로 기자는 "마누라도 팔아 기사를 쓸 놈들"이란 불신과 활자화된 기사라도 사실이 아니며 내눈으로 직접보지 않은 사실외에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기초를쌓는 초석이 되었다.
"실미도" 영화상영시 관객 360만의 기록적인 숫자를 보며 나는 당시 사건의 언저리에 있던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첫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은 영화다.
정치적 상항이, 사회적 상황이 변했어도 684부대를 창설하게된 당위성을 분명히 해여했다.
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시 군인,민간인,경찰등 3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 사건을 좀더 극적인 사실로 비중있게 다루었어야 했다.
영화로서 긴박감이 더한 가치가 있는 영화가 되었을터이다.
비록 "이제는 말할수 있다"는 시대에 반공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아닐지라도.
33사단 102연대 2대대 6중대 관할 605초.
야간근무를 끝낸 2소대는 김형운 일병을 초소에 남긴채 소대로 귀대, 내무반에서 아침 취침중 분대장 최하사는 초소병의 전화를 받는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이 훈련중이라며 통과하려한다는 보고였다.
분대장 최하사는 "어느놈들이 지역사령관을 몰라보고 까불어'하고 분대원들을 깨워 실탄 한탄창씩만 가진채 쫓아 나갔다.
주간에 타부대에서 사전에 연락없이 훈련에 임한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간이라면 무조건 사살 대상이나 벌건 대낮에 무장괴한이란 상상할수 없던 상황이었다.
최하사 분대원들이 그네들을 쫓아 갔을때는 그들은 무거운 기관총을 언덕위에 버리고는 이미 버스를 탈취한 뒤였다.
최하사와 분대원들은 총을 쏘며 도주하는 그들과 교전하였으며 내가 알기로 2소대원 두명이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이 교전 내용은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두달후 소문에 부상을 입었다는 최하사가 귀대했다.
입원치료후 퇴원한 것인지 아니면 2개월간 이곳 저곳에서 조사받느라 불리워 간 것을 부상당했다고 와전된 것인지 모두 입을 다물어 알수가 없었다.
문제는 즉각 작전 조치는 취해졌어도 정식으로 중대장에 의해 대대,연대보고가 거의 1시간 45분이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중대장은 수원 비행장 경비대대 근무시 수류탄 총기 사고가 발생하여 이곳으로 전출해온 X대위다.
위생병으로 복무하다 장교시험을 치룬후 장교가 된 X대위는 전임 황대위와는 달리 시원시원한 부대장으로 자신이 사병 경험이 있어 사병들에 대한 이해심이 깊었다.
야간 해안 경비업무를 지휘하는 그는 사건 발생시 오전 한가한 시간을 이용, 해안중대장에게 지급되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어디로 갔는지 각 초소를 호출해도 행방이 묘연 했었다.
모든 상급부대의 사건 접수 보고 시간대를 제외한 1시간45분간의 보고 지연은 X대위의 근무 이탈,업무 태만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된일이었다.
만약 사단까지 즉시 보고되고 완전 무장한"사단 5분 대기조"가 출동하여 경인 가도(구 도로)를 차단하였다면 소사(현재 부천) 3X사단 앞에서 교전은 피 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5분 대기조의 피해가 더 컸을 것이란 생각이다.
국회 조사단 버스 두대에 많은 국회의원들이 조사차 야단 법석을 떨고 간후 중대장은 소대를 방문했다.
중댑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며 여러분은 근무에 철저하기 바란다고 인사를 하고 부대로 소환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평생에 "내탓입니다"라고 말한 유일한 남자인 듯 싶다.
그는 그후 조사를 받고 2개월 정도 수감되어 있다가 사병으로 강등된 후 군복을 벗었다.
소위 <불명예 제대>였다.
사단장,연대장 모두 책임을 물어 즉시 대기 발령을 받았다.
월남에서 전출온 대대장만은 무슨 일인지 아무런 이동이 없었다.
(사건 당일 저녁 7시 정래혁 국방장관과 김두만 공군참모 총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우리 중대에도 새 중대장이 부임해 왔고 우리 소대역시 소대장과 선임하사 모두 교체되었다.
그리고 우린 어느날 밤 야간 해안 근무중 일인당 삶은 통닭 한마리씩을 배식받았다.
사기 진작을 위해 처음으로 나온 특식이었다 .
특별 조사단이 방문차 왔다가 금 일봉을 전해 주고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형운 일병은 영화 "실미도" 에서는 684부대 탈주병들에게 사살되는 것으로 묘사 되었다.
탈출 훈련병들이 낚시꾼들과 조개잡이들이 걸어다녀 다져진 갯벌길을 걸어나와 맞부딪친 초소병이다.
그들은 "어떤 놈은 바다에서 기며 훈련하고 어느놈은 바닷바람을 쐬며 초소 근무하냐"고 이죽거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전날 비가와 길위에 고인 빗물에 갯펄흙이 묻은 군화를 털어 내고 간것을 목욕하고 갔다고 D일보 기자는 소설을 쓰며 우리를 폄하했다.
실제 그는 일병으로서 침착하게 신속히 보고하고 근무를 잘 선 것으로 평가, 즉시 상병으로 특진하여 사단으로 전출했다.
최초 보고자로 입막음을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실미도"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사건 보고서가 캐비넷에 잠자듯 우리 부대도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어두운 밤 해안선을 지키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바로 군대였다.
며칠전 ,실미도 684부대원으로 동료들에게 맞아죽은 훈련병의 사망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 기사를 읽으며 망령처럼 되살아나는사건이다.
이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차가움"이라고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커다란 수레바퀴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너무 현재의 시각으로 만 보는 것은 아닐까.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잊혀진 사람이듯 684부대는 모두 잊혀진 부대였다.
3년 4개월간 실미도에서 죄수처럼 잊혀진채 방치되어 잉태된 비극이었다.
언젠가 월간지 신동아에서 부대 조직후 훈련시기의 당시의 국방장관이 실미도 사건을 언급했다.
본인도 알지못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못한 아타까움을 토로한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영화 실미도가 만들어 지기 훨씬전 일이다.
만약 남북 화해무드의 조짐으로 인해 작전이 중단됨이 없이 훈련받은대로 북파되어 "김일성의 목을 따온다"라고 했듯" 김일성 암살'에 성공했더라면 현재의 남북 관계는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위대한 지도자 동무"의 권력 탄생은 없었을 것인가?
혹 굶어 죽은 300만명의 북한 주민도 없었을까?
아니면 " 서울이 불바다"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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