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참 많은 박물관을 다녔다.
국내의 박물관중 공공박물관외 사설 박물관까지 서울및 근교를 중심으로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는 곳을 모두 추려 방문후 남은 곳이 두 곳이다
그중 하나가 등잔 박물관이다.
등잔하면 뵙지 못한 '증조모'를 떠 올린다.
시집오셔서 목화 농사를 지으며 밤마다 목화씨 기름 등잔 밑에서 일하시다 허기가 지면 먹다남은 장투가리를 긁어 한술 입에 넣으시곤 그 찝질한 맛에 물한모금 마시곤 일을 하셨다는 증조모의 얘기는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후 인삼 농사를 지으시면서 고조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3대를 거치며 천석꾼의 부를 이룬 중심에는 근면하셨던 증조모께서 계셨다.
등잔 박물관은 Lake side 골프 클럽 부근으로 이런 조용한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정몽주 '묘역을 지나 둥근 모양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등잔과 촛대를 중심으로 <등잔 박물관>으로 부르나 실제는 우리 민속품을 거의 망라한 귀중한 조상의 유물이 전시된 민속박물관이다.
부엌 살림살이,사랑채 에서 쓰는 물건들,안채에서 사용하는 가구와 살림살이,또 농기구까지 전시하여 한무리 아이들이 단체로 견학 온 것을 보아도 교육 장소로도 그만이다.
위치: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258-9
대표전화:031)334-0797
등잔 박물관 건물.
주인이 살고 있는 듯한 집밖에는수집한 맷돌이 가득하다.
조상들이 쓰던 멧돌은 분쇄기로 컴펙트하여 크지도 작지도 않아 효율적이었다.
근대 것으로 "심지"로 불의 크기를 조정하는 손잡이도 있다.
가장 흔한 호롱.등유가 나오고서 부터 유행한 등잔이다.어릴 때 시골 가면 흔히 볼수 있었던 등잔이다.
지승공예(한지로 노끈을 꼬아서 만든 공예)로 만든 등잔도 있다.
백자 쌍 촛대.
석유가 나오며 발달한 백자 등잔.쌍심지 등잔이 등장하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가 이에서 유래된 말이다.
좌등 ,말하자면 일종의 스텐드 렘프인 셈이다.
삼국시대의 토기 등잔.복제품이다.
고려 시대 청동 촛대
순라꾼이 사용하던 조족등( 照足燈)이다.
당혜와 짚신,미투리,나막신
돌화로와 인두,숯불 다리미,다디미돌.
등잔과 더불어 전시된 사방탁자,서안,활,전통,갓,초립,반닫이,약장,화로,벼루, 안경 ,줄없는 가야금,병풍등 선조들이 쓰던 물건이 너무 많아 찬찬히 둘러 보면 재미있다.
여인들이 살던 안채의 모습. 물론 양반 ,상류층의 물건들이다.
종이 반짇고리,실패,인두판,자
반닫이,약장,활,전통,사방탁자,죽부인,갓,탕건,초립등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다.
2층 전시장 전경.
粧刀,표주박,향합,비녀잠,참빛등의 여성 용품
놋화로,인두판,자,인두,촛대중 제일 많았던 나비 촛대
부엌 (饌房)살림과 등잔들
가마.먼길을 갈 때 안에는 요강을 넣었다.평상시 집에서 사용하는 요강보다 작다. 혹 소리가 날까하여 안에 짚을 깔기도 했다.
화촉(華燭)을 밝힌다)혼인의 의미)의 화촉. . 밀랍초는 상류층에 한해 사용하던 것으로 혼인 날에 한해 서민도 사용할 수 있었다.
신부의 옷인 원삼
쪽두리,비녀,기러기,노리개
사진으론 커보이나 실제 가지고 다니며 공부할수 있는 핸드북(11cmx14cm정도)이다. 마패,목침도 있다.
표주박
목침 하나가 호화롭다.
백자 연적
떡살
디딜방아,갈라진 나무사이에 혼자 혹은 둘이 발을 올려 곡식을 빻던 가장 기본적인 방아다.중간에 손을 잡는 가로 막대기가 있어 몸의 균형을 잡으며 방아를 찌어 방아옆에서 곡식을 넣거나 퍼내는 이와 호흡이 잘 맞아야 했다.
"매통".-목매,목마라고 함
벼를 넣고 갈아서 곁벼를 벗겨내는 기구.
왼쪽 나무통을 뒤집어 오른 쪽 나무에 끼우고 양옆 구멍 에 손잡이를끼워 돌리면 윗 구멍으로 들어간 벼와 곁벼가 함께 파여진 홈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구조다.. 생전 처음 본 농기구다.
미니 절구에 옆으로 튀지 말라고 나무 함지를 대었다.
구유와 나무 바가지
목화씨를 빼기 위해 사용하던 "씨아"
길마:짐을 싣기 위해서 소의 등에 안장처럼 얹는 도구
멍에:(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 매기 위하여)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은 나무
"멍에를 메다"란 표현이자주 사용되 듯 조상들의 삶을 좇아 질곡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멍에를 벗어 날 길이 없다.
곡식을 훑어내던 "홀태"
널어 놓은 곡식을 담거나 불타고 남은 재를 퍼낼때 사용하던 "삼태기" .그 흔하던 삼태기조차 희귀해져 사라지는 용어가 되었다.
요즈음 보기 힘든 "망태기"다.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겁을 줄 때 '망태기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했다. 망태기에 아이를 넣기 좋은 크기라
그런 말이 나왔나 보다.
다용도 "멧방석"의 촘촘한 고운 결에서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 나온다.
소나 말의 목에 걸던 워낭. 어린 시절 말이나 노새에 달아 달랑거리며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던 마차들의 소리가 향수처럼 되살아 난다.
영화 "워낭 소리"의 바로 그 워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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