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행·산책

폴란드 미술전 -Polish Art "An Enduring Spirit"

Jay.B.Lee 2015. 8. 27. 06:47

 

어린 시절 보고 싶은 영화가 들어오면 기다리다가 개봉일에 맞추어 가곤했다.

이제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기를 피하고 어느 때는 1.000만의 관중이 눈앞에 왔다해도 미루다  TV영화 체널의 신세를 질 때가 있다.

국립 중앙 미술관에서 열리는  폴란드 미술전 소식을 듣고 차일피일하다보니 8월말이다.

친구가 보고 싶어 한 것 같아 연락해도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비가 조금씩 부리는 날 .

이런 날 실내에서 작품 감상하기에 그만인 날이다.

마침 아내도 약속이 빈 날이라 함께 가기로 했다

일반 입장료 13,000원. 경로 6,000원이다

입장하며 모사품도 많은지 물어 보았다

전에 기획 전시에 모사품이 많이 등장한적도 있어서다.

 대부분  진품인 작품들이라고 한다

폴란드 21개 국립 미술관외에서 소장하던 작품들을 대거 해외에 전시한다는 것이 대단한 행사다.

특이나 폴란드 경제부에서 주관한 것을 보면 폴란드를 홍보하기 위한 노력을 짐작한다.

Polish,하면 폴란드 사람이란 문자적 의미도 있고 가난하고 조금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폴란드인들을 얕잡아 부르는 의미도 내포한다.

과거  항상 핍박을 받아온 폴랜드의 역사를 보면 우리의 역사와 흡사하게 닮아 있다.

쇼팽과 코페르니쿠스의 고향.

2차 대전시 독일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트레블랑카,소비브르 소용소.비르케냐드등 죽음의 수용소가 산재했던 나라다.

이제 민주화에 이어 문화로 세계로 도약하는 폴란드를 보여주고 싶은 일환인가 싶다.

프라하에서 밤 침대 기차를 타고 크라코프에 머물며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와 소금 광산을 다녀오던  추억이 있는 나라.

 

국립중앙 박물관

2015.06.05-8.30

 

입구에서 기념으로 아내의 사진을 찍어본다.

희끗 희끗보이는 머리칼이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폴란드 왕의 초상

"찬양하라,오 폴란드여

그곳에서 고결한 후손이 수없이 탄생했도다.

최고의 왕에게 끝없는 칭송과 숭배를 바쳐라"

<찬양하라 어머니 폴란드여>-13-14세기 폴란드 찬가

'폴란드 역사는 서기 966년 통치자 미에슈코 1세의 기독교 공인에서 시작된다.

이후 폴란드는 라틴 알파벳을 받아 들였고 서유럽 문화와 강한 유대를 형성하며 발전했다.

서유럽의 도시계획,건축및 예술양식은 폴란드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폴란드는 동쪽 영토의 확장을 통해 동방의 문물 역시 흡수했다....'

 

주교와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1500년경)-작자 미상

성모 마리아와 요한

예수께서자기 어머니와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자기어머니께 말씀하시되'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

하고 또 그제자에게 이르시되'보라 네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제자가 자기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6-27)

 

 십자가 책형(Crucifixion Group)-성모 마리아와 요한

 

 

주교의 복식( 뒷면) -돌출시킨 예수님,요한,마리아 와 사도들. 자수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성배

 

 

 

 

 

 

 

 

 

 

 

헨리크 발레지왕의 흉상이 있는 굽달린 접시(1650년경)

 

관람객들이 퍽 진지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얀 소비에스키 3세(1674-1696).폴란드가 정치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누렷다.1683빈에서 오스트리아및 독일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을

무찌른 얀 소비에스키는 이슬람교의 팽창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를 보호한 왕으로 평가 받는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

 

 

"예술은 일종의 무기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예술을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

 

 

코페리니쿠스(1871)-얀 마테이코

"코페리니쿠스의 이론보다 인류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발견은 없을 것이다."-괴테

 

 

여러가지 복식

마사에서 사용하는 방패.

 

스테인 그라스

비엘리츄카 소금 광부 협회의 뿔피리(1534)-안드레아스 뒤러

스톡홀름 두루마리

1605년 12월 4일 ,지그문트 바자 3세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콘스탄챠의 결혼 행렬을 그린 작품으로 15미터에 이르는 기록화.

나중에 스웨덴 왕까지 겸임.

17세기 왕실 문화와 복식,무기류에 대한 세부 사항가지 묘사되어 있어 주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200여년전의 정조의 화성 행차도와 비교가 된다.

 

 

 

 

 

Stefan Batory at Psko(1870-1872)

얀 마테이코(1838-1893)작품

바르샤와 왕궁 소장 

 

'16세기 폴란드의 황금기를 통치했던 스테팜 바토리 왕이 1579년 에서 1581년까지 러시아를 상대로 치룬 전쟁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러시아 사신들이 전통적인 평화의 상징인 빵과 소금을 왕에게 바치고 있다.'

 

 

 

 

 

 

 

 

 

 

 

 워비치의 소녀 ,1910년경-아폴로니우시 켄지에르스키 (1861-1939)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폴란드 중부 지방으로 화려한 의상과 다채로운 민속문화로 유명.소녀는 피나포어(Pinafore)를 입었다.

 

 

 

 크라코프스키에 프레드미드사치예 거리에서 바라본 왕궁 광장,1839-1840-얀 세이들리츠

 

 

*프레드릭 쇼팽(1810-1849)

19세에 외국연주를 떠났고 20여년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6세에 리스트의 소개로 만난 죠주르 상드와 화끈한 연애를 했고 37세에 상뜨와 헤어진뒤 폐결핵으로 39세에 사망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음악과 민족주의를 배웠고 파리에서는 인생,사랑,예술,국제주의를 배웠다.
베토벤은 피아노를 위해 작곡했다는 말이 있으나 쇼팽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작곡을 했다 할  정도로 피아노곡들이 유명하다.
이별곡,빗방울 전주곡,영웅 폴로네즈,즉흥환상곡,피아노 협주곡등이 유명하다.
유해는 애국지사나 큰 예술가들이 묻혀있는 프랑스< 페레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묘지에는 우리나라 이응로 화백도 잠들어 있다.)

쇼팽의 손-1849

 

장 바티스트 클래쟁제(1814-1883)

"장 바티스트는 소팽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왼손 캐스트를 제작했다.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주르 상드는 벨벳과 같은 쇼팽의 손가락을 예찬했고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그의 손가락은 오직 자신의 영혼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영혼으로 음악을 듣는 이라면 항상 그를 칭찬하게 된다'고 했다"

쇼팽은 죽어 파리 페래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다시는 갈 수 없는 폴란드 바르샤바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 단 한번 봤을 뿐-피아노 앞에서",1884-레온 비츄코프스키(1852-1936)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새벽녁의 플란티 공원(1984)-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

 

"독이 든 우물"(1906)-야체크 말체프스키(1854-1929)

음악

 

 

 

 

          양화공

 

 

 

 

 

후광이 있는 자화상(1978)-례셰크 소보츠키(1934-)

폴란드 포스터 파-20세기 후반 폴란드 예술은 이른바 "폴란드 포스터파"라고 불리는 디자이너들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