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다산 초당

Jay.B.Lee 2015. 5. 26. 11:59

 

강진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다산초당이다.

다산이 없었더라면 강진은 초라한 지방읍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오후에 찾은 초당입구는 한산하다.

초당을 가기위해 예쁘게 조성된 흙길을 밟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되도록 천천히 걸어본다

맨발로 걸어도 될만큼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전해온다.

숲속 풀잎의  내음과 나뭇잎의 푸르름이 생명력을 더하는 5월의 마지막 주.

살아있음이 감사한 저녁이다.

 

 

 

 

가까이 앉은 새한마리가 손님을 맞듯 그자리에 앉아 자태를 자랑한다.

이름 모르는 풀처럼  이름 모르는 산새다. 

남도 유배길 표지판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한번 간길 뒤돌아 보지말라는 말이 있어도 고개를 내려오며 뒤돌아 보았다. 지금보다 좁았을 길을 다산도 수없이 걸었으리라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팔고 있는 찻집.

 

뿌릿길

 

다산 초당(茶山 草堂)/서암(西庵)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 (海南 尹氏))의 산정(山停)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 되었다.

1957년 다산 유적 보존 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동기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설명문에서

 

 

정다산 유적(丁茶山 遺跡)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  바로 다산 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신유 사옥)에 뒤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고성사 보은 산방을 거쳐 1808년 외가 (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 유표經世 遺表><흠흠 신서欽欽 新書>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설명문에서

 

 

동암(동암)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우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 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 하였으며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 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엄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현판중 보정 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 동암 茶山 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내려오는 숲길은 다른 곳을 택해 걸었다.

환상적인 해안도로 .자전거로 달리거나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걷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

 

물이 빠져 나간 갯펄.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보리다

초등하교 1학년때 보리밭 밟아주러간일,보릿대로 여치집 만들기,대학생시절 보리수확을 도와주고 몸이 찔려 고생하던 일이 보리와의 추억이다. 

 

들녁이 보리 수확철이어서 누렇게 변해있다 .

산의 푸른 빛의 아니라면 가을 추수맞이 때가 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역류하는 수로옆으로  무성히 자란 갈대밭

시골의 작은 "남녁교회"-이름이 좋다.

작은 종탑과 뒤로는 저수지 제방이 가로지른다.

 평화로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