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산책

회장님,회장님 우리회장님-왕회장님 사진 추모전

Jay.B.Lee 2011. 3. 12. 11:24

 

                   

벌써 10년이 지났다.고 장주영 회장 추모 사진전을 보기 위해 안사람과 함께 세종 문화 회관 전시장을 찾았다.

 

세종 문화 회관 건너 무교동(서울 파이난스 센터옆)에는 현대건설  사옥이 있었고  세종 문화 회관부근    현재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자리엔  수은 회관이 있었다.

수은 회관 건물엔  "현대씨멘트(주)"가 있었고 정회장님의 둘째 동생 정순영씨가 사장이셨다.

현대 시멘트는 나중에  성우 그룹의 모태가 된다.

현재 현대해상 본사사옥으로  사용하는 광화문 건물은 76년대 무교동과 서소문에서 이사온 현대건설과 현대 자동차가 본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계동 휘문 고등학교 부지를 사들여 현대 자동차가 한동안 사무실로 사용하다 계동 현대 사옥을 짓는다.

76년 시장에 처음 나온 포니가 세종로를 달릴 때 광화문 현대 빌딩 위에서 바라다보던 감회가 깊다.

건물 지하실엔 사내 식당이 있었고 년말이면 송년파티가 벌어져 정회장님의 즐겁게 18번 노래를 부르셨다 ,.

다음으로는 전혀 노래 하실것 같지 않은 고 정세영 회장님도 사회자에게 불려 나와 노래를 해야 했다. 

한번은 술취한 현대건설 직원들이 초청 가수로 나오는 "혜은이"씨 등판을 만졌다.

 단상위에 올라와  혜은이씨가 "현대 수준이 이정도인줄몰랐어요"하고 화가나 소리를  지르고

어수해진 분위기를 뽀빠이 이상용씨가 능수능란하게 마무리를 해 모두를 감탄시켰다. 

 

신입사원시절 무교동 비서실에 업무차 자주 갈 기회가 있었다.

간혹 오후 3시정도 회장님실로  설렁탕이 배달되는 것을 목격했다.

 일하시느라  바빠 식사를 못하신거다

5층식당엔 현대 자동차보다 늘 좋은식사를  제공했다.

정씨 일가들은  먹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그러나  음식을 남기는 것을 무척 싫어 한다

종업원을 잘먹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검소해야한다는 왕회장님의철학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를 나와  당대에 재벌이 되었다는 성공담보다   한국의 경제사에 빠질수 없는 역할을 담당하신 분이다.

누군가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정주영,이병철같은 인물을 동시대에 가졌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행운이라고 기술했다.

전 현대그룹직원으로 왕회장님을 회고하며 ,혹은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나이든 관람객보다 주말엔 젊은이들이많기 바란다.

 과거 도전적으로 살았던 기업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주지 않았으면 한다.

 

아침 일찍 식사를하시고 계동 사옥에 도착 회의를  하시던 회장님.

회사 소식에 보는 왕회장님은 집에서도 가족으로서  아버지가 아닌 무서운  회장님이셨고 남편이라기 보다  회장님으로만 비추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할까 마음이 설레셨다는 왕회장님.

그 설레임 때문에 사장들과 종업원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나 계셨을까?

 

정주영 회장님이 대통령에 출마하여 해외에 있는 현대 그룹 주재원들 까지 막판에는 모두 동원되어 선거운동을 도왔다.

비용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선거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현대 중공업등 주식을 현대 그룹 직원들에게 양도하여 종업원들중  나중에 많은 이익을 본 직원들도 있었다.

"동생, 내가 나이가 많잖아"

형님, 동생하던 김동길 교수에게 왕회장님이 후보로 먼저 출마하겠다는 변명은 하나의 일화로 남아 있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는 현대그룹에 대해 상당한 핍박을 가했다.

살아 남기 위해 군살을 빼야 했던 현대 그룹으로서는 이 핍박이 IMF에서 조처를 당하던 시절엔 오히려 득이 되어 충격이 덜했다.

 상징적 의미로 소를 이북에다 가져다 주고 이북과의 사업이 시작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정몽헌 회장이 죽었다

살아 생전 동생(정신영)과 장남 (정몽필;당시 인철제철 사장)을 잃은 정주영 회장님이  개인적으로는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보지 않은 채 먼저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었다.

정주영 회장도 김대중,정몽헌,노무현 모두가 역사의 한 순간으로 흘러갔다.

 

 

한시대의 영웅들이다.

고속도로 개통식

하늘에서 본 울산 현대 중공업 .거대한 크레인에 씌여진 Hundai .H자 한글자를 쓰려면 페인트가 두통이 든다 했다.

주요 외국의 방문객들은 울산 현대 자동차에 오면 중공업을 ,중공업에 오면 자동차를 방문하길 원했다.

중공업에 오면 수만명의 종업원을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통솔하는지 많이 궁금해 했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병역을 필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미국 포드 자동차와 기술 도입 계약 체결하는 귀한 서명식 사진이다.

승용차 Ford 20M,Ford  Cortina  씨리즈(영국 Ford),그라나다(독일 Ford)등  *CKD형태로 부품을 도입, 조립 생산했다.

영국에서 수입,조립한 트럭은 국내 도로 여건에 맞지않아  운송업자들에겐 한동안 "저주의 대상"이었다.

*CKD:Completed Knock Down Parts

이태리  "Ital Design"사의 주지아로가 설계한 국산 모델 포니.

2 Door Coupe까지 디자인 ,금형까지 개발되었으나 쿠페는 태어나지  못했다.

엔진과 미션은 일본에서  한물간 미스비시의 것을 처음 Assembly 상태로 도입,장착하였고 점차 국산화에 성공 국내에서 생산하였다.

수출용은 미스비시 assembly 엔진을 얹어 캐나등으로 수출했다.

어느 회사도 기술제공을 원치 않던 시절 ,일본 승용차 시장에서 우위에 있지 않던 미쓰비시와 현대는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기술 도입계약을 맺으며  미스비시 종합상사와 미스비시 자동차가 각각 15프로의 지분을 소유했다.

전두한 대통령시절 학생들은  "기술도입"이나 "자본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부와 함게 외국 자본이 들어 있는 기업들을 "매판 자본"의앞잡이라고 싸잡아  맹렬히 비난했다

그저 국산품 애용이 나라 사랑인것 처럼 배워온 그네들에겐 매국노가 따로 없었다.

지금 세계 자동차 시장에 우뚝선 현대 자동차를 보면 그네들은 무슨 말을 할까.

 

 

 

정주영 회장님과 동생 정신영씨와 함께.정주영 회장님께서  몹시 아끼시던  동생이었는데 타계했다.

한가정의 가정주부로서 정회장님의 "수많은 아들들"을 키워내신 변여사님.

평범한 가정 주부이시면서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영광스러운 국가를 만드는데  동참하였고 ,위태 위태한 순간들을 견디어 낸 <위대한 대한 민국 >국민된 것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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