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여 , 그대에게 부탁하니>
나 불길로 떠나는 날에
사랑이여 ,그대에게 부탁하니
떠나거든 부축없이 돌아서오
살아 즐겨 입었던 무명옷
수의 대신해 주고
하룻밤 곁에서서
그대 눈물 바라보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오.
힘들어도 사랑이여, 그대가
혼자서 나를 추억해주고
그대 때문에 행복했던 나의 웃음
영정 만들어 그대가 안아주오.
<추억 5>
지금은
도무지 갈 수 없는
내 뜰 그대는
키 작은 수수꽃다리
이르게 뜨던 초경달
수줍던 어지럼증.
그대 빈혈의 달빛 아래
나의 애련은 점차
팽창했으니
어찌 그대가 나의 첫사랑
아니었으랴
노후농 지음
본명은 노양한.
청주고를 졸업했다.
중 ,고등학교 친구다.
고교시절 학교 문예지에 싣고자 교무실에 국어 선생님에게 원고를 가져가자 소설을 읽고서 나선 친구의 뺨을 다짜고짜 때렸다 한다
그 정도의 폭력은 예사였던 암흑기의 시절이다.
" 야 , 너 어디서 베껴왔어"
친구가 전해주던 에피소드다.
친구가 글을 잘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선생님의 편견이었다.
난 국어 과목은 좋아했으나 고교과정을 통틀어 국어 선생님 중 그 선생님의 얄상한 코와 행동이 싫었었다.
문학에 소질이 있던 친구는 생뚱맞게 경희대 정치 외교과를 나왔다.
그는 50대에 이르러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경전 공부와 선수행을 하며 지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산사에 가 있는 것으로 짐작했으며 산에서 내려오면 가뭄에 콩나듯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그의 아들 결혼식은 비구니 스님을 주례로 세웠다
어느 날 갑자기 저녁을 사겠다며 자기 지인을 동행해 왔는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였다.
50이 넘어 시 세계를 열었다고 시집에 밝혔으나 그 동안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2007년 ,83쪽의 얇은 시집을 출간하고 내게 시집 한 권을 증정해주었다.
"점잖은 J 학형,
하나님을 영접하고 부인 만난 게 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는 형에게"-지은이 하고 달필로 증정 인사를 남겼다.
얇은 시집에 자신의 인생을 압축했고 가족의 추억과 함께 마치 유언같은 글들을 남겼다.
쥐어짜고 정제된 한 구절 한 구절에 그의 영혼은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걸음 씩 마중 가고 있었다.
2019년 보훈 병원에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았을 때 청력은 살아 있다 했다.
눈동자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파킨슨 병이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그동안 얘기를 전해주었다.
작별하려 일어서자 내가 잡은 여윈 손을 살며시 쥐며 소리 없는 입술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 고맙다".
작년 그가 2년여 투병 끝에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결 식장에 달려갔다.
코로나로 호주에서 오지 못한 장남.
세 남매를 슬하에 두었다.
화장 후 동작동 현충원에 봉안되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거나 군 복무시 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논산 신병 훈련소에서 훈련 중 입은 "공상"으로 얻은 보훈 대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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