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동유럽여행

폴란드(E-16)

Jay.B.Lee 2007. 1. 9. 09:06

 

사진:폴란드 카토비체(Katovice) 역전 버스 종류장으로 아침 출근시간이어서 그런지 복작거렸다.


홀로된 여행자는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사람.
완벽한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L.Y

 

크라코프에서 바르샤와  까지는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원래의 계획을 준수하기로 했다.
바르샤바에 들린다면  폴란드 국립오페라 비엘키 극장에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1944년 나치들이 폴란드 저항 인사들을 극장의 폐허에서 총살했다는데 지금도 그 명단이 극장 정문 오른편에 붙어 있다 했습니다.
왜 2차 대전시 폴란드에는 유독 유대인들이 많았을까.
영국,프랑스,독일 및 스페인 ,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된 것과는 달리 폴란드에서는 환영을 받아 많은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했기때문 입니다.
폴란드는 그들의 부를 원해 폴란드의 경제재건에 기여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조차 후에는  나치의 행위에 방조하게 됨에 따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들이 3분의1에서 4분의 1까지 살해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명하지만 가장 잔인했다는 수용소는 아니며 "트레블랑카"나 벨젠 수용소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아우슈비츠보다 상황이 좋은 곳이 아니라 살아남아 증언을 해줄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 증거를 철저히 인멸시켰기 때문이었다.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 바르샤와를 침공한 후 10월1일 바르샤바를 점령한다.
1939년 10월16일 독일군은 바르샤와 도시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36만명의 유대인을 강제로 이주, 소위 "Ghetto(유대인 강제거주지구)"에 거주케한다.
1942년7,8월 거대한 이송 작전으로  31만여명이 대부분 "트레블랑카" 보내졌다.
이때 거주지역에서 독일군에게 저항한 공산주의자며 시오니스트운동의 지도자"모데하이 아닐레이빅(Mordechai Anielewicz)"가 JFO(유대인 저항기구)를 창설, 그가  이끈 폭동에 1943년5월16까지 한달간 탱크와 우수한 화력을 앞세운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며  그러나 저항세력 4만여명중 무장한 사람은 200여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에서 7천여명이 목숨을 잃고 3만여명의 생존자는 강제 이송 되었다
이 유대인들의 저항 운동사를 그린  영화로는 *"Up Rising"이 있다.
독일이 바르샤바를 포기한 1945년1월,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은 단 20명에 불과했다 한다.


아마도 생존한 20명중의 하나일 폴란드 유대인 음악가 블라디슬라브 스필만(1911-2000.7.6)이 있으며 그에 관한 영화로는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스필만은 "바이올린 콘서트" "기계같은 삶"을 작곡하였으며 그가 근무하던 라디오 방송국이 폭파 당한후 5년여의 전쟁의 공포를 체험했으며 독일 대위 "빌름 호젠벨트"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1946년 '죽음의 도시"란 제목으로 체험 수기가 출간되었으나 스타린 체제하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판금을 당하고 만다.
그네들은 부역한 사실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98년 아들 안드레이 스필만이 원고를 발견, "피아니스트"로 출간을 한다.
호제벨트 대위는 전직 교사로 1차대전에도 참전한 적이 있어 당시 나이가 많아 시설 책임자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종전 직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1952년 스타린그라드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스필만은 생전에 그의 구명에 실패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한다.
스필만은 전후 폴란드 방송의 음악감독을 하다가 바르샤바 5중주단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타계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2차 대전 영화가 있고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가 있지만"쉰들러리스트" ,"안네의 일기" ,*"낯선 사람들의 품으로"등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이기 때문 일것이다.
실화는 아니지만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영화론 제이콥의 거짓말(로빈 윌리암 주연),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트 베니니 감독,주연),소피의 선택(메릴 스트맆,케빈 클라인 주연)등이 있다.


1942.7월 설립되었다는 "트레블랑카"수용소, 소비브르수용소(1942년 5월설립),바우제츠 수용소가 3대 수용소로 그중에 가장 참혹한 곳은 트레블랑카 수용소라는 것이다.
그외에 다하우 수용소,마이데나크 수용소가 있고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브렌발트" 수용소도 있다.
처음에는 처리(?)해야 할 유대인이 많아짐에 따라 세웠다가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조직적이고 산업화된 생산능력(살해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자진 폐쇄되었다.
처음 아이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장교,지식인들이 붙잡혀 왔고 집시,유대인,폴란드 레지스탕스등 나치에 의해 "생존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 인종들이 끌려왔다가 나중에 유대인들이 오게 되었다 .
처음에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가  가스실로 끌려가 죽었다.
아우슈비츠의 능력을  Full로 가동시 9,000명을 살해,화장할 수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규모 살인공장의 능력을 보더라도 재래식 방법으로 집합된 유대인을 구덩이에 쳐넣고 총질을 하여 33,711명을 하룻만에 살해 했다는 "바비야르 대학살"을 생각하면 처참하고 끔찍하기만 하다.
학살의 책임자 블로벨대령은 뉘렌베르그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다.


결국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남긴 보편적 교훈이란 외국인 혐오증,인종 차별주의 ,반 유대주의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의 집단적 폭력및 범행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악"이 존재하며 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인간 본성이 악이라는 성악설을 남긴 순자가 지하에서 미소지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던가.
단일민족을 주장하고 외국인을 유달리 차별하고 혐오하는 우리도 "악의 존재"로 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바르샤바에서 *쇼팽((1810-1849)의 흔적을 찾거나 초라하다는 큐리부인의 기념관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여행중의 선택이란 포기란 미덕앞에 꼬리를 내릴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이민온 사람이고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출신 사이에 태어난 쇼팽은 공평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폴란드에서 20년을 살았고 나머지는 19년을 프랑스에서 살았고 그곳에 묻혔다.
쇼팽이 19세기 크라코프를 방문하여 애국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을 연주하여 이곳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떠났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는 것으로 쇼팽의 자취에 대해 만족하기로 했다.

유네스코에에 의해 문화도시로 지정된 크라코프,16세기 지그문트왕이 황금시대를 열었던 곳-크라코프의 글로브니광장을 더 돌아보았다.
아코디온과 실로폰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
행복이란 저렇게 한잔 걸친후  즐겁게 춤추며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ATM에서 교환했던 폴란드 즈오티(폴란드 화폐)를 다 사용하기 위해 저녁시간 문을 열고 있는 케이크 가게에 들렸다.
커다란 상자 안에 쿠키를 종류별로 가득히 담았다.
가격이 3200원정도로 너무나 싸서 돈을 다 사용할 수가 없다니!
호스텔로 돌아와 호주 아주머니들과 쿠키 파티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떠나기 위해 짐을 대충 꾸려놓았다.

중앙시장 ,광장,역 ,호스텔 모두가 익숙해질만 하면 이별이다.
이른 새벽에 냉장고에 넣어둔 요구르트,사과와 선식을 우유에 타서 아침 식사로 먹고 투숙 여행객들이 잠을 깨지 않도록 도둑처럼 숙소를 조용히 빠져나와 역까지 가는 지름길을 이용하여 역에 도착했다.
처음 크라코프에 도착했을 때 처럼 역은 한산했다.
옆에 붙어있는 버스 터미날에서 커피를 마셨다.
5월의 새벽이라 따듯한 커피에 온몸이 훈훈해졌다.
 식사후의 커피.
오랜 습관을 이곳에서도 유지 할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고 행복한 일이었다.
 

기차는 올때와 마찬가지로 카토비체에서  갈아 타야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올 때에는 프라하에서 출발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비엔나라는 것이다.
카토비체에서 환승을 위해 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지루함을 덜기 위해 지하 계단을 통해 역 대합실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라 대합실의 상점들이 몇곳만 문을 열었다.
 분위기가 크라코프와는 다르게 우충한 것이 폴란드의 낙후성을 보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남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쇼핑봉투들을 들고 가는 데 아마도 점심 도시락으로 짐작되었다.
대합실 밖의 육교 밑은 버스 정류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역 앞에서 쓰레기 통을 뒤지는 노인들이 보였다.
담배공초를 줍는 것이 아니고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훼스트 후드 레스토랑 앞의 쓰레기통처럼 먹다남은 감자튀김,콜라등이 있는 것도 아닐터인데.
자유화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것은 배고픔이 아닐까.
가방을 열고 어제 산 쿠키 한상자와 육포를 꺼내 구석에 앉아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건냈다.
다른 노인에게는 작은 사과 몇알과 남은 동전들을 다 털어 드렸다.
많은 일자리를 찾아 유럽  다른 나라로 간다는 폴란드의 노동자들 .
유럽 국가중 가장 불행하고 기구한 역사를 가진 폴란드다.
노인들을  최소한 굶기지 않는 나라가 되길 기원하며 바르샤바에서  막 도착한  기차에 올랐다.

 

참조문헌;
히틀러와 홀로코스트(HITLER AND THE HOLOCAUST) -로버트S.위스트리치 지음

 

사족이지만 독일 작곡가 * 바그너의 작품은 독일 민족주의 정신을 강조했고  군국주의 냄새가 물씬나 히틀러가 나치를 선전하는데 많이 이용했다.
바그너에겐 유대인들은 "우리 근대 문명의 사악한 의식"을 대변했고 "인류를 멸망시킬 탈을 쓴 악마"였다
현재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듣지 않는다.

*영화 Up rising

감독:Jon Avent
출연:행크 아자리아(고질라),데이빗 쉬이머(후렌즈,밴드 오브 브라더스),존 보이트,도날드 서드랜드,리리 소비스키( 딤 임펙트)
존 보이트는 저항세력 제거 책임자 Stoop 장군으로  악역을 또 맡는다.

*영화 피아니스트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애드리언 브로디(Thin red Line에 출연)

2005.5.12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프랑스,독일,폴란드,미국등 여러나라에서 제작비를 지원, 총제작비 3,500만 달러(420억원)가 소요되었다.
"전쟁이 예술가의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킬 수 있나"를 보여주는 영화로 피아니스트는 "유대인 주권옹호"가 아닌 개인적인 체험을 반영한 영화다.
폴란스키 감독은 자신이 체험했던 나치 점령기를 잘 묘사했다.
실제 본인도 어린나이에 2년간 게토에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다.
폴란스키는 "크라코프'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을 만났다.
스필만 역의 애드리안 브로디는 미국배우로 태평양섬에서 비행장 확보를 위해 미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를 그린 씬레드 라인에 나왔다.
일종의 반전 영화로 전쟁에서의 죽음에 대한 허무,정신적 고통을 그린다.
브로디는 스필만역을 위해 73키로의 체중을 59키로까지 14키로 감량하는 노력을 보였다 한다.
영화중 스필만이 연주하는 곡은 쇼팽의 곡으로 "Nocturne in D minor"와 "Ballade No.1 G minor"다.


*영화<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Into the arms of strangers) >


감독:마크 조나단 해리스
2차대전 발발 9개월전 나치의 유태인 말살정책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때 유태인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망명시킨다.
수많은 기록 필름과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된 다큐멘타리로 얼마나 방대한 자료를 모았는지 짐작이 간다.
망명한 어린이들중 대부분은 부모를 못만나고 만다.
대부분의 부모는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장하여 일부는 영국에 살고 일부는 미국으로 ,남미로,호주로 흩어졌다.
생존자중의 하나가 기록 필름중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생존 증언자자들의 어린모습에서 소년 소녀의 모습,청장년의 모습에서 다시 현재의 노년모습으로 넘어오는 사진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뜨거운 감동으로 눈시울엔 눈물이 맺힌다.

 

 

*프레드릭 쇼팽(1810-1849)

19세에 외국연주를 떠났고 20여년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6세에 리스트의 소개로 만난 죠주르 상드와 화끈한 연애를 했고 37세에 상뜨와 헤어진뒤 폐결핵으로 39세에 사망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음악과 민족주의를 배웠고 파리에서는 인생,사랑,예술,국제주의를 배웠다.
베토벤은 피아노를 위해 작곡했다는 말이 있으나 쇼팽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작곡을 했다 할  정도로 피아노곡들이 유명하다.
이별곡,빗방울 전주곡,영웅 폴로네즈,즉흥환상곡,피아노 협주곡등이 유명하다.
유해는 애국지사나 큰 예술가들이 묻혀있는 프랑스 피에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묘지에는 우리나라 이응로 화백도 잠들어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멋진 음악을 만든 천재에 가까운 작곡가지만 집세를 안내고 도망갈 정도로 사기꾼에도 가깝다.
독일 작곡가로 분류하면 낭만주의 시대에 속하는 작곡가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기부대의 기습장면에 사용된 음악 '발퀴레의 출동'(니베룽의반지)도 그의 작곡이며
오페라 "탄호이저", "로렌그린","트리스탄과 이졸데",'파르지팔"이 유명하다.
지휘자의 부인,코지마와도 연애를 하여 애도 낳았고  첫부인이 죽자 코지마와 결혼하여 리스트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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