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 주공아파트 재건축과 이주기

아파트 재건축 이주기(9)-80년대 부동산 .

Jay.B.Lee 2017. 8. 15. 22:01


사진: 내가 살고 있는 4단지 아파트

돌이켜 보면 결혼당시 집을 산것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 지나고 보니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로 인해 1가구 1주택 원칙에  따라 살다보니 무주택자가 아니어서 새 아파트 당첨이란 아예 꿈을 꾸지 않았으니까.

1974년, 대기업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여 무일푼으로 시작을 했다 

회사가 처음 상장하며 매입한 우리사주 조합의 주식은 당시 거액인 해외 차관을 도입하여  투자한 사업에 대한 일부 우려와 달리1년후 4배로 뛰었고 그 다음해도 적지 않은 수익을 남겼다.

76년 가을 안사람과 결혼 하기로 마음을 먹고 혼자 살집을 구입하러 잠실 시영아파트와 주공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시영아파트,주공아파트  13평을 보고  주공 아파트 15평을 본 순간 두평 느낌은 완연히 달랐다,

눈감고 과감히 구입하기로 결정한게 잠실 3단지 .

정남향 4층 ,15평이다.

225만원이란 가격의중 거의 반인 100여만 정도를  빌려 구입한 것으로 기억한다.

13평 짜리를 구입했으면 크게 자금에 크게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련만 15평을 본뒤여서 13평은 도저히 갈 곳이 못되었다.

당시 한달 봉급이 6-7만여원정도로 기억한다

그때는 잠실 주공 아파트 단지 입주를 장려하기위해 한시적으로 부동산 구입에 따른 취득세나 등록세 제도가 없었다. 

사촌형님에게서 30만원.적금대출 30만원, 회사 공조대여금 30만원 정도를 빌린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회사는 사원 복지를 위해 공조대여제도가 있어 저금리로 차입할 수 있었고 장기간 차입이 가능했다.

그외 국가가 의료보험 시행전 회사 자체에서 시행하던  의료 보험 제도는 국가나 타회사를 앞서가던 상당히  좋은 복지 제도였다.

뜻밖에 아버님은 매월 용돈을 드린 것을 쓰시지 않고 모아 놓으셨다가  결혼 비용으로 쓰라고 돌려주셨다.

 결혼은 간소하게 하였고 당시 결혼식은 국가의 강제 시책으로 "피로연"이란게 없어 크게 다행이었다.

"재건 데이트"란 말이 유행처럼 지난 뒤의 일이다.

조금 신경을 쓰는 집이라면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에게 수저 같은 작은 기념품을 주곤 했다.

대한 항공에 다니는 친구가 우정으로 마련해준 비행기 표로 부산 해운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온후 잠실 3단지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버스 내리는 정류장이 다르면  방향 감각이 없는 아내는 처음엔 사람들에게 물어 자기집을 찾아 오곤 했다.

낯선 아파트 생활의 시작이었다.

아내가 나중에 기억을 일깨워 매달 빚을 상환하고  남은 돈으로 오래동안 콩나물.두부 ,감자등을  먹어야 했다고 한다.

 아기를 가졌을 시기에 지금도 돌이켜보면 미안하다.


옆집에는 L 그룹 직원 신혼부부가 살았다.

충남 시골에서 <개천에서 용난 아들>처럼 그 부모는 아들이 해외 출장이라도 가면 서울에 올라왔다.

해외 출장이 귀하기도 했지만  또 귀국한다면 올라와 공항까지 배웅과 마중을 나가는 집안이었다.

서울에 오고 싶고 돈도 뜯어가고 싶은 핑계였다

윗집 5층에는 남편형제가  고아출신이라는 신혼 부부가 살고 있는 데 주벽이 심했다,

그 남편은 술만 먹고오는 날에는 부인을 벽에다 밀쳐 우리집 벽까지 울렸고   어느 날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착한 부인이 떠오른다.

둘사이에 이쁜 딸이 있었는데 결국 이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L그룹에 다니던 옆집 부인이 친정의 금전 문제에 휘말려 집을 팔고 떠난뒤  은행 커플이 이사왔는데 남편이 포커 중독이었다

주말을 포커로 보내고 일요일 아침 부인이 문을뗘 문밖으로 손을 내밀면 딴돈을 손에 쥐어 주어야 집에 들인다는 얘길 들었다.

 아무리 승률이 선수급이라지만 잃을 때는 돈을 꾸어서라도 줬을 것이란 추측을 했다

부산이 고향인 당차게 생긴 작은 부인은  부산 직장 은행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재태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등록세 취득세가 없는지역인 잠실에서 집을 꾸민후 (벽지와 커튼 정도지만 ) 5만원만 남아도 집을 팔고 이사다니기 시작했다.

 이삿짐은 간단하게 리어카로 두어번 옯기는 정도였다.

한 일년반 정도 지난후 우리는 그냥 연탄 아파트 베란다에 하얀 기저귀를 날리고 사는 사이 그들은 잠실 2단지에 몇동 되지않는 중앙 난방식으로 옮기더니 바로 5단지  31평인가로 이살했다.

롯데 World Tower 대각선에 5단지가 있다. 

복부인의 탄생이요 재테크의 명수였다.

왜 저런 부인을 얻지 못했나 말을 못해 그렇지 이웃들이 모두 부러운 눈치였다. 

그때 분발해  그래 우리도 "중앙 난방식 아파트"에 살아보자 마음을 먹었다.

  빚을 거의 갚은 때여서 큰 추가 자금 부담없이 둔촌동 지역으로 이사가기로 했다.

첫아기인 아들을 키우며 연탄 가스에 민감한 안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기도 했다.

회사 총무과 Pony  픽업을 빌려  계약을 하러간 날  둔촌동 복덕방 뒤(성내동)로는 풀밭이고 앞 주차장에는 흙이 펄펄 날렸다.

사람이 살지 않고 빈집인 5층 짜리 아파트 2층18평짜리 새아파트를 약간의 소위 "프레미엄"을 쥐어주고 전매자가 넘긴 아파트를 매입했다.

일년뒤 주택 등기  시기가 되어   최초 당첨자를  찾아 어딘지도 모르는 영등포 동네를 찾아갔다.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도장값을 치루고 매매증서에 인감 도장을 받아 정식으로 내명의로 등기를 했다.

전매를 금한 기간동안의 편법이요 너무 순진했던 시대였다. 

잠실도 회사 출근 하기가 멀더니  둔촌동은 더욱 멀었다 .

회사에서 막 생산한 차량 Pony가 나오며 회사 선배들과  Carpool을 하기 시작해 나중에 편하게 다녔다.

18평에 살다가 길하나 건너  3단지 고층 아파트  31평짜리 10층 남향 집으로 이사간건 몇년뒤다.

앞으로 150여미터 툭터진 전망하며 복도식인 아파트 복도에서 보면 얼마전 까지 살다온 5층 아파트가 달동네 처럼 펼쳐졌다.

이곳에서 살다가  해외주재원으로 발령받아 88년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   6월 캐나다로 떠났다.

11월 가족들이 합류하고 사연과 추억많은 5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당시 해외 주재원으로 나간 동료들의 부동산 투자는 각기 달랐다 '

나처럼 그냥 전세를 주고 전세 자금으로 땅을 사놓은 경우 (지인을 통해 부동산 대표가 등기해놓은 땅을 빼앗다시피 매입해  아내가 가보지 않은 바닷가 땅치곤 그주위에서 가장 좋은 땅이이었다) 

집을 팔고 전세를 끼고 큰 집을 사놓은 경우 -이것이 완벽한 방법인데 갑자기 회사 발령으로 그럴 여유들이 없었다

세놓고 관리해줄 사람 없다고 팔고  그 자금으로 주식에 투자한 경우는 최악이었다.

당시 국내 여신 한도 축소정책속에서 재정부서에 근무한 덕에 내가 어렵사리 국내은행 대출을 주선해

 집을 마련해준  도쿄에서 온 후배가 딱 그경우다.

2-3년 사이 집가격은  3배정도 올랐고 주식은 3분의 1정도로 하락했다.

그냥 해외에서 1센트도 사용않고 5년을 모아도 옛 집을 살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마치 시카고에 있던 그 후배에게는 항상 돈이 그를 피해가는 듯 했다.

이러한 국내 현상으로 붐이 분 캐나다 투자 이민자 부부들사이에 싸움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이혼했다는 얘기들도 들렸다. 

집을 팔고 이민와 사업 투자 를 물색하며 1년정도 기다리는 동안 국내 집값이 폭등해서다.

5년여 해외주재 생활을 끝내고 전에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4년여를 지낸후 10층 꼭대기 층이라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워 같은  34평으로 옮기자 얘기가 나온후 아내가 어느날 덜컥 집을 팔아 버렸다.

매물이 귀해 집을 내어 놓은 당일 아파트 길건너 우리가 살던 1단지 사람에게 팔린 것이다.

깎아 달란 얘기가 없어 이사비용정도  고려하던 우리는 1년 사용한 에어컨을 선물로 주었다.

이살 가면 벽걸이 에어컨을  살 계획이었다. 

생전 에어컨을 사용하지 못한 부인이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표정이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후  우리가 살려는 34평 매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 하나 있다는 매물은 정남향 3층에 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할 무렵 물건이 있다는 부동산 연락을 받았다.

 집을 둘러본후  마음에 들었으나 주인은 사람들에게 과거 기자였다는 자랑만 할 뿐(우리 부부에게도 했다) 돈을 더 주겠다고 해도 팔지 않는 미친놈이라며 부동산 소개소는 욕을 해대었다.

 6개월째 집을 내어놓고 저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다른 부동산 소개소를 끼고  함께 계약금을  들고 계약을 하러간날 10층 주인은 상계동 근처 딸네집  근처로 이사를 가긴 가야 겠는데 3일만 더 기다려 달라는 얘기다.

팔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이다.

그 날 저녁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었다.

다음 말 우리가 의뢰한 부동산 소개소에서 비장의 물건 하나가 딱 있다며  꺼내 놓은게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이다.

정남향에 아파트 동산 공원 뒤  3층이  마음에 들었고  마침 6층에는  사촌형이 살고있는 아파트였다.

 더구나  우연히 주인이 전에 같은 동에 살던 이웃이어서 서향집 가격에 5백만원을 더주길 하고 쉽게 계약을 했다.

 그때 우리가 서향 10층을 계약했다면 사는 동안 얼마나 끔찍했을까 .

이사한뒤 어는 날 식탁을 주방아닌 베란다 유리창 옆에 한번 가져다 놓은 후 전원주택처럼 앞동산의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한후 20여년동안 옮기지 않았다.

제멋에 사는 동안 돈은 우릴 비켜갔다.

돌이켜보면 잠실 15평짜리를 가지고 전세를 살았으면 부자가 되어 10여년전 아파트가 재건축된 그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둔촌동 대신 대치동 주공 아파트 를 매입했더라면 약 12,3년전 재건축한 레미안 에 살고 있을 것이다.

현재 그 곳 아파트 가격은 거의 14-5억원 수준이다.

인생이란 껄껄하며 지나간다. 그 것이 인생이다.

우리 부부에게 비빌 언덕이 있었더라면 좀 더 삶이 달라졌을까

그러나 감사하다.

아이들 이곳에서 키우며 출가를 시켰고 우리 부부도  행복하게 살지 않았는가.

4년뒤 재건축이 되어 다시 돌아오면 아내의 소원대로 아무도 산적이 없는 "새아파트"로 이사오게 된다.

이제 바라는 일은 단 한가지.

 건강하게 살아서 되돌아 오는 일만 남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