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예보에 의하면 내일 비가 온다고 한다.
창덕궁 단풍이 7-10일까지 절정이라는데 기회가 없어 나 혼자라도 나서야했다.
오후 창덕궁 포함 "후원"(비원: Secret Garden)의 마지막 투어팀에 합류했다.
후원은 해설자를 따라 입장하여야 하며 단독으로 관람을 할 수 없다.
창덕궁 입장권과 후원 입장권을 동시에 사야한다
내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와 달리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혹시하여 우의를 준비하였는데 사진 찍기는 우의가 편하다.
후원은 약 10만평으로 부용지-주합루-애련지-옥류천-연경당으로 이어지며 관람을 한다.
처음엔 "금원"으로 불리우다가 나중에" 비원"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창경궁 후원
비원이란 후원을 관리하던 기관의 이름이기도 했다.
일본 강점기 시절 부르던 이름이라하여 비원이란 명칭은 공식적인 이름에서 사라졌다.
오늘 후원을 찾은 것은 건물들의 역사적 배경보다 후원의 가을 정취를 보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조선 시대의 궁궐중 원형이 잘 보존돤 창덕궁과 자연과 조화를 잘이루는 한국적 특성이 잘 반영된 궁궐 정원 후원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지(芙蓉池)
주합루는 1층은 도서를 보관하는 장서고였고 ,2층은 열람실로 주합루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은 전체 건물을 주합루라 부른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완성되었다.
문이 세개로 큰문은 왕이 두개의 작은 문은 신하가 드나 들던곳이다.
신하의 문이 작은 것은 허리를 굽혀 겸손하고 복종하라고 만든 것이다.
정조가 힘들게 신하들 휘어 잡느라 보낸 고난의 시간을 짐작한다.
헌법 재판소엔 소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고 큰 교회 엘리베이터엔 당회장 목사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
다 같은 한국인의 DNA에서 흐르는 권위의 맥락이다.
정조가 쓴 현판이 있다.
부용지.
부용정은 숙종 (1707년)년 지었을 때" 택수재"라 부르던 것을 정조가 "부용정"으로 고쳤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원리에 따라 열십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다.
주합루
대나무 울타리는 "취병"이라 부른다.
연화당-과거 시험장으로 사용하던 곳.
인재를 등용하자는 과거 제도야 훌륭한 제도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관을 제외하고 문관 시험을 오로지 시로서만 평가했다는 것은 정말 웃으운 제도다
시만 잘지으면 뭐든지 잘한다 ?
김한길이 글 좀 썻다고 정치를 잘할 것 같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부용정
부용정과 인공섬
어수문(魚水門)
정조의 친필로된 편액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고기와 물로 비유한 것이고
물과 물고기처럼 백성과 임금은 떼놓을 수 없다는 걸 명심하라는 문이다.
왕중엔 백성을 떼어 놓고 줄행랑을 친 왕도 있었다.
조선 역대왕중 개인적으로 제일 어리석은 왕으로 간주하는 "선조"다.
오랜기간 전쟁에 대한 수많은 예고와 "10만 양병설"을 귀담아 들었어도 이 강토가 왜놈들에게 짓밟히고 수탈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판단력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왕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서울을 사수한다고 해놓고 먼저 도주했다.
긴박한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은 마음만은 국민과 함께 했을 것이다.
불로문(不老門)
모사품으로 경복궁역과 인사동 찻집(종로 경찰서 뒤)에 하나가 있다.
왕들이 나약해 수명이 짧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만든 불로문(不老門)
평상시 태조 이성계를 본받아 무인처럼 말을타고 사냥도 하고 운동을 많이 했더라면 오래 살았을 것이다.
통치하는데 도움도 되고 .
아니면 궁궐이라도 많이 걷던지.
후사를 만들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헌종도 있었다.
강화도령"철종"을 데려다 허수아비 왕을 만들고.
조선 왕들의 하체가 부실함은 조선조의 불운으로 이어져 대한 제국의 멸망의 원인이 된 셈이다.
애련지의 애련정-연꽃이 핀다는 애련지.
처음엔 22개의 정자와 6개의 연못이 있던 후원은 현재 18개의 정자와 6개의 연못이 남아있다.
원래 반도지(半島池)로 불리우며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일제가 지형을 고친 못이다 .
지금은 "관람지(觀纜池)"라 부른다.
창경궁을 도서관과 동물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왕조를 ,정신을 모욕하고 왕비를 시해한 전세계 역사에 보기힘든 만행을 저지른 놈들이다.
그들의 소행이 어디 하나 둘인인가.
멍청한 김영삼 대통령이 잘한 것을 든다면 금융실명제와 경복궁내 조선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파내버린 것이다.
"관람정"이라 부르는 정자는 부채꼴 모양의 유일한 정자다.
반월지(半月池)
존덕정(尊德亭):1644년 건립-2층 지붕 구조를 갖춘 정자로 기둥이 2층의 지붕을 받치고 있다.
가는 기둥에 2층지붕이 무거워 보이나 기둥이 안과 밖으로 이중 구조로 기둥으로 받치고 있어 힘의 분산이 잘 이루어 지게 지은 정자임을 알 수 있다.
정조의 현판이 있다.
옥류천-물이 흐르며 인공으로 판 작은 바위 틈을 따라 폭포처럼 가는 물줄기가 흐른다.
큰 바위인 소용암(逍遙巖)위에 인조의시 한수가 새겨져있다.
"날아 흐르는 물은 삼백척이요,아득히 떨어지는물은 높은 하늘에서 내린다.이를 보니 흰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번개를 이룬다"
인조는1636년 소요암을 수평과 수직으로 되게 깎은 뒤 수평면에 물이 돌아 흐르게 바위에 홈을 파고 수직 바위에 홈을 파서 인공 폭포를 만들었다.
옥류천이란 글씨는 인조가 쓴 것이라고 한다
산책후 왕이 약수를 마시던 곳.
왕들이 드 넓은 후원에서 매일 조깅이나 산책을 했더라면 하체도 튼튼하고 장수했을 것을.
창의정-지붕을 기와대신 볏집으로 지붕이엉을 얹었다.
백성의 농사를 중히 여겨 임금이 벼를 심고 추수하며 권농행사를 했다는 작은 논.
최소한 벼와" 쌀나무"를 구별할 줄아는 군주가 되어야 했다.
연경당(演慶堂).
효명세자(1809-1830:정조의 손자,순조의 아들,헌종의 아버지)가 사대부집의 생활양식을 알기위해 지은 사대부집 형태로 지은 집.
보통 사가에선 99칸 집을 지어야하나 이곳에는 왕가의 위용을 고려해선지 120칸의 집을 지었다.
한칸은 기둥과 기둥사이를 의미한다
후원에 자리한 "연경당."
일반 사대부 집이어서 단청이 없어 더 우아하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며 문이 두개인데 사랑채 문은 말을 타고 지나 갈수 있도록 해서 문이 높다.
자녀를 위한 서당,서재로 사용하던 "선향재(혹은 선향정)"
서향에 빛이 들어 동판으로 반지붕을 만들고 차양을 덧대어 각도를 조절하여 햇볕이 드리우는 걸 막았다.
주방을 맡은 별채. 붉은 굴뚝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두개의 문
집안에서도 사랑채에서 안채안방까지 문이 통하게 지은 집이다.
700년 되었다는 창덕궁 향나무 . 몇년전 "곰파스 "태풍에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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