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강릉 나들이 (2)-인생을 궁금해 하지 말자

Jay.B.Lee 2020. 2. 6. 10:24

 

 

 

 

 

 

" 연곡 보리밥집"을 나서자  도로 표지판에 사천면이 보였다. 

오랜 인연으로  지인 박종만 씨가 떠올랐다.

그는 회사의 거래처인 아메리카 은행(BOA)에서 일했었다.

퇴직 후 20여 년 전 우리 부부가 강릉 일대 여행 시 사천면 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낙향하여 전원 주책을 짓고  꽃닭을 기르고 있었다.

"금계 나라"

관상용 작은 닭들은 앵무새만큼 화려했다.

10여 년 전 사천면 지나며 그의 집을 찾지 못해 도움을 청한  면사무소에서  여직원이 엉뚱한 정보를 주었다,

서울로 이사했다고.

 7,8년 전 그를 테헤란로에서 만났을 땐 Head Hunter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중 반은 서울서 일하고 반은 강릉에 간다고 했다.

011로 등록된 그의 전화로 전화를 걸자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절대 바꾸지 않는다 했었는데.

20여 년의 기억을 더듬어 그의 집을 찾으려 하자  하얀 집은 보이지 않고 더욱이 주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마침 경운기를 타고 오는 분에게 물어보자  도로 초입 음식점 주인이  오래 살았으니까  알 거라고 했다.

 음식점에 일하는 아주머니는 이 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른다고 한다.

차에 돌아와 이것으로 인연도 끊어지는구나 하고 실망할 무렵   길가에 삐딱하게 새로 지은 집에서 할머니가 나왔다.

자기 땅에 지어 그럴 것으로 짐작하고 , 이곳 토박 이분이시라 믿었다.

이름을 대며 몸이 좀 불편한 분이라 하자  지금 이곳에 살고 있으며 집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집은 내가 기억하는 길갓집이 아니고 100여 미터 더 들어가 있었다.

문밖에는 박종만/서울댁으로 택호를 쓴 나무 문패가 얌전히 붙어 있었다.(동네에서 만들어 준 것이라고 )

갑작스러운 방문에 무척 반겨주던 박종만 씨.

거실엔 20여 년 전  취미로 치던 드럼들이 그대로 있었다.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시인으로 등단하였다며 시집을 가져와 아내와 나에게 한 권씩 서명을 하여 선물했다.

요즘 교보에서 잘 나간다고 한다.

몸이 불편해도 의지로 운동을 하며 극복했던 그가 계단에서 날아가 떨어져  4개월간 병상에서 다시 누워 있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시집을 펼쳐 서문을 보며 그가 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했음을 알았다.

오랜 세월을 인연을 맺어 오면서도 서로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독화살을 맞겠습니다>

 

                                              -박종만

 

나는 당신이 생각해주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배려심도 없고 욕심만 가득한

그런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나를 몰라보는

  당신의 아이 같은 순수함을 보고

 

언제나 나는 교묘히 이용하며

양의 모습으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훗날 내가 늑대라고 확신하고

독화살을 겨눈다 해도

 

난 당신을 끝까지 이용하며

양인 듯 앉아서 독화살을 맞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