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두동교회 ,오른 쪽 양철 한옥이 옛 두동교회이고 왼쪽은 나중에 지은 건물이다.
익산 여행길에 두동교회를 빠트리고 싶지않아 교회보다 '예배당'으로 익숙했을 이곳을 들리고 싶었다.
나중에 돌아와 익산에 <나바위 성당>이 있다는 걸 알아 조금아쉽게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성당도 들렸을 것이다.
명동성당,공세리 성당,전주 정동 성당,풍수원 성당외 꼭 가보았으면 싶은 성당이다.
두동교회(杜洞敎會)
전라북도 지방 문화재 자료 제 179호
대한 에수교 장로회 한국 교회 사적 제 4호
위치 :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길 17-1
Tel)063-862-0238
두동의 원이름은 "막은골"이다.
마을 지형이 산들로 막히고 한곳이 터져 막을 두(杜)를 사용했다.
대부분 순수한 우리말 대신 한자로 대체한 지명들은 일본 강점기시대에 이루어 졌다.
이곳을 찾아 들어오며 지명이 성당으로 되어 있어 교회(개신교) 가 아닌 성당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킨다.
성당(聖堂)은 조선시대 이 고장의 열아홉 고을의 조세를 받던 "덕성창"이 있어 붙은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금산교회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1908년 전주 선교구의 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 교회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ㄱ"자 예배당,두동교회는 1929년 에 건립되어 (설립,1923년) 2002년 4월 전라북도 지방 문화재 자료 제 179호로 'ㄱ자형' 교회로서의 전통성을 이어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두동리 지역의 형성은 단종 폐위시* 박씨들의 피난처로 이곳 두동리(막은 골)에 머물게 되어 박씨 집성촌이 이루어졋다.
두동교회는 전주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미국 장로회 선교사 헤리슨(W.B.Harrison:하위렴)의 관할지역으로 실질적으로는 전도부인인 함경도 출신의 안신애의 복음 증거로 시작되었다.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가들은 의견서에서 "두동교회'ㄱ자 예배당'은 한국의 토착성과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일종의 현지 자립형 선교라 할 수 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하여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을 잘 살렸자"고 밝혔다.
특히 "남녀 유별적인 유교 전통이 막무너져간 1920년대에 오히려 'ㄱ자형'을 통해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고 했던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설명하였다.
1910~1920년내 집중적으로 지어진 'ㄱ자형'교회는 남녀칠세부동석 ,남녀 유별등 조선의 유교 전통 속에서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신앙인들이 고안해낸 절묘한 작품이었다.
두동 교회는 동서 방향으로 자리 잡고 ,양쪽 공간의 크기를 같게 만들었으며 ,강단도 남녀 성도 좌석 중간에 배치,남녀 평등의 의미가 강했다.
건립 초기에는 남녀 성도들 사이에 휘장만 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붕은 홀처마에 우진각 형태로 처음부터 양철 지붕이었는데 보존을 위해 아연골 함석으로 교체하였다(2003년 복원)
그런데 동쪽과 북쪽의 남녀 출입문 외에 서쪽과 남면 벽면에 각기 남녀 인도자용 출입문이 하나씩 더있다.
이것은 설교자 출입문이 나 있어 예배를 인도 했던 전도부인들의 역할이 목회자에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도 부인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설립 초기에는 민족의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성영학교(聖英學校)'를 세우고 구연직 선생(후에 담임으로 교역하시다가 해방후 한국 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을 초빙하여 10년간 초등 과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2011년 6월,대한 예수 교 장로회에서는 한국교회사적 제 4호로 지정 되었다.-교회에 비치된 안내문에서 >
*박씨의 본관이 표기되었으면 더 흥미있고 매끄러울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정책
초기의 선교사들은 갓 신학대학을 나온 선교 경험이 전혀 없는 열정만 가득한 젊은이들이었다
조선에서의 선교가 용이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H.Underwood는 본국에 도움을 요청, 선교 경험이 많은 분을 보내주길 간청하여 1890년 네비우스가 부인을 대동하여 2주간 조선에 머물며 선교 전략과 방법을 교육하여 그 방법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라 부른다.
The Nevius's Principle of Method라 부르는 것으로 自治,自立,自轉을 뜻한다.
원래 영국 Heddelsfief 교구의 목사였던 Henty Van 의 선교 이론에 근거하여 외부에 간섭을 받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원조 받지 않고 자기 교회를 운영한다 ,그리고 스스로 전도한다는 내용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비약적으로 전도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에 한국 기독교사에 분파와 분열의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종각은 2007년 복원한 것으로 시골 교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던 종각이다.
실제론 조금 낮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종지기는 새벽종을 울리고 어슴프레 잠이 깬 사람들은 또 잠이들고 조금 지나면 동네 닭들이 횟대에 앉아 새벽을 알렸다.
종소리에서 차임벨로, 이제는 소리 공해 규제가 되어 그나마 없어져 종교와 상관없이 세상은 점점 건조해져 가고 있다.
아내가 줄을 당기자 땡땡 거리는 종소리가 마치 아나로그 시대로 안내해주는 듯했다.
줄을 당기면 좌우로 흔들거리며 울린다.
"ㄱ"자 형태의 교회.좌측은 남자들이 ,우측은 여성들이 앉아 예배를 보았다.
사진에서 보는 쪽이 예배시 남성들이 앉는 곳이다.
지금 사람들은 한시간만 바닥에 앉으면 허리가 아파서 주리를 틀겠지만 당시는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강대상.당시의 십자가 형태가 아주 흥미롭다.
아내와 나는 잠시 앉아 기도를 드렸다.
여성 신도들 자리에서 보는 남자 신도들 자리.
중간의 인도자 출입분.
교회 앞 성도들의 빛바랜 사진이 역사를 말한다
강대상 왼편엔 남성 인도자의 출입문이다.
여신도들이 앉는 자리 뒤로 낡은 올갠이 있다.
소리가 난다면 올갠을 연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른다면 이 곳에들린 방문객들이 감동받지 않을까?
연주할 수 없다면 올갠으로 연주한 녹음 반주에 맞추어도 된다.
마침 익산시 문화 관광과에서 책을 보내준다고 하니까 연락하여 몇가지 건의 해보아야겠다.
갑작기 버스한대가 도착하자 남녀 성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교회의 방문자들인 모양이다.
마침 우리가 올 때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노인이 이곳 장로님이신 모양이다.
도착한 성도들에게 교회의 유래에 대해 말씀하시는 시간 우리는 떠나야 했다.
옛날처럼 남성과 여성이 구별해 앉았다.여성 성도들이 앉던 자리.
목사관 사택 마당에 핀 꽃
'국내 여행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진 정식 " 청자골 종갓집" (0) | 2015.05.26 |
---|---|
다산 초당 (0) | 2015.05.26 |
익산 왕궁리 5층석탑(王宮里 五層 石塔) (0) | 2015.05.26 |
짧은 남도 여행-익산 미륵사지 석탑 (0) | 2015.05.26 |
포천 아트 벨리 (Art Valley) (0) | 2015.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