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절, 군대,군에서 받은 편지들 41

실미도 사건-실미도를 찾아서

사진:잠진도 페리 선착장 쉽게 올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 오랜만에 친구들과 무의도를 가볍게 산행하고 실미도를 가보기로 했다 꼭 가보고 싶었던 실미도였다. 71년 8월 23일-그들은 야간 해안 근무 후 아침 취침 후 막 잠이 깰 무렵 우리 부대를 통과했었다. 잠진도에서 30분마다 있는 페리로 무의도로 들어갔다. 차로는 인천 국제공항이 있는 영정도를 거쳐 과거 용유도로 거쳐 잠진도에 이른다 잠진도. 무의도 -생가보다 큰섬으로 산을 종주하면 4-5시간이 걸린다. 무의도 선착장 무의도 선착장에서 본 페리.290명정도 승선 가능하고 30여 대의 차를 운반한다. 뒤로 보이는 잠진도. 마을버스(1,000원/일인)로 섬 중간으로 들어가 실미 유원지로 내려가기로 했다. 바닷바람이 있어 아직 새삭이 나지 않은 나무들 실미..

실미도 ,북파공작원 유족의 소송

주간지(일요주간) 의 거창한 제목을 보고 샀으나 비교적 간단한 기사로 스크렙 해두었던 자료다 취재-김진호기자 영화로 까지 제작돼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하며 널리 알려진 "실미도(북파 공작원)"부대원이 혹독한 훈련을 받고 실미도를 탈출해 육균과 교전하다 사망한 3명의 부대원 유족들이 국가를 ..

실미도 - 군대 이야기.

군제대후 3학년 1학기에 복학한 학교에는 나보다 먼저 입대하여 복학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언젠가 그 친구중 하나와 군시절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강릉에서 공군부대에 근무중 실미도로 차출이 되었다가 자신보다 복무기간이 더 남은 사병이 가는것으로 바뀌어 자신들의 운명은 생과 사로 바뀌었다고 했다. 실미도에 갔던 후배는 그곳에서 죽었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죄책감까지 든다고 고백했다. 1971년8월 23일 12시 ,야근근무를 마치고 아침 취침에 들어가면 12시에 정확하게 기상해야 하는 해안부대 생활이었다. 통신병 김상병이 "아니 저놈들은 뭐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12시가 거의 되어 일어날 시간이었다. "비~상" 막 군복을 주어 입은 우리는 탄약 창고에서 실탄을 꺼내 비호같이 송..

W의 비극(2)

"10x연대 1대대 3중 대장 K 대위 , T하사 그리고 3소대 W 상병 수류탄 사고로 사망" 3주 전까지 얼굴을 보며 한솥밥을 먹었던 W상병이었고 늘 군인 같지 않게 온화한 모습으로 부대원을 통솔했던 중대장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안산시의 일부가 되어 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경기도 군자면 성곡리가 우리 중대가 있던 곳이다. 당시 협궤열차가 다니던 수인선의 중간에 원곡역이 있었고 소래 부근의 대대본부에서 스리쿼터를 타고 황토가 날리는 길을 따라 원곡에서도 4킬로를 더 가면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중대 본부가 있었다. 비가 오면 황톳길에 차가 빠져 차가 움직이지 못해 부식을 수령할 희망자를 두명씩 차출하여 원곡까지 보내곤 하던 곳이다. 그것도 외출이라고 밖의 공기가 그리운 사병들이나 혹은 술을..

W의 비극(1)

70년 1월 소사에서 겨울을 맞았다. 겨울이야 같은 겨울이나 군대 와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나는 *3X사단 10X연대 1대대에서 연대본부 인사과로 전출 명령을 받아 다시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야 했다. 70년 1월 초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인사과에 연탄난로를 피워야 했고 가끔 제일 졸병인 군번 12,000,000번인 이병을 도와 무연탄 창고에 가서 무연탄에 황토와 물을 적당히 넣고 개어 함께 들고 와야 했다. 특이한 군번을 가졌던 그는 지금 어디서 있는지. 사단 인사부에서 군번이 아주 좋다고 어디든지 본인이 원하는 데로 보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했다. 소위 "와르바시" 군번(군번이 11로 나가 젓가락을 뜻함-논산훈련소와 달리 *총번을 받은 예비사단 출신은 잘 모를 수 있다)인 나와는 격이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