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에 안사람과 우이동 "선운각"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꽃필 때를 맞추려다가 가지 못할 수가 있어서다
차보다 지하철로 가기로 했다.
우이역까지 가는 경전철을 처음 타볼 수 있고 선운각까지 도보 1.5Km 편도 30분이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히 걷기 운동이 될 듯싶다.
차로 가면 선운각 부근에서 카페 손님에 한해 주차비 3천 원을 받는다.
협소한 관계로 주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차로 가면 한가지 계곡을 보며 걷는 즐거움은 놓치게 된다.
우이역 2번 출구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현충비가 있는 공원.
국제 클라이밍 센터에서 등반 중인 사람들 구경도 하고.
적정한 장소에 잘 만든 시설이었다.
흥미로운 건물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붉은 건물은 1921년 종로 경운동 (수은 회관옆)에 건축한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1969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3.1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세워졌으며 이 건물은 별관이다.
안에 들어가자 이 곳을 관리하시는 분(70세 정도)이 나와 친절히 설명과 안내를 해주었다.
옛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어서 건물을 보면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이 난다
서울역사, 사당동의 옛 벨기에 영사관 건물처럼 (현 서울 미술관 남부점)
손병희의 선생 묘소가 있는 중 처음 알았다.
선언서.
급히 인쇄하느라 첫 글귀 <조선>의 활자가 바뀌어 있다.
전시물
봉황각.
"봉황각은 3.1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10년 만에 나라를 찾겠다"며 1912년 봉황각을 짓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준비했다.
의암 선생은 이곳에서 7차에 걸쳐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49일 수련을 사켜 민족정기를 길러냈으며 , 이들은 3.1 독립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만세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건국의 요람이요 민족의 성지라 할만하다.
많은 선조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수고를 했지만 정작 나라를 되찾은 건 미국의 승리로 이뤄어졌다.
봉황각.
마당의 등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왼편 건물은 기숙사 겸 주방.
봉황각 내부 에서 교육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손병희 선생은 청주 출신이다
안내하신 선생님께 내 고향이 청주라 하자 본인은 청주 북일면이라 했다.
고향분이 친절히 안내해주어 반갑고 더욱 고마웠다.
부부 사진도 찍어 주시고.
손병희 선생 묘소 가는 길.
1861년 충북 청원군 출생.
1894년 동학혁명 (어린 시절엔 동학란으로 배웠다) 당시 동학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다.
1897년 해월 최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3세 교조가 되었다.(1세 교조 수운 최제우)
처음 이곳에 28,000여 평 토지를 매입하였다가 일부 매각하고 남은 18,000여 평의 부지라고 한다.
손 병희 선생의 묘소.
묘소가운데 천도교를 상징하는 로고가 새겨져 있다.
묘소 양쪽 석주엔 다람쥐(다람쥐는 아니라 한다) 비슷한 동물이 무얼 물고 내려가고 다른 한 석주엔 올라가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제1세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1824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출생했다.
대신사는 울산에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게 되었다
친서의 내용은 전해 지지 않지만 "하늘에 기도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다
대신사는 수행 후 한울님으로부터 결정적 종교체험을 하게 되고 그 득도한 날을 천도교의 원년으로 삼는다.
양민도 천민도 없이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시천주(천도교의 중요한 용어로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보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게 된다.
1964년 스스로 체포의 오라를 받고 천명을 지키기 위해 형장으로 스스로 올라 41세 나이로 순도 했다.
2세 교조 해월의 본명은 최경상으로 1827년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이름을 스스로 시형으로 고쳤다
머슴살이, 제재소 노동자, 화전민으로 살다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깊은 수련을 통해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1863년 대신사는 해월 신사에게 도통을 전수, 동학 2세 교조가 된다.
그는 36년간 숨어 지내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조직을 정비, "교조 신원운동"을 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다.
이 운동은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하여 갑오 동학 혁명으로 이어졌다.
1898년 관군에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도 하였다
향년 72세.
"천도교의 종지는 "인내천'이다 곧 사람이 한울님이라 는 뜻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종지는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 성사 때 부각된 것으로 오늘 날까지 천도교 종단의 종지가 되고 있다ㅣ대신사의 가르침에 집약되어 나타난 말은 '시천주"-내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로 천도교 종교적 가르침을 나타내는 핵심 어휘다."
마치 공원같이 조용한 곳이어서 가을에 다시 찾아와도 좋겠다.
선운각 가는 길.
우측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쓰레기 하나 없는 맑은 계곡은 마치 강원도 소금강을 보는 것 같다.
대형 주차장 2개가 있으며 하나는 시내버스 주차장이고 하나는 트럭 주차장이다. 그곳에 주차 불가.
마침내 오고 싶었던 선운각에 도착했다.
전에는 결혼 식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2021.8월 카페로 오픈한 곳이다.
한옥건물 굴뚝에 선 십자가가 생뚱맞았지만 이곳의 현 소유주가 할렐루야 교회임을 나타내는 흔적이 이곳 저곳에 있다.
옛날 고급 요정이었을시 VIP들은 이곳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한옥과 한옥을 잇는 다리.
옛 요정에서 사용하던 자개상이 나와있다.
이곳 건물(한옥 아님)에서 마시기보다 한옥으로 나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아침 한잔 외에는 커피를 들지 못하는 아내는 대추차, 나는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음료 가격엔 한옥 관람료가 포함 되어있다 여기면 저렴한 가격이다.
거의 궁에 가깝게 지은 한옥.
한옥 내부가 방석과 탁자가 아닐까 했다.
다행히 밖에는 작은 테이블등과 의자와 돗자리 방석이 있다
이 인조 잔디에서 야외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봄에 때를 맞추어 오면 벚꽃을 볼 수 있고 가을 주위 단풍이 볼만하겠다.
방 안에 앉아 차를 마시는 운치를 즐기기엔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다.
허리가 아플 수 있어 절대 삼가해야 했다.
깨끗한 복도 마루위를 신을 신고 다녀도 된다.
마루가 상할까 우려되어 차라리 실내화를 제공하면 어떨까?
한옥과 주문처인 카운터를 잇는 통로.
모두 인조 장식이다.
옥상.
선운각을 나와 잠시 내려가 본 기도처.
할렐루야 성도들과 서울 시민이 기도한다는 기도 동산 '통곡의 벽"(할렐루야 기도, 원장 김계화 ).
통곡의 벽-예루살렘의 기도의 벽이름을 땃다
기도처로 이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는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기도가 절실한 때다
우연히 발견한 계곡의 원앙새 한 마리. 짝이 없다.
모르고 지나는 행인들을 불러 세워 원앙을 보고 가게 했다.
내려오며 올라가던 길과 다르게 계곡 옆길을 택했다.
둘레길은 파라스 호텔 리조트 앞으로 연결되었다.
5성급 호텔. 주말 하루 숙박료가 50만 원대(세금 제외)
호텔측에서 호텔과 계곡사이에 있는 정원을 일반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E 마트 25와 스타벅스가 있다.
너무 허기가 져 지하철역까지 가봐야 마땅히 먹을 것도 없어 편의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올라갈 때 갓 튀겨낸 꽈배기(길왼쪽에 있으며 추천하고 싶다)로 간식을 먹고 점심은 김밥과 삼각 김밥이다.
이마트에서 구입한뒤 스타벅스 앞의 테이블(많다 )에서 먹으면 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호텔 측에서 스타벅스용 테이블이 아니라며 이용에 대한 설명까지 붙여 놓았다.
파라스 호텔 정문.
선운각을 오며 안사람은 우연히 들어간 봉성각과 손 병희 선생 묘소, 등나무 꽃.
생각보다 근사한 한옥 카페, 맑은 우이동 계곡과 한산한 길.
꽈배기와 삼각김밥등을 먹으며 일상을 벗어난 날이어서 재미있어했다.
12,000보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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