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의 편지는 계속된다.
------------------------
유감이 많은 사람은 일기를 쓰는법이지요.
한 세월이 남간 유물-이 가난하고 초라해 빠진 일기장을 마지막으로 넘기고 나서도 아직 도사리고 있는 쓰디쓴 연민 같은 것.....
해서 나는 내 얘기를 가장 <善意>로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나머지 얘기를 하기로 작정하엿습니다.
부담없이 떠오른 한 이름 ,J씨.
바람이 몹시 차군요.
그리고 저 짙은 백색의 끝없는 가슴
밤새도록 눈이 쌓일 모양입니다.
이런 밤엔 詩가 意味있어 지는 것이겟지요
"*어느 머언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는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양 흰눈이 내려
하얀 입김 절로 가슴이 매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나 홀로 밤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의 여인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도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린다."
1970년과 함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대학 3학년 ,22살
그 여름과 그 가을과 그 봄의 추억등등
올해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주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여러가지 생각이 깊어지는 철입니다.
J씨,
X-Mas 랑 망년,신정 즐거울 수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부럽기도 하고....
난 통 즐겁지가 않았으니 말예요.
축제 분위기가 되면 공연히 쩔쩔 매는 버릇이 있거든요.
말하자면 소외감 비슷한 것 말입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걸 탐닉한다는 그 말.후웃
그만두죠.당신은 남자니까 내 웃음의 의미를 끝내 알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젠 중국영화 *스잔나를 구경햇습니다.
굉장히 마음을 울리는 영화였습니다.
생명과 시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소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
죽도록 살고 싶어도 죽어야만 하는 불가항력 앞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삶이 뜻하고 있는 귀중함을 느껴야했습니다.
그녀의 생명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고 내 생명이 30년 남았다고 해도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일테죠.
어느 순간에 죽음으로 뛰어들어 만사를 끝내고 싶은 충동을 정말 허다히 느꼈던 나야 말로 뇌암 같은 병에 걸려봐야 인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질게라는 철딱서니 있는 생각을 모처럼 해보았습니다.
겨울 방학은 사람을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로 만들어요.
요즈음은 읽을 만한 책도 없고 사전을 찾자니 귀찮기 그지없고 정말 무위도식하고 있습니다.
스케이트만이 유일한 친구인 듯 합니다.
아주 하늘 거리는 포즈로 얼음위를 쓱싹 달리는 기분.
이건 정말 내 기분을 잘 알아주는 일거리랍니다.
아까는 얼음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손목을 다정하게 잡은 커플이 내앞을 스쳐가길래 그걸 따라 먹으려다 꽝 나동그라졌지 뭐예요.
아유 어찌나 약이 오르던지 보따리를 싸가지고 기분 나쁘게 돌아 왔어요.
뭐 그러다가 이렇게 스텐드의 꼬마 전구를 밝혀두고 창밖의 윙윙 거라는 바람소릴 듣노라면 마음은 한결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J씨,
이젠 난 4학년이 되었군요.
내년 이 때쯤이면 난 무엇인가에 귀착되어 있겠고 고등학교때 즐겨쓰던 그 꿈이라는 것도 일단 끝내 버릴 것입니다.
두눈에 눈물 가득히 담고 선생님을 부르며 쓰던 그 여린 마음은 아직도 내안에 일렁이는데 난 많이도 커버린 셈입니다.
"내응자(*內應者)"를 춘추에서 읽으며 내가 커버린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건 실패작이예요
난 원고지 80장에 너무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후 캠퍼스에서 사람들은 날보면 의미있는 눈인사를 보내더군요.
허지만 "혜지"가 나일수는 없는 겁니다.
물론 키크고 말라빠진 여자의 스케취 여행이나 ,장난감이나,회색이나,샹송이나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가시낸 나 일수 있을 지 몰라도 ....
조xx씨의 "병사론"은 싫었습니다.
옛날 고등학교 2학년때 그 사람의 까맣고 뻔질거리는 눈초리 앞에서 내가 기겁을 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욱 싫었습니다.
그리구 신xx씨의 "구변술"도 역시-
그는 너무 말랐거든요.
이명진 양의 "당신과 나"와는 참 좋았습니다.
김규영 군의 "삼박골"은 정말 단편 소설의 묘미가 풍부한 작품이라고 생각 됩니다.
Y xx(*본인을 이름)의 "내응자"는 주인공 계집애가 너무 얄미워 싫구요.
계집애.
너무 자기 도취가 심한 가시내예요
J씨
저 하얀 눈빛을 보니 유리 지바고의 구멍 뚫린 장갑이 기억되는군요
전쟁의 와중속에서 그 자신의 고독감에 휘말려 라아라를 사랑하는 지바고.
그는 라아라를 위해 구멍 뚫린 장갑을 끼고 밤새워 시를 썼던 겁니다.
따듯한 것에 파묻혀 버리고 싶은 이추운 계절의 소망
내가 지바고 처럼 시를 쓰든가 아니면 지바고 처럼 시를 쓰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삭막한 시간들이 아직도 길게 남아 있습니다.
그 전 처럼 푸짐한 스케쥴을 작성하기도 어쩐지 멋적고.
그래서 24사간이 다가오는 것만으로 끝이 납니다.
낮엔 사전을 찾아 보려고 애를 쓰고 밤엔 스케이트,레디오,흥행 소설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얼음 위에선 젊음 과 건강을
레디오에선 인생과 자그마한 슬픔을
소설에선 공감과 커다린 슬픔을 각각 느낍니다.
메부리코 *존 업다이크의 "Rabbit ,Run"은 아직 남편이라는 존재를 갖지못한 23살의 처녀를 서성이게 만듭니다.
그건 정말 앙앙소리를 내어 울고 싶게 만드는 얘기들로 꽉차 있습니다.
J씨,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했으니 이제부턴 나 자신이나 인생이나 타인에게 좀더 진지해 지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난 정말 다혈체여서 어느 경우나 보통 이하의 양심에 기준을 두고 나를 합리화 해왔다는 건 되지못한 수작이였거든요
그 살을 에이는 바람
거기선 디스페레이트한 향락 같은 게 있어서 좋습니다.
J씨
인생에 대해선 참으로 초연해지고 싶은데 가끔 콱콱막혀오는 고독과 같은 건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정말 고독에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존재입니다.
정말 치사하고 구질구질한 사실입니다.
너무 길었군요
안녕히 안녕히 계시기를-
1971.1.7
AK
*김광균(1914.1.19-1993.11.23)의 설야(雪夜)
1938년 조선일보 춘추 문예 당선작.
김광균은 개성 출신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에 기여했다.
설야는 눈오는 날의 정경을 묘사햇고 상실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눈은 정화(淨化)를 의미한다.
한국 100대 명구(名句)에 김광균의 "먼곳에 여인 옷 벗는 소리"가 뽑혔다.
*차단한 :김광균이 만든 조어(造語),보통 차가운 뜻으로 이해한다.
*스잔나(Sussana )
홍콩 영화로 홍콩 영화 전성기인 1967년 작품이다.영화 주제곡 "청춘 무곡'으로 유명
리칭,관산,출연
한 남자를 사이애 두고 이복 남매가 삼각 관계를 벌인다.
남자를 차지한 동생은 자신의 삶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1976년 진추하가 출연, 한국과 합작영화 "사랑의 스잔나"도 있다.
*죤 업다이크(John Uodike)
1932-2009 ,미국
"Rabbit ,Run"은 1960년 발표된 작품으로 교교시절 농구 선수로 명성을 날리다 평범한 세일즈맨이 된 해리(레빗)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하는과정을 그린다.
한편으로는 평온하고 안정적안 삶을 살지만 지난날의 화려한 명성을 잊지 못하고 레빗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도주한다.
*내응자(內應者)
그녀가 대학 문예지 춘추에 발표했던 소설로 그녀가 군대로 우송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시절 여자에게 받은 편지(7) (0) | 2014.05.28 |
---|---|
군 시절 여자에게 받은 편지(5) (0) | 2014.05.27 |
군 시절 여자에게 받은 편지(3) (0) | 2014.05.26 |
군 시절 여자에게 받은 편지(2) (0) | 2014.05.26 |
군시절 받은 여자의 편지(1) (0) | 2014.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