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결혼과 주례사

Jay.B.Lee 2007. 12. 5. 09:17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도 끊임없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으로 인하여 고지서가 아닌 청첩장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을 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알만한 나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파티 문화 없는 우리에겐  결혼식이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는 파티장이요,망자를 위해 가족을 위로할 자리도 평상시 못만나던 친척,친지,동창들을 만나는 일종의 파티가 되어 버렸다.


이제 철이 들어선지 곧장 피로연장으로 가기보다는 식장에 남아ㅡ특히 하객수가 많지 않을 때에는 ㅡ신랑 신부를 축하하게 되고 주례사를 듣게 된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때 혹은 결혼식에 참석하여 주례사를 들을때 설교와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많은 결혼식에 참석해보면서 기억에 남는 주례들이 생각이 난다.

 

우리들의 평균 결혼 시기 보다  나이 늦게 결혼한 동문이 있었다.
동문의 스승인 주례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군이 주례를 부탁하러 왔을 때 아직 결혼을 않했다는 걸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신랑이나 신부나 이미 사회에서 지도자적 입장에 있으므로 내가 당부하지 않아도 두분 자신이 스스로 잘해 나갈줄 믿고 주례사로 대신합니다."
정말 한마디 가감이 없이 그랬다.
많은 하객의 박수가 뒤 따랐음은 물론이었다.
그날 이후 그 보다 짧은 주례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들이 잘해 갈 줄로 믿었던 주례의 믿음은 오산이었다.

두분 스스로 이혼하고 말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친구의 둘째 아들 결혼이 모 호텔에서 열려 안사람과 참석 했을 때 일이다.
모두 130여명의 하객을 위한 조촐한 자리로 정말로 양가 모두 가족,가까운 친구 , 전 직장 동료 몇명만 초청한 단촐한 결혼식이었다.
 신랑 신부의 은사인 교수께서는 아늑하고 여유 있는 결혼이 맘에 들었는지 느긋하게 주례사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길게하는지, 길게할 수 있을 것인지 저녁의 배고픔을 참으며 모두 참을성 있게 테이불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주례 자신도 스스로 지쳤는지 아직 못한 얘기는 신혼여행 다녀온 후 집에 오면 그 때 또 해주기로 양해를 구하고 간신히 주례사를 마쳤다.

 

어느 결혼식에 참석 할 때였다.
 유명한 목사님중 한분인 주례는  이혼이 많은 시대가 시대인지라 주례사의 3분의 2를 이혼 얘기로 일관했다.
아무리 이혼이 많기로서니 새 출발하는 신랑 신부 앞에서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혼 얘기를 주제 삼아 주례사로  일관하여 하객이 민망스러울 지경이었으니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다리 아프도록 긴 시간 주례사를 들었으니 결코 이혼하는 일 없을 것이고 행복하게 잘 살 것이다.
결혼 두번해서 또 다리에 쥐 날일은 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을 했으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사실이 있으랴.

 

남대문"H'호텔에서 평상시 가깝게 지내던 분의 자제가 결혼을 하게되어 참석했을 때다.
그날은 신랑의 은사인 젊은 교수가  주례를 서게 되었다.
신랑은 명문 외고와 명문 대학을 나온 신랑으로  외국에서 동시에 3개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다가  잠시 귀국,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제자인 신랑을 칭찬하다가 길을 잘못들어 주례 자신의 자랑이 점점 길어져 그날의 주인공, 신랑은 빛을 바래가고 신부는 훌륭한 스승님을 둔 신랑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높은 구두를 신고 아픈 다리를 억지로 참으며.

 

한번은 강남 "P"호텔에서 전 직장 동료의 아들이 결혼하게 되어 많은  현대 OB들이 참석, 성대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주례는 신랑 아버지의 현대의 직장 동료였으며 친구 관계이도한 사람 좋은 전 중역 출신이 맡게 되었다.
주례는 주례를 맡게된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는지 주례와 신랑 아버지가 34년전 어떻게 인연을 맺었고 신랑의 아버지는 어떠한 사람이며 아버지는 현대에서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일을 했는지 얘기하느라  신랑 신부가 앞에 있는 것도 보이는지 않았나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정작 신랑 신부에게 별로  해줄말이 없이 주례께서는  내려오고 말았다.
주례사 뒤에 박수와 웃음소리속에서 신랑은 아버지의 참모습을 들으며 아버지를 닮겠다고 다짐했으면 좋은 주례사가 되었을 것이고 ,신부는 훌륭한 시아버지를 둔 것으로 만족하고 주례로 부터 아무런 당부의 말씀이 없어 둘의 행복은  스스로 개척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날은 둘다 사진작가인 신랑신부를 위해 신부측 하객으로 안사람과 결혼식에 참석한 날이었다.
주례는 신랑 부친의 친구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인사였다.
주례사가 일반적인 형식을 벗어나 길게 나가기 시작하더니 20여분의 시간동안  모든 하객이 주례의 얘기에 몰입이 되었다.
주례사가 끝났을 때엔 모두가 마치 한편의  문화강좌를 들은 느낌이어서 긴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 아니한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일까  문화의 향기와 함께 식사시 마신 적포도주 향이 입안에 오랜동안 가득한 느낌이었다. 


올봄 청주서 올라온 동문의 딸이 압구정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을 할 때다.
당연히 주례는 신부(Father)님이 하게 되었다.
단상에 선 염소 수염을 한 젊은 신세대 신부께서 말씀하셨다.
" 제가 아직 나이가 많지않아 주례사를 하기에는 좀 그렇고 주례사를 대신하여 신랑신부를 위해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나서 *"무반주 첼로"가 아닌 무반주 노래로 *"사랑의 서약", 그 어려운 노래를 끝까지 잘 불러 주셨다.
대단한 가창 실력이었다.
아마도 영원히 잊지못할 "주례사"를 들은 한쌍의 아름다운 신랑 신부여, 항상 행복할지니.

 


최근에 참석한 결혼식중에 처조카 결혼식이 교회에서 있었다.
주례는 분당에서 이름있는 목사님으로 비썩 마르셨으나 칼칼한 목소리로  주례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 되었다.
"저는 결혼을 주례할 때마다 결혼이란 참으로 위험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죄성 많은 신랑이 한몸을 주체하기도 힘든데 신부를 맞아 결혼한다는 것이나,죄성이 많은 신부가 자기 한몸을 지탱하기도 힘들터인데 신랑을 남편으로 섬기며 결혼을 한다는 것 .또 내집에서도 완벽하지 못한 목사인 내가 이 신랑신부를 위해 주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그러나....."
목사님은 성경위에 손을 놓고 맹세를 시켰고 혼례후 신랑신부 행진시 주례가 선물한 성경을 들고 행진하도록 당부했다.
이혼하지말란 내심의 다짐이다.


금년 마지막 달 12월도, 내년에도 끊임없이 결혼은 이어질 것이다.
이미 자녀들의 혼례를  다 치룬  동문들도 있고 아직껏 개혼도 하지 않은  동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할일도 아니요, 부러워 할일도 초초해 할일도 아니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결혼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요 끊임없는 A/S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 어느 주례말처럼 비록  신랑이 백마탄 왕자가 아니고 신부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아닐지라도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짝들은 숨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여 요즈음 인구가 감소하는 암울한 나라 장래를 생각한다면 주례사로서 "애국자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선남선녀에 대한 어떠한 화려한 찬사도, 어떠한 당부도 모두 용서가 되는 시절이다.
부탁컨데 결혼준비를 해오느라 피곤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신랑신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연민의 정과 함께 주례사가 조금더 짧아질 수만 있다면......

 


*<무반주첼로>

바흐의 곡을 말하는 것으로 파브로 카잘스( Pablo Casals)가 허름한 서점 같은 곳에서 악보를 발견하여 처음 연주 하였다.
40여년을 체험하고 연구하고 연습한뒤 레코드 녹음을 시작했다.
그는 이곡의 관한한 독보적 존재로 알려져 있으며 옛날  정말 활처럼 생긴 연주용 활을 현재 모습의 활로 개량한 것도 그이며, 첼로 아래 앤드핀을 발명하기도 했다.
"무반주첼로"는 피에르 프르니에(프랑스),므스티스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있으며 한국에 자주 연주 여행을 오며 한국을 좋아하는  마이스키(Mischa Maisky)의 연주도 있다.
파브로 카잘스의 최초 연주곡은 EMI에서 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저작권 유효기간이 지나 지금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첼로의 대가라면 한번쯤 연주를 꿈꿔보고 싶은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선 CF 배경 음악으로 쓰인적도 있다.
지난 11월 30일(2006) 광주에서 연주회를 가진 우리나라의 자랑이며 세계적 첼리스트의 하나인  장한나 (24세,수원태생.미국 하버드대 철학전공)의 무반주첼로를 먼 훗날 들을 기회가 오길 기대해 본다.


*<사랑의 서약>

        작사/작곡 : 김광진
        노래: 한동준(67년 5월생, 80년 후반"노래그림"이라는 구룹으로 데뷰) ㅡ결혼식 축가로 많이 불리운다.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모든 사람의 축복에
사랑의 서약을 하고있죠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 때
지금처럼 내 곁에서 서로 위로해줄 수 있나요
 함께 걸어 가야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우리들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 없다는 것을 믿나요
힘든 날도 있겠죠 하지만 후횐 없어요


   저 하늘이 부르는
그 날까지 사랑만 가득하다는 것을 믿어요
 이룰 수 없다고 슬퍼했던 날들
낯설었던 그 이별도 이젠 추억이라 할수 있죠
 함께 걸어 가야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우리들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없다는 것을 믿나요
힘든 날도 있겠죠 하지만 후횐 없어요
저 하늘이 부르는 그 날까지
사랑만 가득하다는 것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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