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꼴좋다라고 한다면 남의 잘못된 일에 고소해하는 부정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발음으로 본다면 파격적이다.
잘못 전달될 수 있는 책 제목 자체가 콤마 하나로 인해 디자이너의 기본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감탄과 재치가 넘친다.
"꼴 ,좋다"-사실 이 책은 읽으려고 내가 구독한 것이 아니고 박종서 교수가 우송해 준것이다.
사연은 이러하다.
조선일보에 박종서 교수가 내년 파주에 자동차 디자인 박물관을 연다는 기사를 읽었다.
200여점의 자료는 겨우 확보했지만 지금은 자료들이 거의 없어져 고심한다는 얘기였다.
그 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스쿠프(Scoupe)와 엘란트라 칼러,흑백 사진들과 영문 카다로그들이 생각났다.
캐나다 호수 옆에서 찍은 자료 사진들로 크기는 A4지 보다 조금 작다.
몇몇 후배에게 물어 자동차 박물관을 준비하는 부서라도 있다면 기념으로 가지고 있던 다른 자료와 함께 제공할 생각이었다.
현대차의 자동차 박물관 계획은 부끄럽게도 요원하다.
다행히 스크프(Scoup)를 디자인한 박교수의 전화 번호를 알아내어 박교수와 통화후 자료를 자택으로 우송해주었다.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집으로 우편물이 왔다.
박교수가 보내준 것이다.
"꼴,좋다"-책한 권이 들어 있었다.
책 장안에 표시가 있어 들춰보았다.
달필로 쓴 박교수의 메모다.
박교수와 나는 사실 한회사에 근무했어도 일면식이 없었다.
社友誌나 신문을 통해 박교수의 소식을 접한 것이 다였다.
박교수가 현대차 디자인 연구소에 있을 때 디자인한 스쿠프는 1989년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얼 근교 부르몽( Bromont)공장에서 소나타 생산을 시작한 이래 판매가 저조한 시기였다.
그 때까지 캐나다에서는 엑셀과 스텔라를 판매했다.
스텔라는 처음부터 엔지니어들이 수출을 반대했던 차로 기술적 결함을 가진 차였다.
무리수를 둔 스텔라 수출은 포니,엑셀등 저가이나 괜찮은 소형차라고 이미지를 쌓아 가고 있던 현대차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소형차에 이어 출시할 중형차가 없다가 부르몽 조립 공장에서 국내 내수형과 동일한 중형 세단, 쏘나타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캐나다와 캐나나보다 10배 큰 미국 시장의 판매는 저조하다 못해 처참했다.
그저 승객을 많이 태우고 내부만 넓게 만든 내수용 쏘나타는 Box에 바퀴만 단 Basic Transportation이라고 현지에선 혹평을 퍼부었다.
13개 캐나다 자동차 공장중 몇개는 결국 문을 다을 것이며 그 중 현대가 제일 빠르지 않을까라는 기사는 보통이었다.
현대차 본사가 돈이 많은 모양이라며 (Has a deep pocket) 왜 빨리 망하지 않냐고 신문들은 빈중거렸다.-결국 1996년 공장을 패쇄한다
스쿠프는1990년 몬트리얼 국제 자동차 모터쇼에 선을 보이고 1991년부터 캐나다 론칭에 들어갔다.
너무 단조로운 자동차 모델로 힘겹게 버티던 현대차로서 스쿠프는 단비였다.
스쿠프는 Sporty looking Car 이지 스포츠 카는 아니다.
스크프를 상징하는 뱀장어 같은 빨간" S" 자의 역동적 모양은 끝이 남자 성기의 귀두같다고 비난이 많았다.
또 Toronto 단과 대학인 "Seneca Colllege "의 심볼 마크 S와 아주 흡사해 곤욕을 치루었다.
그 곳에서 "스쿱"으로 발음하는 스쿠프는 현지 시리얼 회사의 제품인 Scoop과 코압(CO-OP)을 통해 광고를 공동으로 했다.
시리얼의 경품으로 현대차 스쿠프를 내 걸었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전혀 업종이 다른 회사끼리 공동으로 광고를 하는 Co-Operation 광고가 유행이었다.
박종서 교수는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홍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대한 도시바에 근무하다 현대차에 스카웃되어 1979년 회사에 입사했다.
1979년소위 "Second OiL Shok"이 세계 경제를 강타했을 때 기름값은 두배로 뛰었고 환율은 두배로 평가절하되었다.
1980년은 현대차에겐 12,000명의 직원중 4,000명을 정리하던 고통의 시기였다.
봉급인상은 엄두를 못냈으며 월급은 매월 일주일내지 열흘씩 미뤄지기가 다반사였다.
회사는 하루 하루 은행에서 대출(타입대:他入貸 -은행들은 하루 짜리 대출을 양편 넣기로 계산하여 년 24%의 이자 이틀치를 받아 어려운 기업들의 숨통을 조이며 쥐어짰다.몇년뒤 불공정 거래로 시정이 되었다 ))로 연명하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박종서씨를 영국 왕립디자인 스쿨 RCA(Royal College of Art)에 1980부터 -1981년까지 2년간 수학시킨 것은 故 정세영 회장(Pony 정)의 미래를 보는 식견때문었다.
당장 현재보다 먼 미래를 내다본 정세영 회장님은 정씨 형제중 유일하게 해외 유학(미국)을 하신 분으로 그래서 생각이 늘 앞서 있었다.
정회장님은 그 시절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사업을 하신 몇 않되던 경영인이시다
박교수는 귀국후 스쿠프를 디자인했고 이미 포니를 디자인 했던 이태리 "Ital Design "社와의 디자인 경쟁에서 중역들의 투표로 스쿠프로 결정 , 생산을 하게되었다.
그후 상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티뷰론(Tiburon)과 산타페등을 디자인하게 된다.
현대차를 떠난뒤에는 국민대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끊임 없이 배우고 가르키며 일하는 박종서 교수의 열정적인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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