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기

안개속의 풍경

Jay.B.Lee 2013. 1. 25. 03:45
옮겨온 글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 그리스 에게해의 미코노스섬은 이러한 이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안개 속의 풍경'은 1990년대 말 여느 모텔처럼 젖소부인 시리즈나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같은 패러디 에로 비디오들이 선점한 그곳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뽑아든 비디오테이프 표지에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등 여러 영화제 수상을 증명하는 월계수관이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비디오테이프의 첫인상은 누구도 골라주지 않아 여전히 처박혀 있는 처량맞은 내 신세와 비슷해보였다. 아직도 이름이 어려운 감독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은 뉴욕 포스트의 비평문과 함께 그렇게 내게로 왔다.

"좋아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싫어하고 싶어도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 '안개 속의 풍경'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지금까지 영화가 도저히 성공하지 못했던 영혼의 영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최고의 위업을 이룩했다."―뉴욕포스트

열한 살 '볼라'와 그녀의 남동생 '알렉산더'.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난 이 어린 남매의 순례기는 음습하고 축축하기 그지없었는데, 영화에 가득 담긴 그리스의 쓸쓸하고 몽환적인 풍경의 황량함은 어쩐지 내 마음의 기울기와 꼭 맞아 그날 나는 싸구려 세제 냄새가 가시지 않은 침대보 밑에서 이들 남매가 나오는 꿈까지 꾸었다. 이명처럼 들려오던 빗소리에 가득 실린 안개가 아침에 한 무더기나 쏟아져 내려오기 전날 밤이었다.

"사랑하는 아빠, 우리는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하지만 부담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아빠를 만나보고 바로 떠날게요."

엄마와 함께 사는 어린 남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찾아 독일로 가는 기차에 무임승차한다. 하지만 검표원에게 걸려 기차에서 쫓겨난다. 역 부근에 사는 외삼촌을 찾아간 남매는 아빠가 독일에 산다는 말이 엄마가 꾸며낸 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아무 목적 없이 걷던 두 남매는 우연히 트럭을 얻어 타지만 트럭 운전사는 '볼라'를 강간한다. 동정 없는 세상을 떠돌기에 너무 약하고 여린 어린 '볼라'와 '알렉산더'는 수많은 절망을 조우한다. 결혼식 날 슬피 울며 도망가는 신부, 거리에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말, 기중기에 실려 하늘 위 젖은 빨래처럼 걸려 있는 집게손가락이 부러진 거대한 손, 공연 장소를 찾지 못해 끝내 해체되는 유랑극단…. 아름답지만 슬픈 그리스의 현실들이 어린 남매의 여정에 함께한다.

유랑극단의 청년 오레스테스에게 볼라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청년이 동성애자인 것을 안 소녀는 그의 곁을 떠난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아빠를 찾는 여행은 그렇게 계속되고, 국경지대에 도착한 남매는 몰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국경수비대의 총소리가 들린다. 환상 같은 안개 속 풍경 속에서 두 남매는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걸어간다. 결국 두 남매가 부재하는 아빠가 있다는 강을 건너 독일로 갔는지 아니면 레테의 강을 건넜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처음 '안개'를 만난 건 중학교 시절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였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우수에 찬 그리스의 안개는 너무 압도적이라 활자화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의 풍경'이 속삭이는 그리스는 밝은 지중해의 햇살이나 그리스의 유적지들이 아니라 차갑고 거대한 콘크리트 풍경들이다. 아파트의 기둥들이 세워지고, 벌판에 건물이 세워지고, 공장지대의 기계들이 세워지며 비로소 만들어진 도시의 이미지 말이다. 찬란했던 고대 문명을 꽃피웠지만 이젠 쇠락한 유럽의 한 변방국가가 된 그리스의 영욕을 표현하려는 듯 영화의 카메라는 남루한 마을의 광장과 눈보라치는 고속도로, 아무도 오지 않는 겨울 바닷가를 조용히 비춘다.

이렇게 암울한 광경 속에서 감독은 가끔씩 마법 같은 장면을 선물한다. 거리에서 갑자기 눈이 내리는 장면에서는 어른들은 모두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거리를 달려가는 희망의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을 내내 관통하는 이미지는 안개 속에서 걷고, 낙엽처럼 여행하며, 안개 속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그곳엔 더 짙은 안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유랑극단의 청년은 소녀에게 말한다. "너희는 참 이상해. 떠나려 하면서도 갈 곳은 없고, 그러면서 어디론지 계속 가고 있어. 목적지는 있니? 난… 허무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야.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한때는 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난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희망이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이란 단지 꿈꾸는 것이고, 희망이란 여기가 아니라 저기 강 저편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개 속의 풍경: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의 1988년 작품. ‘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라는 카피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침묵’ 3부작 중 하나다. 베니스영화제 19회 황금사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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