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싫어 하는 얘기가 남자들의 군대 얘기와 축구얘기,그중에 최악은 군대가서 축구한 얘기란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래도 하고싶은 군대얘기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1972년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여름,전국에 장마로 인해 피해가 속출하고 특히 서울은 마포 지구가 물난리로 잠겼던 여름이다.
우연히 보게된 주간지에서 인천시 음식점에서 폭발물이 터져 인천 모부대 소속 Y중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사망하고 지나던 행인도 부상을 당했다는 기사에 깜짝 놀랐다.
치정에 의한 사건이라고 주간지의 흥미위주의 기사를 읽으며 눈내리던 겨울에 바닷가 방파제를 거닐며 나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근무했던 Y중사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제대 며칠전 병장이었던 나와 동기생 화성 출신인 박상병에게 개인적으로 따듯한 송별 회식까지 해주었던 Y중사였다.
우리부대는 모 사단의 소속으로 서해안 경비부대로 간첩침투 방어가 주목적인 보병 연대였다.
어느날 중대 소대에 선임 하사로 Y 중사가 전입해 온 것이다.
당시 나이는 나보다 다섯살정도 많은 것으로 짐작한다.
선임 하사로 중사가 온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원래 통신 주특기를 가진 통신 부대 소속으로 보병 부대에게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정한 용모에 성격은 온순하고 무척 깔끔해서 종전의 선임하사들과와 비교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단 본부 통신부에서 말단 소대로 인사 발령을 받았는지 ,무엇을 밉게 보여 그랬는지 궁금한 점보다는 하루 하루 근무를 하면서 피곤에 지쳐 일상을 반복하는 우리에겐 사실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저녁 6시 총기 검열과 근무 복장 점점을 마치면 분대별로 각 초소로 이동 ,2개조로 나누어 새벽 6시까지 해안선 경계근무후 막사에 돌아와 낮 12시까지 취침후 오후에는 교육,훈련등으로 일과를 보내는 해안 부대의 하루다.
180발의 M16 실탄과 한개의 수류탄을 허리에 차고 경계근무후 한평도 못되는 벙커에서 쪼그려 앉아 잠을 자며 교대 근무를 하는 우리를 보고 그는 정말로 가슴 아파했다.(당시 1개분대에 고참 3명정도에게 M16을 지급하였고 나머지는 카빈 M2(자동),M79유탄 발사기,분대장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사용한 M1소총등의 개인 화기가 지급되었다)
사단 본부에 있을 때 출퇴근하며 근무하던 그에겐 해안 경계 부대의 실상이 그에겐 죄책감을 준 듯 했다.
이렇게 모두 고생하고 있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지냈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양심을 지닌 군인이었다.
사실 Y중사는 직업 군인이었고 우린 어차피 제대할 사람들이라 누구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었음에도.
콘세트로 된소대 막사에는 간이 소대장 방과 선임 하사 방이 있었다.
Y 중사는 그 시절 귀한 오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Pop음악을 즐겨 들었다.
시간이 가면서 Y중사는 내가 음악을 좋아 하는 것을 알고 그가 없는 시간에 유일하게 나에게만 그의 방에 들어가 오디오를 만질수 있게 했다.
그가 사놓은 수십장의 레고드중 한장을 꺼내 Pop을 가끔 들을 수있던 작은 특권이 군생활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작은 양심도 해안부대의 실태와 입장에 익숙해지고 안정이 되면서 나름대로 해안부대의 군대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해안 경비 부대원들은 아침 해안경계 근무를 마친후 한명의 초소병만 초소에 남긴채 소대 막사에 돌아와 실탄류를 반납하고 찝질한 바닷바람을 맞은 총기들을
손질한 다음 세면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끝내는 셈이었다.
일부 사병은 청소,일부는 배식 받은 식판을 식탁에 나르고 일부는 분대별로 취침하기 위한 침구를 펴놓는 등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정오 12까지 취침해야하는 우리로서는 늦어지는 만큼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야간 근무 지휘는 소대장의 책임으로우리와 취침시간대가 틀린 Y중사는 바닷가 유원지 옆 초소부근 매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간혹 매점주인의 4-5세 정도의 남매를 소대 내무 막사에 데리고 오곤 했는데 우린 귀여운 그 아이들을 "꽃님이,꽃분이"라고 불렀다.
매점 주인은 원래 언론 기관 편집국장으로 매점 살림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매점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흑백 사진이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여름철 매점에 유원지 입구에 맥주나 청량 음료 상자가 오면 날라주는 등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질구레한 일들도 도와주고 아이들과 놀아주곤 했다.
간혹 국장을 만나게 되면 형님으로 모시면서 식사도 함께하고 지식인인 국장에게서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군과 다른 별개의 세상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따분할수도 있고 단조로운 군생활을 활력있게 했다.
국장의 부인은 입술이 도톰한 작으마한 여인으로 매점에서 일하며 당시로서는 열심히 사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인 여인이었다.
매점은 주로 음료와 차를 파는 곳으로 밀물이 들어와 바닷물이 방파제까지 밀려오면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멋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갯바닥를 훑고 들어 오는 바닷물을 바라볼 수도 있었고 밤에는 멀리 정박한 외항선의 불빛이 어둠속에서 반짝이던 그런 곳이었다.
매점 옆에는 해송이 몇그루 있어 운치를 더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며 여름이 갔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으며 머지 않아 해를 지나면 제대할 꿈에 부풀어 있던 나였다.
72년 초 함박눈이 이리 저리로 흩날리는 겨울날이었다.
Y 중사와 중대본부로 걸어오며 Y 중사는 뜻밖의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매점의 꽃님이 엄마가 어느 날 자기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너무 혼란스러워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를 했다고 했다.
Y중사가 나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가족처럼 지내온 그집 식구들-아이들과 몇살은 연상인 아이들 엄마,동생처럼 여기던 C일보 편집국장의 단란한 가정이 퍼득 떠 올랐다.
비록 군인인 나였어도 도덕적 기준 까지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
남의 가정을 파탄시켜서는 아니된다는 것은 그도 나도 잘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깊어지기 전에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그의 말에 안심했고 제대후 일주일 후에 학교에 복학 신청을 했다.
35개월 11일 복무기간의 공백을 메우려 강의실과 독서실을 오가며 다시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나의 미래를 위한 준비로 마치 고교 3년생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Y중사의 사건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해 초겨울 9초소가 있던 마을을 찾았다.
밀물이 밀려온 다음 날 멀리 그물에 걸린 고기를 주으러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다져진 갯바닥길과 시커먼 갯펄은 여전했다.
봄이면 얼굴이 햇빛에 그을릴까 큰모자에 얼굴을 스카프로 칭칭감고 조개를 캐러가던 어촌 여인들의 왁자지껄하던 풍경이 있던 곳이다.
조개잡이들이 잡은 조개를 조합 검수원에 주면 가로 세로 발로 엮은 큰 채에 조개를 쏟아부었다.
규정이하의 어린 조개들은 쇠망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잡은 조개 무게에 따라 전표를 받아들고 여인들은 돈으로 바꾼 다음 노점상들에게서 저녁거리 생선이나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사들고 가곤 했다.
초소병들이 가끔 라면을 끓여 먹거나 해안선 철조망 오물 제거 작업을 가면 가끔 막걸리도 사마시곤 하던 조개탕집이 그대로 있었다.
조개탕집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겼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원래 시내에서 세탁소를 하다가 이곳까지 들어와 음식점을 차렸었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마음 착한 여동생 "안나"가 있었는데 마음이 얼마나 착한지 군인들에게 김치나 참기름을 막 퍼주다가 언니에게 자주 야단을 맞았다.
군인 아저씨들을 늘 측은히 여기던 처녀였는데 내가 무척 귀여워해 주었었다.
안나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월남에서 귀국하여 제대전 까지 소대에서 2개월 정도 근무하던 고향이 충남 홍성인가하던 이병장이 있었다.
그 이병장이 제대하던 날 언니에게 편지 한장 남겨놓고 이병장을 따라 줄행낭을 친 사연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잘 살고 있다면서 간다면 미리 얘기라도 해주었으면 혼수라도 조금 해줄것을 언니는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오랫만에 시킨 조개탕의 시원한 맛은 전과 변함이 없었다.
"가무락'조개(모시조개)를 넣고 마늘과 미역을 넣고 끓여 뽀얗게 울어난 조개탕 국물에 빨간 실고추를 띄웠다.
조개탕집 아주머니는 Y중사 얘기를 시작했다.
9초소에 Y중사가 들릴때 마다 서로 "갑쟁이"이라고 부르며 친히게 지내던 그녀다.
둘이 나이가 동갑이어서 그렇게 불렀다.
2월인가 서울 가는 버스에서 Y중사와 매점 아주머니를 보고는 놀라서 뒤에서 못본척 했다했다.
그후 또 한번 그네들을 보았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라고 했다.
중대본부엔 중대장과 몇명의 행정병이 있었다.
그중에 한양대 법과 재학중 입대하여 근무하던 일병이 있었다.
나중에 그를 제대한 군대 친구들과 우연히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벌써 병장이 되어 의젓했다.
화제가 Y중사에게 돌아가 그가 연락을 받고 R 시내 사건 현장에 사체 수습을 위해 갔을 때 Y 중사와 매점 여주인의 하반신은 끔찍하게도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건이 있었던 날 시내 음식점에 Y중사와 매점 부부, 부부의 동생 부부,장모 모두 모여 담판을 지으려 모였다는 것이다.
아이들 생각해서 헤어지라는 자리였는지 Y중사는 흥분한 감정을 제어 못하고 모두 죽어버리자고 사제 폭탄을 터트리고 만 것이라 했다.
군 교육중 Y중사는 폭약 취급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후 가족이라고 어머니에게 간신히 연락이 닿아 어머니가 부대에 찾아 왔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통하여 Y중사가 만주 태생이라 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어머니라는 분은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고 "내가 난 자식은 맞지만 내자식이 아니었습니다"며 "혹 저금이나 탈돈이 있다면 군인들을 위해 사용해주십시요"하고 시신 처리도 부대에 맡긴채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했다.
그는 Y중사의 방에서 유품을 정리중 여인과 만난 약속 메모가 있는 수첩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해 할수 없었던 것은 그때마다 육체 관계 횟수를 꼼꼼히 메모해놓은 것이라 했다.
함박눈 내리던 방파제를 거닐며 나와 대화를 나누던 때 그는 이성이 살아 있었고 판단력을 잃지 않았었다.
정을 끊지 못한 우유부단했던 Y중사와 여인의 사랑은 육체의 욕망에 불타 올랐고 파멸로 치달아 자신뿐 아니라 결국 한 집안을 완전히 망쳐버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느 해인가 사진을 정리하며 코스모스 사이로 Y 중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버렸는데 아직도 목에 얼룩무늬 스카프를 하고 찍은 사진속 그의 얼굴은 내게 깊히 각인 되어있다.
그후 4년뒤인가 군시절의 추억이 있던 그 곳을 결혼전 안사람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친척인가 하는 분이 매점을 운영한다던 소문을 얼핏 들었었다
매점 앞을 지나며 안에 있던 소년 소녀를 보았는데 그네들이 졸지에 부모를 잃고 작은 아버지 내외,할머니를 잃은 "꽃님이,꽃분이"였는지는 알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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