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x연대 1대대 3중 대장 K 대위 , T하사 그리고 3소대 W 상병 수류탄 사고로 사망"
3주 전까지 얼굴을 보며 한솥밥을 먹었던 W상병이었고 늘 군인 같지 않게 온화한 모습으로 부대원을 통솔했던 중대장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안산시의 일부가 되어 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경기도 군자면 성곡리가 우리 중대가 있던 곳이다.
당시 협궤열차가 다니던 수인선의 중간에 원곡역이 있었고 소래 부근의 대대본부에서 스리쿼터를 타고 황토가 날리는 길을 따라 원곡에서도 4킬로를 더 가면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중대 본부가 있었다.
비가 오면 황톳길에 차가 빠져 차가 움직이지 못해 부식을 수령할 희망자를 두명씩 차출하여 원곡까지 보내곤 하던 곳이다.
그것도 외출이라고 밖의 공기가 그리운 사병들이나 혹은 술을 먹고들어와도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는 탓에 희망자는 항상 있었다.
나는 102 연대 소속으로 전출받은 지 한 달 반여만에 연대가 교체하여 근무하게 되었고 해안 부대 병력 부족으로 일부는 101 연대 소속으로 잔류해야 했다.
당시 고향이 진천이고 서무계에 근무하던 L 상병은 내가 충청도 고향사람이라고 이병인 나를 늘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는 사단에 들어가면 6개월간을 훈련만 받는다며 잔류를 권했다.
논산에서 전반기 , 후반기 교육을 받아온 내가 다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본인도 잔류를 신청한 L 상병은 혹 부대 교체로 인해 소수의 잔류인원들이 새로 투입되어 오는 부대원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했는지 나를 *"선박 소대"로 배치해 주었다.
이 선박소대는 부대의 특성상 소속 부대 명칭만 바뀔 뿐 모든 인원이 그대로 인수되었다.
사실 육군에 선박소대가 있다는 것이 좀 우습기까지 했다.
중대 본부 앞에 선박소대 내무반은 있었고 내무반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매트리스가 잔뜩 쌓여 있고 오른쪽에는 더플 백이 쌓여 있었다.
관물 정돈이란 아예 없는 소대로 선임 상병이 내무반을 지키고 있었다.
내무반엔 강아지와 꽁지 빠진 꿩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강아지는 심심하면 침상 위아래로 꿩을 쫓아다니고 심심한 소대원들은 그걸 재미 삼아 보곤 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선박소대가 괴상한 부대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몇 명 안 되는 소대원들은 내무반에 가끔 오곤 했는데 근무 복장이 군인 아닌 민간인 회색 작업복이었다.
타 소대처럼 아침마다 구보 훈련도 없고 들어 오는 시간도 일정치 않고 밥 먹는 시간도 일정치 않았다.
간혹 몇 명분의 밥을 포구에 가져가라는 내무반의 상병님의 지시만 따르며 내무반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야 했다.
2주간을 그렇게 보내다가 드디어 선박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선박은 모두 5대로 Caliber 50이 장착된 6톤 자리를 모선으로 2톤 자리 소형선박이 4대였다.
소대의 임무는 군자만을 경비하는 것으로 중앙에 모선이 위치하고 소형 선박은 좌우에 2대씩 날개처럼 배치되었다.
소형 선박의 화기는 LMG 한정과 각자가 가진 카빈총이 전부였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군자만은 밀물이 몰려올 때는 5대가 늘어서도 서로 간에 상당한 거리가 있을 만큼 넓었다.
초저녁 늦은 어선들도 통통거리는 낡은 엔진 소리를 내며 각자의 포구로 사라지고 나면 4명의 부대원은 좁은 선실에 안장 화투를 치거나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첩선을 경계하고 저지하는 것이 임무이어서 근무라는 것이 배안에 있기만 하면 되었다.
편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무료해지자 도대체 육군이 되어 가지고 밤마다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 위에서 보낸다면 해군이 되었어야 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중대본부 부관과 면담을 신청 , 타소대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수영 강사였으며 인명 구조원 자격도 있었던 내가 수영도 못하고 물에 대한 공포증임 많다고 사유를 밝힌 나의 요청은 즉시 수락되어 본연인 신분인 "땅개(육군)"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로 찾아간 3중대 1소대는 중대본부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 사이로 회색 함석 소대 막사가 한동 있고 작은 운동장이 있었다.
기존 잔류 동료들은 나를 알아보고 사단에서 나온 대다수 소대원의 텃새 및 잔류 병력 길들이기 기간이 지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내가 배치된 1분대 부분대장은 원래 고아 출신으로 군번이 1170으로 나가는 N병장으로 소대 내 최고참이었다.
이때 처음 W 일병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소대로 전출 간지 며칠 후였다.
모두 다 해안 근무 후 내무반에 돌아올 때 붙박이처럼 그는 방카에 보초로 남겨 두었고 본인 소대에 들어오길 싫어한다고 들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충북 제천 출신으로 원래 하사관으로 훈련받다가 어떤 사유인지 퇴교당했고 근무기간에 비해 계급은 상병 초자였다.
군번이 1172(1171보다 약 2개월 입대가 늦다)로 나가 그는 자기보다 선임인 1171 군번의 N 병장 말에만 순종하고 평소에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군에서 사고 친 경력이 있을 것이란 짐작뿐 모두 그를 무사히 제대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N 병장은 작은 키에 아주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었고 표정을 보면 만만한 사람이 아니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N병장과 같은 분대에서 있으면서 가끔 그의 얘기를 들었는데 자긴 고아로 자라 과수원을 하던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되었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 말을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고 기계체조를 잘해 철봉 및 평행봉 운동을 잘해 서커스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다고 했다.
부상으로 서커스단은 포기하였어도 실력은 그 정도였다고 하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동네 다리 밑에 땅꾼이 들어오자 동네에서 이미 악명이 나있던 그에게 땅꾼을 내어 쫓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다리 밑에 갔다고 했다.
그리고 쫓아내기는커녕 그네들에게 설득당해 쫓아내는 대신 가끔 뱀탕을 공짜로 먹기 시작했는데 사단에 있을 때 사귀던 여자들이 면회를 여러 번 왔었다고 했다.
내 위병 생활중 술집 여자가 면회 오는 놈은 너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사단 정문 하사에게 들었다 했다.
왜 술집 여자들이 자기를 못 있어 왔겠느냐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의 물건과 정력을 잊지 못해 왔다며 허풍을 떨었다.
나는 W상병이 왜 내무반에 오지 않고 초소에서 생활하는 것이 궁금해 친해진 N병장에게 물어보았다.
그 녀석의 지독한 발 냄새 때문이라는 것이다.
잘 씻지 않아 그런 것보다 체질적으로 악취가 심해 내무반에 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가 내무반에 올 일이 있었는데 발을 씻고도 내무반에 풍기던 그의 발 냄새는 지독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체 썩는 냄새라고 할까.
지금은 그것도 병의 일종이라 군 복무가 면제될지도 모른다.
그는 늘 외로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아 개인적인 얘기를 한적은 없었다.
아니 어느 면에서는 두려워 마주치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가을 , 그는 정기휴가로 25일간의 휴가를 갔다가 어쩐 일인지 15일 만에 귀대를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더라는 것이다
하루의 외출, 휴가가 아쉬운 우리에겐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던 대목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외톨이란 것을 알고부터는 발 냄새 심한 상병보다 불쌍한 상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대 내에선 가끔 분대원의 교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우리 분대에 배속되었다.
우리가 야간 근무하는 방 커는 절벽 위에 있었고 좌편은 작은 바위돌들이 흩어진 해안선이고 우측은 70여 미터의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 해변이었다.
물이 빠지면 해안 바위 초소 중앙에 LMG (경기관총)을 설치하고 좌우로 크레모아(베트남 전에서 사용하던 거치형 폭탄. 720발의 파편이 튄다)를 설치했다.
물이 들어오면 크레모아를 회수하고 경사진 길을 따라 기관총과 탄통, 총기를 올려오고 하던 초소였다.
초소는 너무 한적해서 그렇지 조용히 바닷물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느 날 W 상병은 선임들이 동초를 나가 초소를 비운 사이 나를 포함 4명의 후배들을 집합시켰다.
어둠이 깔린 동산 위에서 뜻밖에 그가 뱉은 말은 모두 같이 죽자는 것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우리 앞에선 그의 오른손에는 수류탄이 쥐어져 있었다.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겼고 술주정을 하는 그를 보며 침착하자 침착하자를 뇌뇌였다.
머릿속은 그가 수류탄을 내던질 때 어느 방향으로 튀고 어디에 엎드릴까 헤아리기 바빴다.
혹 비위를 건드리면 사고를 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모두 말없이 서있기만 하자 풀이 꺾인 그는 해산하라며 혼자 방 커로 들어갔다.
몇 분 후 벙커에 물건을 가지런 간 나는 기겁을 하였다.
W 상병이 석유 등불 아래서 낑낑대며 수류탄의 안전핀을 끼어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장난이나 단순한 위협으로 생각했는데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가지고 우릴 위협했던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그 일은 누구도 발설하지 않았고 내가 연대본부로 전출될 때까지도 그는 말썽 없이 근무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 뒤에는 소대원들의 노력과 선임하사, 소대장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고가 있던 날 W 상병은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손에는 수류탄을 쥐고 죽겠다고 주정을 하자 만류하던 소대장은 결국 중대장에게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대장은 마침 전출 온 예비 소대 T 하사와 함께 W 상병을 말리려 초소에 갔다.
W상병은 술을 더사오라고 소리 지르며 술 대신 물을 담아 가져다준 술병을 내던지며 3시간을 승강일 하며 버텼다.
도중 갑자기 폭음 소리가 터지고 W상병 자신과 T 하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중대장은 헬기로 육군병원 이송 중 절명하고 말았다.
중대장은 천주교 신자로 그는 얼굴만 보아도 '참군인 "이었던 사람이었다.
중 대은 직급은 대위로 지금 생각하면 28-9세의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이였다.
70년 1월 수류탄 참사 소식을 들으며 졸지에 남편을 잃은 부인을 생각했다.
W상병은 원래 죽을 용기도 없었던 친구였다.
세 시간 동안을 수류탄 안전핀을 뽑은 채 버티다가 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수류탄을 놓쳐 터지고 만 것으로 추측하고 싶다.
W상병이 일으킨 그 참사로 인해 아들을 잃은 부모, 남편을 잃은 부인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군대란 얼마나 무모한 곳인가.
춥던 크리스마스이브 , 어둡고 침침한 해안을 돌며 상냥한 부인과 함께 야간 근무하던 장병들에게 선물을 주며 격려해주던 중대장이었다.
수류탄 참사 후 나는 시간이 가면서 겁쟁이들의 세계를 경험하며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일반적 용기조차 신체의 크고 작음에 달려 있지 아니하며 진정한 용기는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던 기회는 그 후에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박소대
:이 소대는 몇 개월 후 침투 한 간첩선을 발견, 격침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소식을 들은 후 하달된 작전 회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평소처럼 철저한 야근 근무 도중 자정에 고성능 엔진 소리를 들어 지금까지 들어온 통통배 엔진 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것을 직감한 소대에서는 중대에 보고, 중대에서는 즉시 대대에 보고하였다.
대대에서는 연대와 김포에 있는 공군 부대에 연락을 취했다.
김포에서는 즉시 정찰 기기 이륙하였고 연락받은 해군 경비정이 두척이 군자만으로 이동했다. 경비정은 정찰기에서 투하된 조명탄 아래 도망치는 괴선박을 발견, 발포하여 간첩선을 명중시켰다.
반파된 배를 타고 섬에 상륙하여 탈출하려던 간첩 일당은 대기하고 있던 헬기로 이동해온 전투경찰과 비상소집된 향토 예비군에 전원 사살되었다.
아군의 피해는 전투경찰 1명, 예비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작전은 군, 관 , 민(육군 , 공군, 해군, 전투 경찰, 향토 예비군)의 협동으로 지금까지 대 간첩 작전 사상 가장 완벽한 작전이다.
이 간첩 침투 상황을 전군이 아는데 2분이 소요되었다.
최초 발견자인 선박 소대는 포상과 당시로서는 고액의 포상금을 받았다.
중대도 포상금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밤 12시까지 화투를 치다 소변이 마려워 배에서 나와 오줌을 바닷물에 갈기다가 엔진 소리를 들었어도 철저히 근무했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그네들이 타고 온 침투선의 선수는 35센티로 거의 잠수함에 가깝게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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