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사는 이야기

유명인사의 싸인(Autograph)

Jay.B.Lee 2008. 3. 24. 22:03

사진 -인사동 골목의 어느 카페

 

 

내가 세상을 삐닥하게 보면서 존경스러운 사람이 없다던지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다던지 해서 유명인의 싸인받기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명 인사라면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가며 그들의  자필 서명을 받아 명예 훈장처럼 간직하며사는  사람의 노력과 열정엔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다.

단지  개인적으로는 싸인을 받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아서다.

살다보면 책 저자에게서 '惠存 XXX님께 하며 서명이 든  학술서적,수필집등 몇권의 책을 받은 것도 같은 데 보관하고 있는 책은 한권도 없다.

서명이 된 보관 물건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딱 세가지뿐이다. 

하나는 그림 전시회 브로셔다.

한 7,8년전 예술의 전당에 안사람과 갔다가 전시회장을 기웃거리면서 준비중인 것 같아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 전시회를 둘러 보았다.

申東憲 화백이 그린 음악가들-지휘자 ,연주자,성악가들을 직접 만나 그린 그림들로 정말 캐리커춰 답게 예술인들의 특징을 잘 잡아 잘도 그렸다.

옛날" 날쌘돌이"를 그린 고 신동우 화백과는 형제였던든가 생각을 하며  북치는 사람의 그림 앞에 섰다.

수십명의 음악가중에 그 그림만 유일하게 이름이 없었다.

외국인들은 다 이름이 있는데 오직 한국인인 그에게 이름이 없다니..

나는  준비를 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저기요,저분 이름을 아는 데 써 놓을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 !이분이  저분 이름을 아신데요."아가씨는 구석에서 일하고 계신분을 향해 소릴 질렀다.

베레모를 쓰신 화백이 오시는데  신동헌 화백이었다. 아가씨는 따님이고.

신화백도 단 하나의 그림에 이름이 없어 좀 난감하셨다고 했다.

"저분 이름은 김대환씨입니다.큰大자,불꽃 煥자입니다."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신화백께서는  너무 감사하다며 전시회 부로셔에 내 이름을  쓰고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서명하여 기념으로 내게 주었다.

아내가 오지랖도 넓다고 핀잔을 줬다

내가 지금도 그걸 보관하고 있는 것은 싸인보다 유명 음악인들의 캐리커춰가 좋아서다.

그리고 집엔 신화백이 쓴 책  "재미있는 클래식 길라잡이"도 있다.

 

黑雨(한 때는 "墨雨"란 호도 사용)  김대환씨(1933-2004.3)

인천 출신으로 신중현과 최초의 보칼 구룹을 결성했으며 조용필 이남이씨와 "김트리오"를 결성한 적도 있다.

남은 한가지 재주 를 갖기도 어려운데 흰쌀 한알에 278자의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 오른 분이기도 하다.

무엇으로 새기며 어떻게 새기는 가에 대한 질문에 텅스텐을 갈아만든 세필로 쓰며 "마음으로 쓴다"고  했다.

후일  현미경으로 그 쌀알을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대만에서  국립 박물관의 微刻 작품을 본적이 있는데  김대환씨의 작품에 비하면 한수 아래다.

2000년 워싱톤에서 2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공연한 적도 있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유명세가 강했던 분이다.

2001년에는  중앙대 국악대 타악연희과 교수로  취임했고 2004년 한성대에서 현대 김윤규 사장과 함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후   며칠뒤 친구 Y사장와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깍두기 국물이 먹고 싶어 얻어오자고 왔다며 독립문 근처*대성집"에서 셋이서 도가니 탕을 맛있게 먹고 와서   3일후 안타깝게도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인심 좋은 대성집에서 깍두기와 국물을 함께 많이도 싸주었는데  다드시지 못하고 돌아 가셨을 것이다.

 

 

 그분을  처음 만나 연주를  들은 것은  친구 Y 사장의 초청으로 1993년 신라호텔 회갑 기념 연주회에 갔을 때였다.

그 후  그분을 길에서 혹은 인사동에서 가끔 볼 수가 있었는 데 그의 특이한 복장으로 해서 멀리서도금방 알 아 볼수 있었다.

마르고 큰키에 항상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쓰던 녹색 안전모를  쓰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녔다.

그후 문화일보 홀에서 열린 할리 데이비슨 파이프 사운드연주회에서 무대에 올린 할리 데이비슨의 폭발음에 맞추어 두손 손가락 사이사이 10개의 북채를 끼고 두드리던 모습이 선하다.

다행히 그 귀한 음반은 CD 두장을 소장하고 있고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연주를 감상한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날  한강 대교옆 길가에 할리와 함께 서 있는 그 분을 보고  그분 옆에 차를 세웠다.

왜 여기 서 계시냐고 묻자 휘발유가 다 떨어져서  서있는 것이라고  멋적게 웃었다.

음악을 제외하면 어린아이처럼 영혼이 맑으신 분이셨다.

그 분은 붓을 주먹으로 내려잡고 아리랑을 독특한 글씨체로 쓰셨는데 여러장의 작품중 내 마음에든  한장을 집어 온것이 서명이든 두번째 물건이다.

 

어느 날 친구 Y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자기식당에 첼리스트 장한나양이 오는 데 한번 와서 만나지 않겠냐고 했다.

어릴때 부터 성장,연주 과정을 TV로 지켜보고 그녀의 연주가 좋아 바이올린니스트 사라장의 음반과 함께 장한나의 연주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 CD1-4집과  싸인인 펜 까지 준비하여 갔다.

내가 좋아 하는 젊은 연주자에게서 생애 처음으로 싸인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음반에다 직접 받아두면 기념도 되고 훗날 아들 딸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것 같아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故 김대환 선생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을 둘러보러 나서는 장한나양을  만나  친구 Y 사장과 나는  각각의 CD음반에 싸인을 받았다.

Y 사장이 아들 딸이 부탁해서라고 했다.

그냥 애호가라고 해도 될 것을 이미 얘기한 뒤라 어쪄랴.

나는 아직 5집은  못샀다고  덧 붙이며 애호가로서 미안함을 표했다.

햐얀 얼굴을 한 그녀의 모습은 TV에서 볼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항시  겸손의 미덕을 잃지않는 장한나양은 앞으로 훌륭한 연주자로 성장할  것이다.

그녀의 연주집을 들을  때  검정 싸인 펜으로 쓴 그녀의 싸인을 보며 만났던 시간을 기억한다.

함께 찍은 사진 보다 더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자기도 기념으로 갖고 싶다는 친구 Y 사장에게 CD 한장을 선물하고 남은  석장의 음반이 세번째로  싸인된 물건이다.

 

 

*대성집: 맛집 소개에도 많이 등장하는 음식점으로 독립문 근처 사직동인지 홍파동에 위치한 유명한 도가니탕집이다.

            지금도 큰 가마솥에 장작불로 밥을 해서 밥맛 좋기로도 유명하다.

            오래전  故 박정희 대통령이 골프치고 돌아오던 길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고 가신 곳이기도 하다. 

            전화:02)734-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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