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어머니와 Singer 재봉틀-어머니를 추억하며

Jay.B.Lee 2009. 5. 10. 18:19

사진: 액자 사진 속의 나와 누나. 입고 있는 옷들이 어머님이 만드셔 입힌 옷이다.(1950년  6.25직전인 4,5월경으로  추측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11년이 지났다.

현재 살아계신 장모님과 기미년생 동갑으로 1919년 유관순 열사가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던 해, 장터에서 2키로가 안되는 충남 병천면 가전리 에서 태어 나셨다.

옛지명은 잣밭으로 불리던 곳이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목촌 초등학교의  겉장이 헤어진 앨범이 있다. 

 검은 사진속에서 한복 입은 앳된 어머니의 소녀적 얼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많지 않은 학생중에 여학생은 더욱 적어서다.

 일본인 같은 교장과 선생님들. 황량한 교정,교실풍경,그리고 모두 함께 찍은 사진 등 7매 정도로 된  앨범이다.

 안동 김씨 집안에 태어나 집안 누군가(잊어 버렸다)의 중매를 통해 충북 영동 양산면 가곡리(각골) 천석꾼의 집으로 시집을 간것은 1935년,방년 16살 때다.

아버님의 관상과 자는 모습까지 살펴보고 가신 외가 친척 어른의 만족스러운 전갈에 외할아버지께서는 딸 5형제중 둘째인 어머님을 시집 보내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당시 워낙 곱고 인물이 좋으셔서 부잣집으로 시집 간다고 여형제들의  부러움을 안고 세살 위인 아버님과 혼인을 하신 것이다.

혼인후   새로진 큰 양철집으로 재금을 나며 부엌앞 마당에 박아놓은 펌푸와 그리고 Singer 미싱때문에 더 행복해 하셨던 것 같다.

큰 집에서는 당시  60여미터 앞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머슴의 몫이었다고 한다.

영동군내에 두대 밖에 없던 자전거중 한대(다른 한대는 영동 군청에 있었다 한다)가 큰집에 있던 시절이라 싱어 재봉틀의 가치란 지금의 상상 이상이다.

또 내가 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것보다 어머님은 안사람에게 가끔 옛 얘기를 하셔 안사람에게 들은 얘기들도 있다.

시집 온후 "천안댁"으로 불리우며   동서들과 재미나게 지내던 시절,가을 추수시 소작인들이 바리바리 볏섬을 소달구지에 가득싣고 마을 입구 부터 줄을 설때 처음 본 광경은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한다. 

그날은  귀한 소를  한마리 잡아 소작인들을 위로하고  온동네가 떠들썩 했다고 했다. 

안사람은 어머님의 얘기를 들으며 전에 읽은 "혼불"이 생각난다고 했다. 

고향에 사시다가 몇년뒤 영동읍으로  살림을 옮기신것은 아버님이 공무원으로 근무하시기 시작해서로 짐작이 간다.

내가 태어 나고 2년뒤  6.25가 터지고 고향으로 피난후 다시 영동읍으로 돌아와 누나와 찍은 최초의 나의 사진이 있다.

누나의 세일러 복이나 내가 입은 옷 모두가 어머님이 직접 만드셔서 입힌 것이라고  들었다.

 어머님이 미싱을 발로 돌릴때마다  어머님 옆에서 놀던 생각이 난다.

어머님은 재봉틀을 밟으시면서 가끔 노래를 혼자 웅얼거리며 부르시곤 하셨는데 어린 나도 어머니가 기분이 좋으신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나무 바느질 그릇 속에는  수를 놓은 바늘집이 있었고 바늘집 속에는 머리카락으로 채워 있었다.

바늘 집에는 작은 바늘 ,큰 바늘 까지 어떤 것은 실이 달린 채로 꼿혀져 있었다.

가끔 검정보 끝에 긴끈이 휘감긴  보자기를 풀면 여러가지 각종 헝겁조각들이  가득들어 종종 심심하면 풀러 보곤 했다.

보고 난후 다시 보자기에 둘둘 말아 끈으로 묶으려 해도 어머님이 처음 얌전하게 묶어 놓은 것처럼 되지 않아 어머니를  불러 대곤 했다.

어머님은 반짇고리에서  실이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실패가 생기면 나를 주곤 하셨다.

나는 잘 들지 않는 면도칼로 실패끝에 엉성하게 톱니를 만들고 고무줄을 감아 소위 "탱크"를 만들었다.

 방 바닥위의 책도 넘어가게  하고 얼마나 멀리 가나 두줄로된 고무줄이 다 풀릴 때가지 기다리곤 했다.

또 어머님이 재봉틀은 종종 나의 장난감이 되곤 했다.

 무쇠로 만든 발판을 앞뒤로 돌리면 가죽 체인이 움직이고 가끔 미싱 바늘이 오르락 거리며 내는 책각대는 소리가  좋았다.

미싱 앞에는 대여섯칸의 작은 칸막이가 서랍이 있었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동네 동산에 올라 상수리나무  고목구멍에  촛불을 밝혀 찌께벌레(사슴 벌레)를 잡아 실로 묶어  넣어두는 곳이기도 했다.

다음날 보면 다 도망가버려 늘 이상하게 생각하던 서랍이다.

미싱 오른쪽 큰 서랍에는 각종 실패와 강철로 정교하게 만든 작은 실패며 굵은 예비 바늘집이 있었다.

그리고 작은 양철통안에는  깔때기가 달린 푸라스틱 기름통이 있었는데 늘 퀘퀘한 냄새가 났다.

재봉틀에 치는 윤활유였다.

어머님은  종이본을 가지고 곱돌(활석)로 표시해가며 수시로 옷을 만드시거나 무얼  박아대곤 하셨다.

점점 사입는 옷이 많아지고 재봉틀 사용할일이 적어진데다 방구석을 크게 차지하는것이 못마땅하셨는지 어머님은 재봉틀 개조하는 곳을 알아가지고 오셔서 "앉은 뱅이"재봉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정도 일 것이다.

개조한 재봉틀은 발로 밟아 축을 돌리는 대신 손으로 휠을 돌리면 되었다. 

나무 케이스도 완전히 새로 만들었는데  재봉틀 스텐드겸  보관 상자 역할을 했다.

 

우리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막내까지 직장을 따라  서울로 떠나올때 어머님은 아버님이 돌아가신뒤에도  계속 혼자 청주에서 사셨다.

워낙 살림 살이 좋아하시는 어머님인지라 혼자 사셔도 심심할 틈이 없이 사셨다

말하자면 혼자서도 잘 지내시는 타입이셨다.

오죽하면  아버지 생각이 나지도 않냐고 자식들인 우리가 핀잔까지 줄 정도였다.

아버님 기일이나 기억할 뿐 뇌졸증으로 쓰러져 한참동안을 아버님 뒷바라지에 힘이 들어서 흔히 정을 떼어서 그랬다기 보다 원래 어머님의 성격이 그러셨다.

형제들이 종종 번갈아 어머님을 방문 하는 동안 1995년 ,77세 되시던 해 어머님은 나에게 이제 힘이 없어 혼자 사시기 어렵다고 말씀을 꺼내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렵사리  말씀을 꺼내셨을까.

어머님께  힘들면 말씀하시라고 늘 말하긴 했어도 진작 어머님이 정작 힘들고 외로울수 있다는 생각이 미리 미치지 못한것이 후회가 되었다.

어머님께서 차남(밑으로 두 남동생도 있다)인 나에게 말씀 하신 것은 며느리중 아내가  제일 마음이 편해서 일것이다.

또 반찬도   다른 며느리에 비해 입맛에 맞게 해드리기도 해서다.

제수씨들이 맞벌이란 이유는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어렵게 꺼내신 말씀에 그러면 함께 올라 가시자고 했다.

단 어머님이 쓰시던 모든 살림살이 다 포기하실수 있겠냐고 물어야 했다.

며느리 살림살이가 다 내것이라고 생각하고 쓰시면 된다고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믿으시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큰 결심을 하셨는지 고개를 끄덕이셧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결단인지 안다.

 어머님의 모든 추억이 남아있는  살림 살이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오랜동안 함께 벗이 되었던 교회의 교우들과 헤어지는 아픔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교우들과 청주에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셔서다.

어머님이 새색시때 수놓은 두개의 액자-하나는 한반도를 수놓은 것이고 하나는 목단꽃이다-는 동생들이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쓸만한 주방기구, 제수씨가 사다드린 새 청소기등은  제수씨가  가져갔다.

 아파트 밖에 내 놓은 가구및 부엌 살림 살이등은 다음날 아침 대부분 사라졌다.

어머님이 쓰시던 Singer 재봉틀은 아파트 5층에 사시는 친구분을 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서울로 올라 오시며 가져 온 것은 이불 한채와 어머님 옷 몇벌 과 식혜가 아주 잘된다고  다른 사람 아닌 며느리인 안사람에게 꼭 주겠다고 한 전기 밥통이다.

 어머님이 취미 삼아 모아 두셨던 많은  각종  원단 자투리들은 옷과 함께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귀해진 고급 삼베 자투리만 가지고 오셨는데 재봉틀이 없어도 다른 용도로 쓸수 있어서 였을 것이다.

어머님 과 아버님을 기념할만한 것으로 내가 서울로 가져온 것은 나무로 된 함 가방과 아버님이 일본과 경성(서울) 여행시 쓰시던 왜정시대때의 회색 트렁크 한개 와 집안의 앨범들이었다.

서울로 모시고 온지 일주일 ,어머님은 다 부질없었다고 하시면서도 한가지 재봉틀이 아쉬운 눈치셨다.

갓 시집와 새색시 살림 살이로 사주신 재봉틀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으셨을 것이다.

나는 당장 어머님 친구분께 전화를 올려 죄송하다고 사정을 설명하고 일요일 청주에 내려가 앉은 뱅이 재봉틀을 차에 실었다.

어머님께서는  서울에  오신후 가끔 교회도 가시고  아파트 앞 등나무 밑에서 노인들과 사귀어 얘기도 나누며 소일을 하셨다. 

 안사람은 어머님을 생각하여 가끔 먹을 것을 싸들고 아파트 동네 노인네들을 대접하곤 했다. 

어머님은 종종 재봉틀을 사용하셨는데 한번 붙드시면 두세시간은 삼매경에 빠지신듯 힘들다 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안사람은  재봉틀을 다시 찾아 온것이 백번 잘한 것 같다고 했다.

재봉틀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만이라도  어머님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름 어느 날  어머님은 삼베로 만든 상의 세개를 내 놓으셨다.

러닝셔츠 타입 저고리로  앞에 똑딱이 단추가 달렸다.

 하나는 내 것이고 두개는  두 동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삼베의 천이 모자랐는지 덩치 큰 형님것은 없었다.

너무 시원하게 잘 만들어 그해 여름 잘 입었다.

 자주 입는 것이 어머님이 기뻐 하실것 같아서였다.

3년후 어머님은 우연히 발견한 간암이 진행되어  돌아 가셨는데   삼베 저고리는  어머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고가신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어머님 께서는 큰 고통없이 돌아가시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대로   고통없이 돌아가셨다.

 혹시 하여 아침부터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날 어머님은 갑자기 누은 자리에서 반쯤 벌떡 일어나 눈을 감으신채 "모두들 <양산>으로 가는겨 ?"하고 말씀하셨다.

"예 모두 가요"내가 대답해 드리고   누워드렸는데  그것이 어머님과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어머님의 눈에는  근심 걱정없이 동서들과  지내던 새댁 시절을 꿈을 꾸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먼저 돌아가신 큰어머님 ,작은 어머님들이 눈에 보이셨나 보다.

80년 ,아버님 돌아가실때나 어머님 돌아가실 때 두분 모두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 나의 복이라고 믿는다 .

어머님을 아버님 곁에다  장례를 치룬후 남은 재봉틀은 어머님이   4남 1녀 형제중 유일하게 관심을 많이 쏟았던  영동에 사는  동생이 가져가고 싶다기에 주고 말았다.

어머님의 걱정을 ,사랑을 더 받은 동생이라 어머님을 더 추억하고 싶을 것이라 믿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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