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펜션 주인이 된 김하사

Jay.B.Lee 2011. 7. 28. 21:17

 

가평에 696미리의 폭우가 쏟아졌다는 소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되는 비에 가평 친구의 펜션이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펜션앞으로는 앞은 계곡으로  가평 북면의 맑은 물이 흐른다.

몇년전 폭우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해오던 계곡이 엉망이 된후 이제 축대를 쌓아  개천 처럼 되어 버렸다

집은 계곡에서 높아 안전하다고 걱겅하지 말라고 한다 .

오늘도 두팀이 왔고 여름 평균 70프로 ,주말은 100프로 방들이 찬다며  8월 중순 지나서 우리부부가 함께 놀러오라고 했다.

이제 돈을 잘벌고 있어 맛있는 것 대접하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

작년에도 춘천 다녀오는 길에 들렸는데 아내는 이번에도 맛있는 시골 된장을 좀 얻어와야 겠다고 벼룬다.

 

그를 알게 된 것은 70년 군대 시절 인천 송도부근 육군 해안 경비대에 복무하면서다 .

 키가 작달만하고 다부지게 생긴 그는 마산에서 고교를 나와  단기하사(훈련병 기본교육후  차출되어 하사관 교육을 받고 사병 복무기간과 동일하게  하사로 복무)로 분대장을 나는 병장으로 부분대장을 맡고 있었다.

김하사와는 입대 동기인 김상병과 함께  한겨울  어두운 초저녁밤  맨발로  갯벌을 150미터 정도 걸어 들어가 간첩선으로 추정되는 배에 사격을 가한후 선원들을 모두  잡아온 전우다.(나중에 엔진 고장으로 표류한 어선으로 판명되었다)

제대후  서울에서 같은 부대에 복무하고 제대한  장교,하사 병장,사병등 40여명이 몇번 모였으나 나중엔 나를 포함 같은  나이에 비슷한 시기에 제대한 네명만 남게 되었다. 

내가  복교후 졸업하여  H자동차에  근무시 그가 나를 찾아와 자기 친척 여동생과 토요일  만남을 급히 주선하였다.

고모부는 시멘트 대리점을 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나 암에 걸려 6개월 밖에 못산다고 무남 독녀인 딸과 약혼만이라도 할 대상을 찾는데  내가 물망에 오른 것이다.

친구는 나를 잘 알고  재벌 회사 직원에 차남에다 나이도 27살,혹 "데릴 사위"가 되어도 그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대학 3학년인 그의 여동생은 생전 남자를 사귀어 본적이 없어 보이는 22살의 어리고 순수한 아가씨였다.

경복궁을 함께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 다방에 지하 다방에서기다리고 있던 그는 고모  성화에 나왔다고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대답을 듣고 가야 한다 했다.

딸이 어려서 사귀다 헤어지면 마음에 상처을 입을까하는 어머니의 입장은 이해하나  돈 많은 부자라도 내 일생을  한번의 만남으로 결정짓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76년 내가 결혼해 잠실 3단지에 신혼 살림을  차렸을 때 김하사는 우연히도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 결혼한 터라  아들과 딸이 있었다.

군시절 마산에서  면회온 그의 고향 애인(현재 부인)을 위해 부대 부근  민가 아저씨가  방을  빌려주어  바다에 밀려온 마른 통나무를 잘라 분대원들이 군불을 때준적이 있다.

그때  아들을 만든 것 아니냐고 친구들이 놀려대도 부인하지 않았다.

"하사님에게 불 때 주던 녀석들이 핫핫"하며 웃기만 했다.

그들은 수저 두벌과 냄비 몇개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친구는 시멘트 대리점근무 ,청계천 공구 상가에서 에어 컴프레셔 판매대리점도 직접 했다.

그후엔 군대 친구 벽시계 공장에서 근무하다  독립해 나와서는 할로겐 렘프 제조 그리고 공장이 가평에 있던 인연으로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가평 북면이다.

그가 오래전 사두었던 땅에 콘테이너를 가져다놓고 이층집을 지었을 때 군대 친구 부부들이 모두 가서 축하하고 하룻밤을 자고 왔다.

그동안 열심히 축대 쌓고 나무 심고 꽃밭을 가구며  토종벌들을 키우고 가끔 오가는 등산객에게 닭도 잡아주고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이층방도 내어주고 하더니 지금은 벽돌 이층집 옆에 방가로형 펜션 세채를 지었다.

그동안 딸은 국영기업에 다니는 사위에게 시집보내고 아들은 조리학과를 졸업후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실무를 쌓고 돌아왔다.

아들이 미국에 간 것은 평소 아들을 외국으로 보내라고 수시로 한 내 얘기를 귀담아 들었던거다

미국에 주저앉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 영주권 받아 정착시키라고  했지만 아들은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축하인사를 하자 친구는 며느리감이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거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막상 결혼식 신부대기실에서 찾아가 본 신부는 화사하게  생겨 참하게 생긴  며느리를 원했을 두 부부에겐 실망이었나 보다

아들이 바깥 세상을 돌아보며 엄마 처럼 순한 여자보다 자기의 약점을 보완해줄 적극적이고 세련된 여자를 고른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들은 호텔에서 일한후 유망한 식품회사로 옮겨 개발팀장을 맡고 있다.

김하사는 이젠 4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

부인은  젊은 날 공장에서 나를 어떻게 많이 부려 먹었는지 하소연 하며 이곳 저곳이 쑤셔  집에서도 더 이상 일을 않는다 했다.

친구는 지난 날 지은 죄가 많은지 부인 앞에서는 묵묵 부답이다.

친구는  차를 몰고 가평으로 단체 손님들을 모시러 나가랴 예약 전화 받으랴 바쁘다.

고급 펜션은 아니나 서울서 가깝고 단체손님들이 묵기에 싸고 편한데다 "주인 할아버지"가 소탈하고 주위 산수가 수려해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쌀과 소주는  손님들이 남기고 가는 것으로도  넉넉히 해결된다고  너털웃음 짓는 그다.

이제 그의 말처럼 돈을 잘벌고 있어 신세를 지고 와도 부담이 없다.

김하사는 수 많은  파고를 헤치며 자기 삶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크게 웃는다고 했던가.

인생의 4막을 평안하게 사는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차가운 바닷 바람을 맞으며 어두운 밤을 함께 지키던 군시절로 부터 40년.

따지고 보면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가 만나는 시간 속에는 늘 청춘의 시간이  함께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